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것들에 대하여
막냇동생이 태어나면서 왠지 모를 상실감이 생겼다. 동생이 어린이집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엄마는 더 바빠졌고 그 원인이 막냇동생인 것 같아서, 그런 막냇동생이 얄미웠다. 그게 내 어린 나이에 가장 먼저 생긴 상실감이라고 생각했다.
엄마가 사주셨던 두꺼운 연필심을 끼워 사용하는 샤프를 교실에서 잃어버리고 늦게까지 교실에 남아 그 샤프를 찾으려고 했었던 기억이 난다. 마치 어딘가에 숨어있어서 자신을 찾아줄 것이라고 믿고 있을 샤프를 생각하면서 나와 같은 샤프를 가지고 있던 그 애에게 내 것이 아니냐고 서너 번 물어보기도 하고 선생님께 꽤 진지한 표정으로 찾아달라고 요청하기도 하고. 그게 초등학교 때 내가 소중하게 생각했던 물건을 잃어버리고 얻은 두 번째 상실감이었다.
그렇게 자라면서 작디작은 상실감들을 경험하고 큰 상실감에도 무뎌질 수 있는 사람이 될 줄 알았는데 키우던 강아지가 수업시간에 죽었다. 사랑스러운 강아지가 매일 있던 곳에 없다는 것. 야위어져 가는 강아지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것. 그것은 꽤 어린 나이에 느낀 엄청나게 큰 상실감이었다.
이후에는 절대 강아지를 키우지 말아야지. 강아지를 만나지 않았다면 겪지 않았을 상실감을 느끼게 되었던 날. 내가 선택한 과거들이 모여서 새로운 상실감을 만들어 낸다고 깨달았다. 이게 바로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의 상실감이라면 한 번이면 충분하다,라고 느꼈던 것 같다. 그렇게 오랫동안 강아지를 갖고 싶다고 말해본 적이 없었다. 어떤 상실감은 오래오래 마음에 남아 새로운 순간들을 두렵게 했다.
좋은 사람들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이 냉정하다 못해 뾰족한 시선으로 날 쳐다보기 시작했을 때. 한쪽 귀를 내어주며 나의 시간을 쪼개어 누군가와 일상을 공유하였으나, 그 시간이 누군가에겐 헛된 시간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시간의 흐름은 상실의 역사가 되었다. 모든 일은 어쨌든 경험이 되지만, 구태여 겪지 않아도 답을 아는 것에 대해서는 굳이 겪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 밤들이 많았다.
여러 번의 헤어짐을 경험한 이후에도 상실감은 늘 처음 겪듯 생소했다. 아, 그때 그 사람이랑 헤어졌을 때도 그랬는지 그때는 이쪽 마음이 시큰시큰했던 것 같은데 또 다른 사람과 헤어지고 나서 생기는 시큰거림들은 매번 새로웠다.
짧다면 짧은 내 인생에서 몇 번의 상실을 경험했어도 그 모든 상실이 익숙해지지 않는다는 것. 사실 상실의 역사는 태어나면서 엄마의 모체를 벗어나 삶이라는 곳에서 숨을 쉬기 시작하면서 시작된다. 어두운 곳에서 엄마만을 의지하고 살 수 있었던 그곳을 벗어난다는 것이 아마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상실이었을 것이며 지금은 내 삶을 살면서 여러 가지 삶에 대한 선택권을 포기하는데 그때 또 다른 상실을 경험한다.
이미 지나온 길의 역사에 만약이라는 가정은 미련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 길을 선택했다면 달라졌을까라는 물음은 상실한 선택지에 대한 집착을 만든다.
유난히 까만 밤은 상실의 역사를 찬찬히 읊을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 된다. 일에 치여 지내온 하루의 끝에서 마음이 풀어지면, 잊었던 시간들 속에서 갇혀있던 추억이 나온다. 창을 타고 넘어든 나뭇잎의 나풀거리는 소리는 플라타너스 나무를 보고 뛰어나가던 대학생 시절 어느 순간을 불러오고 나무 사이로 언뜻 보이는 달은 같은 시간 달을 보며 같은 소원을 빌었던 친구들을 부른다.
같은 시절 나랑 같은 시기에 비슷한 상실을 겪었던 사람에게 물어보고 싶을 때가 있다. 그 사람에게 그 상실은 어떤 의미가 되었는지 상실을 겪어서 과연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는 자양분을 얻었는지, 아니면 그 상실을 살아온 삶에서 송두리째 떼어놓고 싶은 추억이 되었는지.
얼마 전 선배들이 겪은 상실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었다. 여전히 좋은 사람과 좋은 시간들을 보내고 있지만 마음속 깊은 어딘가에는 예전에 생긴 상처가 너무 깊게 남아 아직도 가끔은 생각이 난다는 그런 이야기. 한 번쯤 어떻게 지내는지 너무 궁금해서 연락을 해볼까 말까 고민하다가 잠에 든다는 이야기.
시간이 지날수록 진해지는 상실의 깊이가 있는 반면 옅어지는 상실이 있어서 그나마 오늘을 사나 보다. 오늘은 여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