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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그널 G Aug 12. 2021

대청호오백리길 1구간의 바람

[ 차철호의 #길 ] 길 위의 호수, 그 숲에 바람이 불면

흔들리거나 힘들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집 나간 초심 찾으려 SNS에 올리는 몇 마디가 있다. 잊힐 만하면 다시 올리곤 하는데, 축구선수(였던) 두 사람에 관한 이야기다.   


① 안 되더라도 포기 않고 될 때까지 뛰는 노력 
② 고참이어도 후배들보다 더 많이 뛰는 솔선수범 
③ ‘짬밥’이 많든 적든 개인보다 팀을 위하는 헌신 
④ 레전드급 실력이어도 절대 우쭐대지 않는 겸손 
⑤ ‘하라’고 시키는 보스가 아닌 ‘하자’고 하는 리더. 
- 이들이 달리며 보여준 것은 축구 그 이상의 것. 
- 이들을 사랑하는 이유, 축구 잘해서가 아니다. 


대청호 와서 불쑥 축구이야기를 꺼낸 건 이 곳에 서면 오버랩되는 기억들 때문이다. 6년 전 대청호오백리길 첫 완보 할 때 동행했던 선후배들, 좋은 길 험한 길 같이 걸으면서 그들에게서 받은 에너지가 그러했다. 솔선수범하고 배려·헌신하고 신뢰하고…. 그 기억은 내가 흔들릴 때마다 다잡아줬고 다시 길을 갈 수 있도록 초심을 북돋워줬다. 


오랜만에 대청댐에 왔다. 예전엔 공도교를 개방하지 않았는데 요즘은 개방한다.

#0. 들머리 

73번 시내버스 타고 대청댐에 왔다. 오랜만이다. 대청댐에 오면, 지난날의 기억들이 떠오른다. 가깝게는 몇 년 전 대청호오백리길 유람할 때가 떠오르고 멀게는 30년 전 대청댐에 처음 왔던 여름날 기억도 떠오른다. 그 때는 시내버스가 73번이 아니고 730번이었는데…. 오늘 여정은 대청댐→전망쉼터→지락정→지명산→대청정→보조여수로→이촌마을→강촌마을로 가는 6㎞의 길. 대청호오백리길 21개 구간의 시작점이다.     ▶경로 자세히 보기   


#1. 기억을 걷는 시간 

대청댐 위 공도교 갔다가 대청호오백리길 1구간 들머리 대청댐물문화관 뒤편으로 향한다. 나무계단을 올라 산길을 탄다. 얕은 산길, 후텁지근한 장마철 오후는 만만치 않은 땀을 부른다. 길 따라 왼쪽으로 펼쳐진 대청호는 아직 본색을 드러내지 않는다. 나뭇가지 사이로 살짝살짝 보여줄 뿐이다. 들머리 계단 출발 후 30여 분 걸었을 무렵 대청호 숲이 주는 선물 같은 쉼터를 만난다. 호수가 시원스럽게 보이는 전망좋은 터에 나무 한 그루 서 있고 그 아래 벤치가 있다. 벤치 위로 바람이 불면 대청호가 일렁인다. 호수가 일렁이면 초록숲이 내게 말을 건다. 잠시 기억의 습작. 물 한 모금, 다시 걷는다. 


지금부터다. 숲은 대청호오백리길의 진수를 보여주기 시작한다. 낮은 나무울타리 경계로 왼쪽은 호수의 여유를 오른쪽은 숲의 힐링을, 인적 드문 호반길엔 바람의 속삭임만 들린다. 울타리 앞에 서서 호수풍경을 눈에 저장한다. 건너편에 보이는 땅, 청남대 속살도 짚어본다. 비밀의 숲 터널 지나면 대청호 로하스캠핑장. 지명산으로 올라 호수와 땅의 경계로 향한다. 


#2. 회상이 지나간 오후 

로하스캠핑장 풋살장을 지나 오른쪽으로 내려가면 로하스캠핑장/보조여수로로 바로 가는 길이고 직진해서 산길을 오르면 지락산이라고도 불리는 지명산(158m) 오르는 길이다. 직진한다. 고도가 살짝 높아지자 왼쪽 아래 대청호 물빛의 파랑이 짙어진다. 나뭇가지 사이 뷰도 아량을 베푼다. 건너편 청남대 끝부분을 보여준다.

