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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라 Oct 15. 2023

안녕 나의 가해자 4

#고통의 메타인지



우리는 모두 피해자이자 가해자이다. 그러나 내가 누군가의 가해자였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을 얼마나 용기 있게 수용하는 지에는 편차가 크다. 대부분은 먼저 자신이 받았던 피해에 대한 보상이 이루어지길 원한다. 때로는 그 보상의 대상이 직접적 가해자가 아닌 뜬금없는 상대지만 자신이 좀 더 우월함을 느낄 수 있게끔 해주는 사람이 되기도 한다. 은연중에 이루어지는 끊임없는 서열화 속에서 자신도 결국 별 수 없이 누군가의 앞에서 무례해진다. 사회적 성장을 저해시키는 불행의 쳇바퀴처럼 사회적 약자는 끊임없는 좌절과 수치를 맛보게 된다.     


작금의 시대는 호화롭고 눈부시다. 물리적인 면에서는 말이다. 하지만 정서적인 내면들을 기준으로 살펴보자면 상위 1퍼센트는 완전히 뒤집힌다. 휘황찬란한 시스템 안에서 촘촘하게 관리를 받으며 살고 있는 우리의 정서가 과연 얼마나 건강할 수 있을까? 체계 자체가 불필요하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어느 정도 안전과 생존을 기반으로 하는 성장 가능한 체제는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그 선이 어느 지점부터는 권위자를 과보호하기 위해 오히려 정서적 성장을 저해시키고 있다는 것은 진지하게 고민하고 생각해봐야할 문제인 것도 맞다.     

꼭 필자처럼 극단적이거나 어려웠던 배경을 갖고 있지 않더라도 겉으로 보기에는 좋은 관계처럼 보이지만 관계의 주도권이 상당히 치우친 경우들이 많이 있다. 나의 경우, 차라리 극단적으로 불행했었기에 치우친 관계에서 한 순간에 벗어났던 것이 어쩌면 정서적 독립의 빠른 수순일 수 있었다. 그러나 주변의 다양한 케이스의 사례를 접하며 오히려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한 쪽이 지나치게 의존적이거나 권위적인 것을 인지조차 잘 하지 못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과연 지금 속해있는 관계에서 자신만의 가치를 얼마나 존중하고 존중받으며 살고 있는지 묻고 싶다.         






나의 감정을 수용 받고 인정받을 곳은 사회 어느 곳도 없다. 누군가에게는 유일하게 감정을 주고받을 공간이었을 가정에서 나는 가장 오랜 시간 굳건하게도 감정표현을 하는 것에 마비상태가 지속되고 있었다. 유아기 아동기 시절의 감정이나 욕구를 제대로 수용 받아 본 적 없는 채로 자라 성인이 된 뒤 사랑받고자 하던 순수한 욕구가 인정을 받아야만 하는 조급한 욕구로 바뀌게 되면서 굳어진 비뚤어진 관계기술로 자기 주변의 가까운 사람을 갉아먹는다. 성인의 감정을 수용해주는 곳은 더더욱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감정을 제대로 인정받아본 적 없는 성인의 삶은 지속될수록 피폐해진다.     


이전 편에서 언급해왔듯 나는 다소 극단적인 스토리를 가진 희생양이었고 이 포지션에서 극복하는 데에도 매우 격동적이었다. 그러기에 과정이 다소 힘든 면이 있었지만 내가 찾은 내면의 평화의 가치는 그 과정과는 별개로 엄청난 평안의 결과를 가져왔다. 그런 입장에서 볼 때 대개 겉으로 볼 때 그럴듯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사실은 한 쪽으로 매우 치우쳐져 있고 그것으로 힘들어하는 것까지 읽히는데 문제는 당사자는 기꺼이 그를 감수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마음은 힘든데도 불구하고 현실적인 편리함과 그가 속한 체계에서 얻는 이득을 위해 기꺼이 감수하는 괴로움 말이다.     


집에서는 집에서 대로 학교에선 학교에서 대로 매번 과도한 양보와 지나친 책임을 다해야 했고 그것에 대한 지적과 평가를 매 순간 받게 되며 ‘나’는 위축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쌓이는, 하기 싫고 두려운 느낌은 차츰차츰 적립되고 있었다. 아무리 내 기준에 열심히 해낸다 한들 타인의 기준에서는 늘 모자라고 부족했으니 자신감도 바닥인 상태에서 새로운 것까지 받아들여 해내야 하는 매 순간이 지치고 공포스럽기까지 했었다. 이 공포감을 해결하는 방법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MBTI나 개인이 고유하게 습득한 사회적 기술을 통해 자연스럽게 회피하거나 다른 가치에서의 더 큰 만족감을 얻어내는 등 다양하다. 그러나 회피는 분명한 후폭풍으로 돌아온다. 아무리 MBTI의 대문자 T 성향을 가진 사람도 그 사람의 감정이 억눌려지는 것이 반복되다보면 훗날 아이를 양육할 때 겹치거나 또는 노후에 반드시 불가피하게 폭발한다. 사람은 결국 AI가 아닌 감정을 가진 존재일 뿐이다.


