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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널스 Nov 24. 2022

미국 환자도 똑같네

간호사라면 한번쯤은 느껴봤을...

전문간호사 1주 차에는 오리엔테이션만 했고 2주 차부터 혼자서 환자를 보기 시작했다. 보통 환자를 보는 시간은 환자의 나이와 방문 목적에 따라 20분이나 40분이다. 첫 한 달은 적응하라고 환자당 60분이라는 시간을 준다. 컴퓨터 시스템이 적응이 안 되고, medical decision을 내리는 것도 확실치가 않은데 혼자 환자를 보는 게 너무 어려웠다.


2주 차, 3주 차엔 월요일 4명, 화요일 4명 일주인간 총 8명씩 내 환자를 보고 오더하고 차트에 노트 남기는 연습을 했다.


내가 전문간호사로 처음으로 보는 환자는 세상에 지난 6년 동안 의사를 본적 없는 50대의 여성 환자였다.

생각할 수 있는 lab을 다 오더 하고, 혈압이 높아서 1-2달 안에 다시 보자고 팔로업을 잡았다. 랩 결과는 Liver enzyme이 높게 나와서, 이 팔로업도 같이 해야 할 것 같다.


주말에 오피스에 와서 흔한 symptom마다 smart phrase와 템플릿을 만들었더니 차트 정리하기가 한결 수월해졌다. 이건 정리정돈의 여왕인 시니어 엔피 E의 템플렛을 가져다가 고쳤다. (URI, UTI, back pain, Well visit, Depression/Axiety, Contraception) 차트 템플렛 만들 때 같은 오피스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것 갖다 쓰는 게 최고인 듯..


그리고 환자 차트를 미리 공부해놓고, 모르겠는 부분을 미리 동료에게 물어보고 환자를 보니 플랜을 세우는 데 있어서 조금 덜 당황하게 됐다. 사람들은 새 차, 새집, 새 물건을 좋아하지만... 신규 간호사라고 하면 움찔하게 만드는 것 같다. 환자들이 나에게 전문간호사로 일한 지 얼마나 됐냐고 물어보진 않지만, 내가 괜히 찔린다고나 할까.. (지금 내 수준에 맞는 환자는 큰 문제없고 건강한데 회사에서 건강검진하라고 해서 온 환자들이다. 학생 때는 별 재미없는 환자라 생각했는데, 막상 일하기 시작하니까 이렇게 쉬운 환자 너무 좋다...ㅋ)


수, 목, 금은 다른 의사나 엔피를 따라서 보면서 워크플로를 익히고, 하루하루 버텼더니 3주 차까지 지났다. 그동안 인상 깊은 에피소드가 몇 가지 있었다.

첫 번째는 나의 오피스 메이트 P 환자인데, 최근에 유방암 진단을 받고 수술을 앞둔 70대 환자였다. 속이 울렁거리고, 왼쪽 팔이 아펐었는데 암 때문인지 걱정이 돼서 약속을 잡았는데, 며칠 지나니까 나아졌다며... 괜히 와서 니 시간을 뺏은 것 같아 미안하다고 한 환자였다.


나는 전혀 미안해할 필요 없다고, 내가 준비한 게 있는데 안 오면 속상할 뻔했다고 답했다. 메슥거림과 통증에 대해 물어보고, 수술을 앞두고 잠은 잘 자는지, 주변에 도움은 받을 수 있는지, 등등을 물어봤다.

그녀는 가족이 근처에 있고 친구들도 서포트해주지만 주변에 짐이 되고 싶지 않다고... 무엇보다 의학적으로 본인을 지지해 줄 사람이 부족한 것 같아서 힘들다고 했다. 그래서 먼저 속이 울렁거릴 때, 불안할 때 먹을 수 있는 약을 주고 유방암 환우 서포트 그룹에 관심이 있는지 물어봤다. 먼저 이 길을 걸은 사람들과 얘기해보면 좀 더 마음이 편하지 않을까 해서... 환자가 좋다고 해서 미리 찾아놓은 정보를 보내줬다.


그리고 가는 길에... P 대신에 내가 허그해줘도 될까? (P는 종종 환자들을 허그해준다)라고 물어보니 나를 정말 꼭 껴안으면서 몇 번이나 고맙다고 말했다. 이미 너무 좋아졌다고, 오늘 오길 참 잘했다고 말했다.


한 번은 환자 보호자와의 만남이었다. P의 오랜 환자였다. 휠 체어를 탄 90살 넘은 아빠를 모시고 온 60대 딸이 이것저것 물어봤다. 재작년에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자기가 아빠를 돌보기 시작했는데, 엄마였으면 아빠에게 건강하지 않은 바나나 푸딩 같은 건 안 줬을 텐데, 아빠가 너무 좋아해서 조금 주는데 괜찮을지.. 아빠가 바나나 푸딩을 먹을 때 가끔 목에 사래가 걸리는데, 앉아서 먹이면 괜찮은데 그렇게 하는 게 맞는 건지, 약은 갈아서 애플소스에 섞어주는데 그래도 되는 건지... 질문을 한참 하다가 나를 의식한듯 P와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너희는 아마 내가 너무 까다로운 보호자라고 생각하겠지?“


P는 90대는 건강도 중요하지만 삶의 질도 중요하다고, 바나나 푸딩 좀 먹어도 된다고 괜찮다고 얘기를 하고 먼저 나갔다. 나도 P를 따라 나가려다가 한마디 덧붙였다.


“사실 난 여기서 일하기 전에 병원에서 노인들을 많이 케어했는데, 네가 아빠를 위해 하는 모든 것이 내가 간호사로 일했을 때 병원에서 했던 것들이야. 난 너를 전혀 까다롭다고 생각하지 않고, 너는 참 잘하고 있다고 말해주고 싶어. 너희 아빠가 너에게 좋은 아빠였던 것 같아. 그렇다고 모든 좋은 아빠가 좋은 딸을 갖는 건 아니지. 넌 참 좋은 딸이야. 너의 엄마도 분명 하늘에서 네가 잘하고 있다고 생각할 거야."

그랬더니, 딸이 갑자기 울먹거리면서 "정말? 그렇게 말해줘서 너무 고마워... 있잖아, 난 오늘 이 말이 정말 필요했어. 우리 아빠가 어렸을 때 나에게 망아지를 선물해주던 자상한 아빠였거든... 근데 나는 아빠한테 그렇게 잘 못해준 것 같고.. 내 아들들도 돌봐야 하고 아빠도 돌봐야 하고 그동안 너무 힘들었는데, 네가 해준 말이 너무 힘이 된다. 니 이름이 뭐라고? 나 건강검진도 못 받은 지 한참 됐는데, P가 너무 바쁘면 너랑 약속 잡아야겠어."라고 대답했다.


유방암 환자가 나를 힘껏 껴안았을 때,


환자 보호자가 눈물이 글썽이는 눈으로 나를 쳐다봤을 때,


간호사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느껴봤을 낯선 사람과 영혼이 울리는 이 기분...


이런 순간들이 나에게 간호사로 버틸 수 있는 밑거름이 된다. 도와주고 싶은 마음만으로도 이미 누군가에겐 도움이 될 수 있음을 깨닫는 시간들이었다. 아직은 어리바리하고 버벅대지만, 앞으로 더 나아질 거야. 왜냐면 나는 노력하고 있으니까.

딸이 등교하면서 창문에 남겨놓은 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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