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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산업 민영화, 그 뒷이야기 24

영국침공과 프랑스의 여유

by 요아킴

그리니치대학의 스티브 토마스. 최용석과 스티브는 저녁식사를 함께 했다. 별로 유복하지 않은 집 출신으로 대학까지 진학했고 박사과정까지 마쳤다고 했다. 하지만 논문에 문제가 있어서 정식으로 박사학위를 받지는 않았지만, 대학교수 임용에는 문제가 없었단다. 사실 미국이나 영국 같은 나라에서는 대학교수가 그리 인기 있는 직업은 아니다. 자신의 공부가 좋아서 학교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지만, 수입도 별도 많지 않고, 매년 연구과제 충족 요건을 채우는 것도 힘들고 해서 진짜로 자기 공부를 즐기지 않으면 그리 매력적인 직업은 아니다. 차라리 민간기업이나 공무원 등 다른 분야로 나가는 것이 훨씬 매력적이란다. 우리나라처럼 사농공상의 전통이 살아 있어서 교수라면 무조건 전문가 취급을 받는 것도 아니라서 일반적인 대학교수들의 사회적 지위가 그리 높지 않다. 물론 몇몇 유명한 교수들은 어느 정도 인정하지만, 한국처럼 대학교수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모두 진리로 떠받드는 나라는 많지 않아 보인다.


스티브에게 공동연구단의 목적과 구성원, 그리고 앞으로의 역할을 설명하자 놀라는 눈치였다. 국가의 중요 정책 방향을 교수들의 연구에 맡긴다는 사실에 놀랐고, 이 문제를 둘러싼 사회 내부의 갈등에도 놀랐다.


“그런데 말이야, 연구단 구성원들, 즉 교수들 선정은 누가 어떤 기준으로 한 거야?”

스티브의 질문이었다.


“어, 아까 설명한 노사정위원회의 연구단에 각 이해당사자가 추천했지. 모두 6명인데, 노조에서 두 명을 추천했고, 정부 쪽에서도 두 명, 그리고 중립 위원이라고 노사정위원회에서도 두 명, 그렇게 6명으로 구성했어.”

“그렇다면 추천은 각 이해당사자가 하고, 그분들을 검증하는 뭐 그런 기준은 없었나? 예를 들면 자격 요건 등등.”


“내가 알기로는 특별히 그런 과정은 없었던 것 같아. 누가 교수들을 심사하겠어? 한국에서는 대학의 정식 교수라면 무조건 인정하는데.”


“그래? 그렇다면 상당히 부럽네. 정년 보장받는 교수만 되면 그냥 끝이네? 그리고 한국 교수들은 대신 학생을 가르치는 일에 시간을 많이 보낸다고 들었어. 다른 나라 교수들은 수업보다 연구에 더 시간을 보내는 거 아닌가? 나도 들어서하는 말인데.”


“어. 영국이나 미국 같은 경우 연구에 더 집중하는 대학도 있고 반대로 학생 가르치는데 더 특화된 대학도 있거든. 보통 유명한 교수들은 연구 쪽에 더 집중하는 경향이지.”


식사를 마치고 차를 마시면서 둘은 계속 대화를 이어갔다. 시간은 7시를 조금 넘기고 있었다. 연구단의 다른 일행들과 떨어져 스티브와 저녁을 하기로 하고 일행들과 떨어져 나온 최용석은 모처럼 단체 행동이 아닌 자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스티브는 시계를 한 번 보더니 곧 집으로 돌아갈 기차 시간이 다 됐다고 말했다. 스티브의 집은 런던 남쪽의 작은 도시였는데, 기차로 약 1시간 반이 걸린다고 했다. 역에서 학교까지는 자전거를 이용한다는데, 왕복에만 세 시간이 걸리는 출퇴근 거리였다. 최용석은 영국의 철도 민영화에 대해서 대충 들어서 알고 있었기에 민영화 이전과 이후를 소비자 입장에서 비교해 달라고 물었다. 스티브의 대답은 예상대로였다. 요란한 선전, 즉 요금이 저렴해지고 서비스도 좋아진다는 민영화의 약속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사고는 늘었고 요금은 더 올랐다고 했다. 결론적으로 영국 사회 전체의 분야별 민영화는 소비자들에게는 별 혜택을 주지 못했다는 것이 스티브의 결론이었다. 영국은 국영철도에 경쟁체제를 불어넣겠다고 철도망 운영과 유지보수는 국영기업에 남긴 채로 구역별로 기존 철도회사를 나눠서 민영화했다. 선로 하나에다 여러 철도회사가 생기는 그런 방식이었다. 민영화 후 벌어진 가장 큰 사고는 1999년 런던의 페딩턴역 근처에서 생긴 30여 명이 사망한 열차 추돌사고였다. 운영 주체가 복잡해진 결과였다.