속으로 자신이 가진 윤리나 양심의 가치관이 있을 텐데도 불구하고 어떤 사회적 압박에 의해 자신의 신념을 굴복한 경험이 사실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다른 어떤 수치심보다도 가장 강한 수치스러운 마음은 이럴 때 강하게 남겨지지만 이런 경험이 쌓이고 거듭될수록 엉켜가는 정서의 원인을 찾기가 더더욱 어려워진다. 이러한 반복 속에 차곡히 쌓이는 열등감을 어떻게든 감당해내려고 애를 쓰고 있는 무렵, 그 상황에 익숙해지다 보면 읽히거나 보이는 것이 있었다. 바로 나를 평가하고 지적하는 권위를 가진 사람들에게도 서툰 면이 분명 있다는 점과 그것을 감추려 더더욱 나를 비난하고 옥죄는 행동을 하면서 자신들의 치부를 감추려 한다는 것이었다.     


문제지적은 충분히 했고 이제는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일까? 가정에서 물리적 또는 정서적으로 학대를 당하거나 권위적 가장에게 복종해야 했었고, 학교나 사회에서는 입시제도의 서열에 끊임없이 경쟁을 당하며 눈치만 보기 바빴던 피해자일 뿐인데 여기서 뭘 더 어떻게 해야 된다는 걸까?


더 이상의 조언도 받아들이기 힘들겠지만 부디 이 말만은 들어줬으면 좋겠다. 당신은 지금 당신의 힘든 마음이나 힘든 순간을 즉각 말로 할 수 있어야 한다. 힘들면 좀 편안해지고 싶다고, 경쟁을 당하는 이 순간에서 벗어나 그저 편안한 성장을 해보고 싶다고 말해야 한다.     


불만을 제기하거나 갈등을 직면하는 것이 매우 두려운 우리나라 특유의 정서에서 반드시 벗어나야 한다. 사실 이런 직면은 나이가 어릴수록 잘 하는 편이다. 나이가 들기 전의 나 또한 분명 그랬으니까. 하지만 다소 과격하거나 염세적이었다. 부드럽게 표현하고 의사를 말해본 적이 전무했기 때문에 그저 참고 참다가 빽 소리 지르듯이 터져 나왔던 것뿐이다. 나 역시 그랬기에 매우 공감하지만, 이제는 그 어릴 적 설렘이 더 크던 시절로 돌아가 우리는 이 순간에 나 자신을 불편하게 하는 모든 것을 인지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변화시키기 위해 그저 가치를 찾아내면 된다. 거기까지만 해낸다면 말로 하는 것은 무척 쉬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상에서 불편하고 어려운 점들을 찾아보라고 했을 때 성인기가 많이 지난 사람일수록 경직된 마음이 고착화 되어 인지조차 못 하는 경우가 많다. 바로 이 점이 자꾸 스스로를 피해자의 마음에 가둔 채 그 마음으로 다른 사람에게 또 다른 가해를 하게끔 만든다.     


당신이 피해자의 마인드에 갇혀있는지 아닌지를 확인할 수 있는 질문이 있다.     


보름간 당신은 최선을 다해 이 시험에 대비했었다. 그리고 대망의 시험을 치룬 뒤 점수를 확인해봤는데 그만 답안지를 밀려 쓰는 치명적인 실수를 했고, 당연히 결과는 최악 중의 최악이었다.     


위 가정 상황에서 머릿속으로 스스로에게 어떤 말을 해주고 있는지를 답해보았으면 좋겠다. 당신도 혹시 지금까지 '자신을 괴롭혀오던 가해자'는 아니었는지 묻고 싶다.


