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철호의 #길] 영혼까지 식히는 청정 에어컨
가수원동에서 21번 초록색 시내버스를 탄다. 대전서남부터미널과 논산 벌곡 수락계곡(수락마을·대둔산도립공원)을 오가는 21번 버스. 서남부터미널에서 출발하면 가수원동을 지나 대전 서남부 지역과 논산 벌곡의 농촌마을을 지나 수락마을(논산 벌곡면 수락리)에 다다른다. 어르신들의 이야기소리 속에 때론 덜컹이며 평화로운 농촌마을 풍경을 통과한다. 가수원동에서 1시간 정도 달리면 종점에 이르는데, 맨 뒷자리에 앉아 가다보면 그 자체만으로 힐링이다.
#1. 게으른 산책과 휴식
오늘 여정 콘셉트는 느릿느릿 걷기와 계곡에서 쉬기. 마천대까지 올라갔다 올까, 생각도 했지만 날도 뜨겁고 해서 산행은 아껴두기로 했다. 군지구름다리 근처 전망좋은 쉼터까지만 갔다 오자.
마을 입구 근사한 느티나무 앞에서 출발한다. 더운 날씨 탓일까, 금요일이어서 그런 걸까, 사람들이 거의 없다. 초반은 널찍한 진입로. 철 만난 매미들 신나게 울어대고, 초록이 지배한 소리와 바람을 만난다. 대둔산승전탑 입구를 지나면 본격적인 힐링로드가 시작되는데 데크길이 위-아래로 갈린다. 아래쪽으로 방향을 잡아 조금만 걷다보면 곧 선녀폭포를 마주한다.
물줄기가 선녀의 하얀 비단치마처럼 흘러서 이름이 선녀폭포. 폭포수에 발을 내밀어 본다. 아, 감탄사 자동발사. 벗어나기 힘든 유혹이다. 그녀들이 자꾸 발목을 붙든다. 쉬었다 가자.
오감이 서늘하다. 시절과의 불화, 이곳은 ‘無더위’다. 지친 마음까지 달래준다. 물가에 앉아 ‘물멍’에 취한다.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공을 내세우지 않고, 남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임하는 물의 겸손을 생각한다.
선녀폭포를 뒤로하고 더 가면 오른쪽 위 고깔처럼 생긴 꼬깔바위를 만난다.
꼬깔바위 설명판에 ‘바위에 숨어 하늘을 쳐다보는 사람의 얼굴이 보인다’는데…. 잘 모르겠다. 계곡 물소리는 쉬지 않고 귀를 적신다. 초록으로 둘러싸인 데크길의 끝, 수락계곡의 메인폭포인 수락폭포가 어서 오라 손짓한다.
사람들이 없다. 마스크 벗고 세수 먼저 시원하게 하고 발을 담가 본다. 무릉도원이다.
#2. 군지골의 가슴아픈 이야기
수락폭포 옆 철계단 지나 만나는 이정표는 ↖마천대 2.1㎞ ↖군지구름다리 0.3㎞, ←낙조대 1.9㎞, →수락주차장 1.7㎞를 가리킨다. 마천대 방향 계단을 오르기 시작한다. 한 계단 한 계단 오를수록 기묘하게 생긴 바위들과 소나무가 맞이한다. 머털도사가 뿅, 하고 나타날 것 같다. 호흡 고르면서 뒤를 돌아보면 멋진 산 풍경이 시선을 붙든다. 오늘도 구름이 참 좋다.
헉헉대며 올라가다 보니 저 아래 군지구름다리가 보인다. '힘든데, 내려갔다 와야 하나.' 고민은 잠깐. 구름다리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밟고 있다. 구름다리 규모는 작다. 그래도 구름다리는 늘 신난다. 걷다보니 혼자여도 출렁인다. 구름다리 중간에 멈춰서 바람을 맞으며 다리 앞 풍경에 젖는다.
군지계곡. 지금은 낙석위험 때문에 출입이 통제된 곳이다. 수직절벽으로 둘러싸인 이 곳은 동학혁명 때 관군에게 쫓기던 동학군이 오도가도 못하고 전멸했다는 가슴아픈 이야기가 전해온다. 그래서 ‘군지옥골’이라고 불렸고, 군지골 또는 군지계곡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통제되기 전엔 군지계곡에서 사다리처럼 가파른 220층계를 오른 뒤 1시간쯤 등산해 대둔산 정상인 마천대에 이르렀었다고.구름다리의 협곡 바람을 만끽한 후 조망쉼터로 향한다.
#3. 쉼터
오늘 목적지인 조망쉼터는 군지구름다리와 멀지 않다. 계단이 끝나는 지점 가까이에 바위로 감춰진 공간이 있다. 수락계곡에 올 때면 항상 여기서 쉬었다 간다. 너럭바위 위에 앉아 바라보면 겹겹이 산들과 하늘이 아이맥스 영화관이다. 마천대 쪽 봉우리 위의 하늘과 구름도 작품이다. 그 앞의 기묘한 나무 한 그루, 오늘도 시원한 바람을 불러 모은다. 폭염이 이어지는 요즘 이 곳은 더위가 없다.
한참 머물다가 내려간다. 계곡의 바람을 다시 느끼며 여정을 마무리한다. 5㎞가량 산책. 느릿느릿 놀며 쉬며 오늘도 즐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