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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개

시 하나

by 흰여우

하얀 모서리가 얇게 깎여나간

네모 각진 나는 쓰다가 만 지우개에요

언제부터 그랬냐 물으신다면

나는 다만 폭신한 솜이 되고 싶었다 답하겠어요


내가 자랑하고픈 것은 순백의 새하얌

날카로운 모서리는 한평생을 깎아왔는데

어느새 뾰족한 날은 무뎌졌음에도

지친 내 몸 위로 덮이는 것은 까망 흑연가루


누군가 나를 지우개로 사용함에

비로소 다소곳이 모셔있던 문방구의 기억이 떠올랐고

그건 그리 좋은 일만은 아닌 것 같아요


고무는 쉽게 불타오르지 않는다지만

그래도 내 속은 검게 타 버렸는데

난 다만 한 송이 솜이 되고 싶었는걸요


폭신한 마음에 대한 소망이

질기고 질긴 고무마저 까맣게 태울 줄은

나는 솜이라 외치고 싶었던

지우개 자신도 몰랐던 잔혹동화


이 동화에 해피엔딩은 없는 걸까요

적어도, 불쌍한 지우개를 위한 엔딩 하나 정도는 만들어 줘요

내 안에 숨어있던 여린 동심이 외치는 말


거기다 데고, 이건 동화가 아닌 드라마야-

가시 같은 말만을 들어버린 나는

흑연가루 묻은 지우개 하나를 정성들여 포장하는 거

오로지 그게 최선의 엔딩이라 믿게 되었나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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