필자의 경우에는 머릿속으로 하는 자책과 비난으로도 모자라 공공장소에서마저 스스로를 비하하는 말들이 튀어나오기도 했다. 심한 경우엔 육두문자까지 섞어가며 결과에 대해 매몰차게 악담을 퍼붓고는 했었다. 이렇게 매 순간의 실수나 실패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가정이나 학교, 사회에서 받았던 비난의 말들을 머릿속에 끌어안고 살고 있다면 그 강도가 약하든 강하든 당신 역시 안쓰럽게도 스스로를 피해자의 마인드에 가둬두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사람을 죽였다고 하더라도 나는 내가 어쩌다가 그렇게 끝끝내 사람을 죽여야만 했었는지를 변호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한다. 어느 누구도 나를 위해 내 마음이 왜 그렇게까지 했는지를 말해주지 않는다. (돈을 내고 변호사를 선임하는 경우조차도 재력의 서열에 따라 나의 애절한 마음이 표현되는 결과가 갈릴 뿐이다.) 그러니 내가 패닉에 빠지지 않은 채로 어떤 마음을 얼마나 긴 시간 참아내고, 얼마나 정중하게 많은 대화를 시도하려고 했었는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했다. 물론 처벌을 피할 요량을 꾀하라는 뜻이 아니다. 사람을 죽였다면 응당 대가는 치러야 한다. 그러나 적어도 왜 그런 마음이 들어 그런 행동을 했었는지에 대해 당신은 끝까지 당신 자신의 편에 설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하다못해 사람을 죽였을 때의 예를 들었는데, 우리는 정말 사소하고 하찮은 갈등들을 직면하고 해결할 힘이 없다. 다시 상기하자면 우리가 이렇게 내면의 힘이 없게 된 것은 사회 제도 자체로도 충분한 사유가 된다. 그러나 이제부터라도 이 모든 갈등들을 제대로 인지하고 나의 마음에 대해 표현해보기 위해 훈련이 필요하고 조금씩 시도해야 한다. 더 이상 지금 겪고 있는 내면의 갈등과 상대방 또는 사회 속에서 겪는 불합리함을 방치하면 안 된다. 너무 격하게 표현 하라는 것도 아니고 극단적으로 무례하게 말 하거나 행동하라는 것도 아니다. 정말 마음의 동요가 편안한 상태에서 우리는 얼마든지 지금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토론문화와 중재문화가 낯선 우리에게는 그저 오랜 시간의 훈련과 연습이 필요할 뿐이다.     


여기, 남편이 시댁을 자주 가자고 해서 버거운 아내와 집안일을 제때에 하지 않는 아내가 불편한 남편이 있다. 이 부부는 사이가 좋다. 늘 농담도 잘 하고 대화도 많다. 하지만 각자가 가진 불만을 표현하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그저 내가 더 불편하고 말자는 마음에 참아주곤 한다. 그러다가 결국 자신의 체력적 심리적 한계가 오던 어느 날 한 쪽이 폭발을 하게 됐고, 이 폭발적 갈등이 트리거가 되어 몇 개월간의 냉각기로 이어지게 됐다. 이 또한 나의 이야기다. 왜 이렇게 됐을까를 아주 오랜 시간의 상담과 학습을 통해 알게 됐다. 그저 아주 조금 불편했을 때 그 마음을 기분 좋게 표현했어야 했던 것이다.     


“나는 오늘은 우리 둘이서 즐거운 시간을 가져보고 싶어.”


“오늘 내가 너무 피곤하고 예민해서 좀 정리된 바닥에 누워 편하게 쉬고 싶어.”     


되게 별 거 아닌 표현이다. 그저 이런 편안한 표현이 가능한 때를 인지해 매 순간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면 됐었던 것인데, 사소하고 하찮은 순간으로 치부되어 자신들의 마음들을 꾹꾹 참으면서까지 ‘배려’를 선택한다. 그러다가 배려가 권리가 되어 버리고 결국 배려의 한도가 다 끝난 뒤에서야 갈등이 야기되곤 했던 것이다. 하지만 나의 어떤 과도한 배려는 상대방의 성장을 막는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새겨야 한다.     


지금 성인이 된 당신이 부모님에게 과도하게 받고 있는 배려와 호의가 불편한 참견이 되어버리기 전에 당신의 독립적인 삶의 선이 어디인지 인지할 수 있어야 하고, 학교나 회사에서 당신에게 무리하게 요구하는 업무의 지시나 부탁, 또는 과도한 성적 및 결과 만능주의의 시스템의 일례들을 파악해서 당신의 수용 가능한 선이 어디까지인지를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당신이 지금 대의와 집단을 위해 기꺼이 참아주고 있는 그 불편함을 표현하지 못하고 인내만 하고 있다면 결국은 당신은 물론 당신의 영향력이 끼치는 모든 주변인들까지 삶을 갉아먹히게 되는 것이다.


지금 당신의 마음을 불편하고 불쾌하게 만드는 사소함을 인지했다면 그 다음 당신의 마음을 어떻게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지에 대한 매우 간단한 팁들을 알려주고자 한다.

경험에 의하면 이론은 간단하지만 이 모든 과정은 늘 훈련이 처절하게 힘들다는 게 함정이다. 특히 마음이 힘들었었다. 지금까지 내가 해왔던 배려들이 타인의 성장을 막았을 뿐더러 나 자신에게 너무 가혹했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과정이 결코 쉽지만은 않았었다. 그러나 더는 우리 중 누구도 타인은 물론, 스스로를 비난하는 가해자로 두어선 안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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