지명산에서 첫번째로 만나는 정자, 지락정에서 청남대 방향을 바라보면 초가정 근처의 광장이 살짝 보인다. 매미소리가 지배한 숲속, 점점 바람의 세기가 느껴진다. 밟고 있는 땅의 끝이 멀지 않았다고 바람이 전한다. 지락정 짧은 휴식을 끝내고 곧 만나는 갈림길 이정표. 왼쪽은 우회길이고 오른쪽은 캠핑장쪽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우회길로 왼쪽으로 간다. 방향이 바뀌자마자 급한 내리막이다. 조심조심 한 걸음씩 내디딘다. 그리고 몇 분 후. 땅끝이 보인다. 호수와 땅의 경계에 선다. 바닷가 같은 바람, 일렁이는 물결, 내 마음도 동한다. 짙푸른 물빛과 가파른 절벽이 어느 섬에 온 듯한 착각이 일게 한다.

다시 길을 밟아 땅끝의 둘레길을 걷는다. 오후 햇살을 받은 대청호는 유혹의 빛을 발산하고 그 위 물결은 몽환적인 그림을 그린다. 그리고 한 정자가 눈에 들어온다. 대청정이다. 대청정은 아주 절묘한 위치에 자리해서, 전망도 좋지만 정자 자체가 멋을 풍긴다. 정자 앞의 묘한 형태의 소나무도 운치를 더한다. 대청호 수위가 높아지면 정자로 가는 길목이 살짝 잠겨 '섬'이 되기도 한다. 이 곳의 물결은 이촌마을로 흐르고, 시선은 성치산 방향 대청호오백리길 2구간 '전망좋은 곳'을 찾아간다.


대청정에서 나와 데크길을 걷다 보면 오후 햇살 가득한 곶을 만난다. 무언가에 홀린 듯 궤도에서 이탈, 곶으로 걸어간다. 바람이 지나는 언덕에 지나 아래 쪽으로 내려간다. 햇살이 길게 드리운 물가에서 오후 6시 여름 속으로 스며든다.


#3. 김성호의 회상

지명산 반도길을 돌아 나간다. 보조여수로 앞 정자 미호정이 마중나와 있고 그 아래 보조여수로댐이 자리하고 있다. 안내판 설명에 따르면 보조여수로댐의 목적은 '기상이변에 대비한 방류능력 증대로 대청댐 안정성 확보'이고, 2004년부터 10년간 사업비가 1981억 원 투입돼 완공됐다. 홍수가 날 정도로 위험할 때 추가방류를 위한 보조댐이라 하니 이 댐은 사용되지 않길 바라며 미호정을 돌아 내려간다. 로하스캠핑장을 스치듯 지나간다. 가다보니 지난 겨울 동료 몇몇과 하룻밤 묵었던 글램핑 49호 사이트가 보인다. 


보조여수로를 걸어 이촌마을로 간다. 예전엔 아스팔트 따라 가는 길이었는데 이정표 방향이 바뀌어 있었다. 미호동 청동기 유적지 쪽으로 안내하는 이정표. 그 길을 따라간다. 처음 밟는 길, 울창한 나무들이 호위하는 길을 지난다. 조금씩 시야가 열리면서 이촌마을로 진입한다. 행정구역상 대전시 대덕구 삼정동이다. 삼정동은 강촌, 민촌, 이촌 이렇게 3씨 성이 모여 살았다고 해서 생긴 지명이다. 예전엔 산전골로 불리다 ‘이곳은 세 명의 정승이 나올 명당’이라는 어느 노승의 예언에 따라 삼정골로 이름이 바뀌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호젓하게 산책하기 좋은 마을이다. 입소문 나면서 카페도 여럿 생겼다. 이 마을 터줏대감 카페는 쥐코찻집이다. 이름부터 인상적인 이 곳은 한 번 다녀오면 잘 잊히지 않는 매력이 있다.

이촌마을에서 잠시 머물다가 호반길 타고 강촌마을로 와서 오늘 여정을 마무리한다. 어느새 해는 뉘엿뉘엿 떨어져 가고 있다. 다시 시내버스 73번을 타기 위해 금강변 삼정취수장 버스정류장으로 향한다. 석양에 물든 강변길을 달리는 버스. 이어폰에서 나오는 노래, 김성호의 회상.


#4. 추신

40대 중·후반 이상의 대전시민이라면 ‘쥐코찻집’이란 이름이 낯설지 않을 수도 있다. 30여 년 전엔 대전 은행동에서 운영하던 찻집이다. 내게도 오랫동안 잊히지 않은 기억저장소이다.


ich@kaka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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