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철호의 #길] 산길 따라 물길 따라 16㎞ 파노라마
계족산성에 올라 동쪽으로 시선을 펼치면 대청호가, "그립다" 말하듯 바라본다. 닿을 듯 말 듯 가깝지만 언제나 그 자리에서 적당히 거리를 두는 대청호. 어쩌면 오래 전부터 계족산과 대청호는 서로를 그리워했을 것이다. 계족산성에서 내려다 보는 대청호, 산을 내려가서 만나는 대청호, 그리고 대청호오백리길. 내가 이 코스를 좋아하는 이유다. 황톳길 맨발걷기, 계족산성 오르고 내려오는 가벼운 산행, 대청호와의 만남 이 세 가지 산책을 한번에 할 수 있기 때문. 장동산림욕장에서 출발, 황톳길을 밟은 후 계족산성 올랐다가 절고개로 내려와 추동 방향 임도 숲길을 걸어 대청호와 만나는 여정이다. 대청호오백리길 4구간의 하이라이트인 추동습지를 거쳐 슬픈연가 촬영지(명상정원)까지 걷는다. 16㎞ 안팎, 조금 길지만 힘들거나 지루할 틈이 없다. 계족산은 산대로, 대청호는 호수대로 감탄사 넘치는 파노라마를 보여준다.
#1. 계족산 황톳길의 매력
74번 시내버스 내려서 장동산림욕장 얕은 오르막을 시작한다. 여러 새들이 봄이 왔음을 알린다. 비주얼 유려한 황톳길이 계족산에 왔음을 알려준다. 황톳길은 보약이다. 정확히 말하면 맨발걷기가 보약이다. 맨발로 걸을 때 최적의 컨디션을 만들어주는 황톳길은 선물이다. 오감을 자극하는 숲에 황토가 깔려 있는 길은 보물이다. 양손에 신발 한 짝씩 들고 맨발로 숲길을 걸으면 땅의 기운을 고스란히 흡수하면서 자연과 하나가 된다. 숲속의 맑은 공기로 힐링 샤워를 하면서 유유자적 사색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오늘은? 신발을 벗었다가 다시 신었다. 아직은... 이른가 보다. 계곡 물소리도 시원하다. 물소리를 따라 가까운 물가로 내려가니 도롱뇽들이 무리지어 놀고 있다. 물속 나뭇가지에 여러 마리가 엉겨붙어 봄 정취를 즐기고 있었다. 봄이라... 마스크 살짝 벗으니 봄 향기가 난다. 꽃이 보이진 않지만 달콤한 꽃향기가 바람을 타고 날아온다. S자 황톳길 따라 느릿느릿 걷는다. 1시간쯤 걸었을까, 계족산성 올라가는 나무계단 앞에 다다랐다.
#2. 계족산성으로
오르막이다. 오늘 코스의 최대 난코스. 길은 편안하다. 나무계단이 쭉 이어져 있고 계단길이 끝나면 솔향 가득한 숲길이 산성으로 안내한다. 15분쯤 오르면 성벽이 소나무 가지 사이로 보인다. 올라가는 길 안내판을 따라 마지막 계단을 오르면 내디딘 발걸음만큼 계족산성과 대전 도심이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성벽이 먼저 보이고 서쪽으론 대전 도심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갑천 물줄기를 중심으로 도룡동 엑스포공원 인근 고층 아파트와 공사 중인 사이언스콤플렉스가 보이고 유성구·대덕구 아파트단지와 대덕테크노밸리가 눈에 들어온다. 좀 더 멀리로 시선을 옮기면 대전둘레산길 6, 7, 8, 9구간 오봉산-금병산-갑하산-수통골로 이어지는 줄기가 보인다.
역사적으로 계족산성은 회덕이 백제 우술군에 소속된 이래로 줄곧 대신라(對新羅) 전초기지 역할을 수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가 멸망한 직후에도 백제부흥군의 주요한 거점의 한 곳으로 최후까지 백제를 위해 충절로 산화한 민초들의 넋이 깃든 중요한 유적이기도 하다. 계족산성 조망의 하이라이트는 산성 동쪽의 대청호다. 특히 북문지와 남문지 쪽에서 바라보는 대청호는 장관이다. 장쾌하면서도 아기자기하다. 대청호반 노고산성이나 백골산에서 내려다 보는 '다도해' 풍경과 비슷하면서도 전부를 보여주지 않기 때문에 신비롭다. 가깝지만 서로 바라보며 그리워하는 듯한 계족산과 대청호의 거리. 그래서 저 아래로 내려가 호반을 걷고 싶은 욕망이 커진다. 자, 저 곳으로 내려가자.