스티브는 생긴 외모대로 차분한 사람이었다. 이날 만남은 두 번째였지만 실제로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기는 처음이었다. 둘은 영국의 왕실 뒷이야기부터 중세의 역사, 그리고 결론은 민영화의 문제점과 앞으로의 영국의 정책 방향에까지 대화가 이어졌다. 최용석은 영국인들이 대륙을, 특히 프랑스를 바라보는 관점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머릿속으로는 이게 일본인들이 조선과 중국을 바라보던 관점과 뭐가 같고 뭐가 달랐는지에 대해서도 그림을 그려나갔다.


다음날은 휴일, 두 번째 해외조사 일정에 처음 찾아온 토요일이었다. 일행은 가이드를 따라서 간단한 시내 둘러보기에 나섰다. 가장 먼저 들른 곳은 대영박물관. 이름 자체가 한자로 번역해 보니 무게감이 있는 곳이었다. 사실 그레이트 브리튼을 일본인들이 한자말로 옮기다 보니 대영제국이 됐는데, 최용석은 이건 오해가 있는 번역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레이트 브리튼이란 잉글랜드 남부의 특정 지역의 지명에서 나왔다고 했다. 영국인들이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를 통 털어서 그레이트 브리튼과 연합왕국, 즉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이라고 했는데, 이를 대영제국이라는 어마어마한 말로 옮겨버렸다. 왕국이 제국이 된 것도 그렇고 대영이라는 큰 이름이 붙은 것도 뭔가 오류 같다. 자신들을 대일본제국이라고 부르는데 맞춰서 이런 식으로 영국을 과대 포장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처음 가본 대영박물관은 인상적이었다. 이들이 이집트를 비롯한 세계 각국을 얼마나 수탈했는지를 제대로 보여주는 그런 곳이었다. 제국주의의 상징이었다. 일요일 오후까지 한가한 휴식을 마친 일행은 오후 늦게 유로스타를 타고 파리로 향했다. 프랑스 일정의 시작이었다.


1월 28일 오전, 연구단 일행은 프랑스 국영전력회사 EDF에 도착했다. EDF에서는 아시아지역 전무급 담당자인 팡 디에가 참모 몇 사람과 일행을 맞이했다. 파리 시내의 금융중심가로 불리는 라 데 팡스애 있던 EDF 본사 건물은 밖에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위용이 느껴졌다. 세계를 상대로 다양한 에너지 사업을 벌이는 프랑스의 자랑거리, 전 세계에 걸쳐 20만 명에 달하는 직원을 거느린 세계 최대의 공기업. 정부의 홀대와 구조개편으로 한껏 위축되고 초라해진 한국전력의 현실을 생각할 때 최용석의 가슴은 내려앉았다.

EDF본사.jpg 라 데 팡스에 있는 EDF 본사 건물

한국 최대 공기업 한전은 국가 전체의 전력산업을 책임졌다. 60년대부터 시작된 산업화와 공업화의 뒷받침은 한전이라는 공기업이 생산해 낸 전기 덕분이었다. 당시 개발독재를 최우선하던 정부의 강력한 통제 아래 마치 군대처럼 효율적으로 전기를 공급한 한전 덕분에 철강, 자동차, 금속, 화학 등 한국의 중화학공업은 꽃을 피웠다. 물론 국가의 뒷받침이 있기는 했지만, 한전 스스로 운영을 잘했기에 한국의 전기요금은 항상 세계 최저 수준이었고 정전율 역시 세계에서 가장 낮았다. 덕분에 세계 전력업계를 대표하는 에디슨 상을 두 번이나 받았다. 이 과정에서 한전은 프랑스의 EDF와 일본의 도쿄전력과 같은 세계 최고 수준의 전력회사와 비교대상이 되는 영광도 누렸다. 그런데, 어느 순간, 한전은 비효율과 방만이라는 올가미를 쓰고 개혁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그리고 전력회사의 심장이라고 하는 발전소를 모두 빼앗겼고 이제는 팔다리와 혈관과 같은 배전을 다 뺏길 지경에 왔다. 한전에 몸담은 사람들은 큰 상실감과 배신감에 고통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었다.


화려한 EDF 건물의 고층부에 자리 잡은 회의실에서 토론은 시작됐다. 팡 디에는 베트남계 이민자 출신으로 프랑스에서 성장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러다 보니 아마 아시아 사업을 담당하게 된 모양이었다. 팡은 우선 EDF의 지배구조를 비롯한 회사 설명부터 시작했다.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가장 놀라웠던 사실은 EDF의 지배구조였다. 이사회 구성부터 그랬다. 총 18명의 이사진은 정부, 노조, 시민단체 각 6명이 추천한 사람들과 구성됐다. 한국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구조였다. 정부가 직접 임명한 이사가 3분의 1 밖에 안 된다는 사실에 모두 놀랐다. EDF 내부에는 모두 다섯 개의 노조가 있었는데, 공산당, 사회당 계열 노조가 각각 가장 큰 조합원을 확보하고 있었고, 나머지 세 개는 소수 노조 규모였다.