#3. 절고개 갈림길
한참 계족산성에서 머물며 간식까지 챙겨먹고 절고개 방향으로 발길을 옮긴다. 산성 남문지를 통과한 뒤 30여 분 오솔길을 걷다보면 육각정자와 우애깊은오형제나무 쉼터를 만난다. 이 두 곳에선 나무 때문에 대청호가 잘 보이지 않는다. 실망할 필요는 없다. 10여 분 뒤 성재산 전망대(399m)에 이르면 훨씬 가까워진 대청호가 모습을 드러낸다. 대청호오백리길 4구간 추동권역과 대전구간 최남단인 신상교부터 5구간 흥진마을 둘레길, 백골산, 방축골까지 시야를 터 준다.
푸른 대청호를 바라보면 대청호오백리길 전 구간 '유람' 할 때 기억의 파노라마가 오버랩된다. 4구간의 호반 낭만과 5구간의 갈대·억새숲 정취가 다시 그 시간으로 이끈다. 벚꽃 시즌 오동선 벚꽃길의 눈부신 장면들이 눈앞을 지나간다. 조망이 좋기 때문에 성재산 전망대엔 많은 사람들이 머문다. 먼저 도착한 등산객들이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다. 요즘 산에 가면 유독 눈에 띄는 모습이 있다.
아버지가 딸과 함께, 어머니가 아들과 함께 산행을 하는 모습을 자주 본다.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부녀 등산객이 말을 건다. 장동산림욕장-황톳길-계족산성 코스로 왔다는 부녀, 대청호에 대해 묻는다. 대청호오백리길 코스에 대해서도 질문을 한다. 친절한 가이드가 된 나, 대전구간 어쩌고저쩌고 충북구간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해준다. 벚꽃 필 때는 저~기 보이는 5구간을 즐기시라, 추천한다. 백골산 올라 보이는 '다도해' 풍광 극찬도 함께 전하고 마지막 인사 전 한 마디 건넨다. "아버지와 딸 함께 산행하는 모습 참 보기 좋아요. 저도 딸과 산에 오고 싶네요. 저는 딸이 없거든요. ㅎㅎ" 전망대를 내려와 걷다 보면 이정표를 만난다. ←계족산성 2.2㎞ 절고개→ 0.4㎞. 절고개 갈림길에 도착한다.
#4. 추동으로
절고개를 통과하는 사람들의 행선지는 크게 세 유형이다. ①황톳길을 순환하거나 ②산행 마무리로 법동·송촌동 방향으로 하산하거나 ③질현성 방향(대전둘레산길)으로 산행을 이어가거나. 나는 천개동·추동 방향 임도를 걸어 추동으로 향한다. 혼자만의 숲길이다. 마스크를 벗게 한다. 노래도 부른다. 그렇게 걷다보면 다시 대청호가 나타난다. 절고개에서 출발한 지 20여 분 뒤 전망 좋은 정자를 만난다.
요산여호(樂山餘湖) 정자. 대청호 뷰가 압권이다. 추동 마을이 가까이 보인다. 목적지인 추동습지 권역과 대청호오백리길 4구간 '전망좋은 곳' 둘레길, 슬픈연가 촬영지 명상정원, 그 앞의 '햄버거 섬'이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들어온다. 이 정자엔 박헌오 시조시인의 시가 걸려있다.
고운 산 신선한 길 심신 절로 극락인 저
푸른 햇살 맑은 호수 사계절 아련한 화폭
억겁을 가꾼 절경에 장삼 벗어 내려놓다
'아련한 화폭' 같은 대청호를 벗삼아 고도를 낮춰 내려간다. 정자를 떠나 30분도 안 된 시각 임도와 마을길이 만나는 지점에 선다. 오후 3시, 장동산림욕장부터 3시간 반 걸었다. 쉬엄쉬엄 느릿느릿 걷다보니 시간이 꽤 걸렸다. 9.5㎞. 여유로운 마을길에 들어선다. 상추마을회관을 지나면 큰 느티나무가 서있는 중말(죽말) 시내버스 승강장을 만난다. 그리고 곧바로 대청호자연생태관과 대청호오백리길 탐방지원센터 앞을 지나는데 이 두 곳은 코로나19 때문에 임시휴관 중이다. 대청호오백리길 안내책자와 팸플릿은 근처 편의점(해피타임)에서 무료로 받아볼 수 있다. 팸플릿 받아 들고 풍차가 반기는 대청호반 자연생태공원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따스한 봄 햇살 가득한 공원을 지나면 대청호 파노라마가 시작된다.
#5. 호반낭만길
대청호오백리길은 대청댐에서 시작하는데, 전체 1~21구간 중 대전구간이 1~5구간, 5-1구간, 6구간 일부다. 각 구간마다 OOOO길이란 이름이 있는데 4구간은 호반낭만길이다. 대전구간의 대표주자인 4구간은 리아스식 해안처럼 호수를 향해 뻗어나간 반도를 수도 없이 들어갔다 나왔다를 반복하기 때문에 호반의 정취를 가장 가까이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곳 중 하나로 꼽힌다.
추동습지 보호구역 전망데크부터 길을 잡아 호반을 따라 '전망좋은 곳'으로 향한다. 이 곳의 제철은 가을이지만 봄의 호반도 詩心이 일게 한다. 물과 땅의 경계를 걷는다. 찰랑찰랑 호수의 물결은 햇빛을 받고 장관을 연출한다. 첫 모퉁이를 돌면 물가 바위 위에 쌓은 키작은 돌탑이 마중 나와 있다. 그 앞에서 기념사진 한 번 찍고 물길 따라 계속 걸어간다.
점점 열리는 대청호의 속살. 대청호 데칼코마니 극장이 막을 올린다. 유난히 맑은 오후의 하늘, 호수 물빛을 만나 산과 나무들의 데칼코마니가 펼쳐진다. 낭만 돋는 이 길의 끝엔 '전망좋은 곳'이라 부르는 조망포인트가 있다. 탁 트인 이 공간에선 데칼코마니의 절정을 감상할 수 있고, 바닷가를 걷는 듯한 착각이 든다. 바로 앞엔 조그마한 '섬'이 보인다. 이 섬을 밟아본 적이 있는데, 2015년 가을 그 해는 가뭄 탓에 대청호 물이 많이 빠져서 저 작은 섬까지 갈 수 있었다. 이국적인 정취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6. 휴식 같은 친구
'전망좋은 곳'을 벗어나며 트레킹 앱을 보니 13㎞ 남짓 걸었다. 이제 오늘 여정의 마지막 코스 슬픈연가 촬영지, 명상정원으로 간다. 절경에 빠져 여유를 너무 부렸는지 시간 조절에 실패했다. 오후 태양이 계족산 머리 위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슬픈연가 촬영지 초입으로 가는 야트막한 산길, 석양빛이 나무 사이로 들어온다. 조급해진 마음을 다시 편안하게 해준다. 15분쯤 숲길을 걸었을까. 이정표가 보이고 그리 크지 않은 주차장을 지나 호젓한 길을 걷는다.
데칼코마니 파노라마는 계속 이어지고 석양이 비치는 수변데크와 야자매트를 걷는다. 예전엔 수위가 상승하면 자주 물에 잠기는 곳이었는데 수변데크 덕에 이젠 편하게 갈 수 있다. 대청호오백리길을 꾸준히 정비하고 시설을 보강하고 있는 지자체와 대전마케팅공사의 구슬땀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데크를 걷다보면 전망대를 만난다. 대청호와 왼쪽 슬픈연가 촬영지-명상정원의 나무들이 호수에 비쳐 한 폭 수채화를 보여준다.
사진 한 컷 찍고 조금만 더 가면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2018년 개봉한 창궐. 위기의 조선으로 돌아온 강림대군 현빈은 궁으로 가기 위해 양화진 나루터로 간다. 강림대군 일행은 나루터를 지키던 병사들과 실랑이를 하는데 ...
이 장면을 촬영한 곳이 이 곳이다. 솔직히 2005년 방영된 드라마 ‘슬픈연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아오던 슬픈연가 촬영지에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슬픈연가 촬영지로 들어가는 데크길 앞에는 널찍한 주차장이 마련됐고 평상과 전통담장, 전망데크와 레트로소품 등의 전시시설을 비롯해 파고라, 대청마루, 흔들의자 등의 휴게시설을 갖춘 명상정원도 들어섰다. 이곳을 찾은 이들에게 편리함을 제공하는 것은 물론 익숙해져 가던 명소에 볼거리, 즐길거리를 확대한 것이다. 연인과 가족과 친구와 동료와 편하게 산책하며 힐링할 수 있는 '휴식같은 친구'가 된 것이다.
어느새 7시가 다 됐다. 어둑어둑해졌다. 호수 건너편 방축골엔 하나둘 불이 켜졌다. 땅끝에서 오늘 여정을 마무리한다. 이 곳에 서면 떠오르는 목소리가 있다. "바다 소리가 들려." 언젠가 동행했던 그녀, 휴식같은 친구였던 그녀는 이 곳에서 바다 소리를 듣는다고 했다. 난 아직도 너의 목소리가 들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