프랑스에는 국가 전체를 대표하는 총연맹이 다섯 개가 있었는데, 가장 큰 세력이 공산당 계열의 CGT였고, 다음이 사회당 계열의 CFDT였다. 조합원 숫자에서는 CFDT가 앞섰지만, 사회적 세력과 정치적 영향력에서는 압도적으로 CGT가 우세했다. 혁명의 공화국 프랑스 다웠다. 이런 강경 노조들이 추천한 이사가 6명이고, 이들과 대체로 우호적인 시민단체 이사도 6명이니 회사의 경영이 어떤 방향으로 결정되는지를, 그리고 왜 EDF가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전력회사가 됐는지를 알 수 있었다. 밀실에서 벌어지는 관료들의 담합이 아닌 민주적 의사결정의 힘이 바로 EDF의 힘이었다.


팡은 짧은 브리핑에서 EDF가 영국식의 민영화를 하지 않는 이유를 명쾌하게 설명했다. 가장 큰 이유는 전기의 특성, 즉 저장이 불가능하고 자연독점이 정상인 서비스 자체의 성격이라고 했다. 다른 산업처럼 자유화했다가는 특정 세력이 장악하기 너무 쉬운 서비스의 특징상 국민을 대표하는 정부가 직접 운영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노조 측 위원들은 팡의 설명을 들으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사실 정부 측 위원들은 프랑스에 오는 것 초차 별로 기껍지 않았다. 자신들도 프랑스를 대충이라도 알고 있었으니.


이어진 순서로는 얼마 전 EDF에서 독립해서 별도의 회사로 분리된 프랑스 전체의 송배전망을 운영하는 RTE의 장 세노가 프랑스 전력산업의 개혁이라는 제목으로 브리핑했다. RTE는 과거 EDF의 계통망, 즉 송배전망을 들로 자회사로 독립했는데, 사실 그 이유가 궁금했다. 장의 설명은 간단했다. 유럽연합의 결정을 수용했다는 것이었다. 즉, EU 정부는 유럽 전체의 전력자유화를 시작했는데,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 각 나라가 폐쇄적이던 전력망을 개방해서 누구나 원하는 전력회사는 이웃 나라의 전력망을 이용해서 전기를 EU 역내 국가로 수출하도록 자유화했다는 것이다. 미국과 같은 모습의 하나의 국가, 즉 연방을 최종적으로 꿈꾸는 EU는 국경을 열었고 관세를 없앴고 모든 제도를 하나의 국가 형태로 통합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전기를 역내 국가들이 자유롭게 주고받으면, 전기요금이 떨어질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사실 프랑스는 이런 전력시장 통합 움직임에 부정적이었다. EU 국가 중에서 프랑스와 이탈리아가 대표적으로 국가 전체를 독점하는 공기업이 전력산업을 책임졌다. 하지만 EU의 이런 결정에 따라 프랑스는 소극적으로 송전망만 개방했는데 비해 이탈리아는 국영 전력회사 ENEL 전체를 뜯어서 발전, 배전, 송전으로 나눈 다음 완전히 민영화했다. 두 나라의 다른 선택은 매우 다른 결과를 나중에 불러왔다.


연구단은 영국 못지않게 프랑스에도 관심이 많았다. 사회주의 성향이 강한 프랑스는 자유주의 영국과 대조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분야는 떠나서 적어도 전력분야에서는. 영국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자유화와 민영화에 앞장선 것과 반대로 프랑스는 EDF의 국영 체제를 굳게 지켰기 때문이었다. 사실 프랑스의 주요 기업들은 공기업이 많았다. 에어프랑스, 프랑스철도, 에어버스 등 프랑스를 대표하는 기업들이 대부분 국영기업이었다. 유럽연합의 전력망 개방과 자유화 권고 초치 때문에 RTE를 만들기는 했지만, EDF에서 분리된 상태였기에 사실상 한통속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다른 나라 전력회사의 전기가 지나가도록 길을 열기는 했지만 RTE는 어쩔 수 없는 EDF의 한 부분으로 알려져 있었다.


에어프랑스.jpg 에어프랑스는 네델란드 KLM도 인수한 프랑스 국영 항공사


연구단의 질문은 이 문제에 집중됐다. 왜 영국이나 독일처럼 전력망을 완전히 개방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RTE의 답변은 형식적이었다. 자신들은 모기업 EDF와 분리된 독립기업이고 다른 어떤 전력회사의 전기도 차별하지 않고 송전선로를 지나가도록 허용한다고. 하지만 본사도 같은 건물에 있는 상태이고 지분도 모조리 EDF가 가진 상태에서 RTE를 별도의 독립된 회사로 보기는 어려웠다. 또 다른 질문은 왜 시장개방이 된 영국에 들어가서 영국의 배전회사를 인수했느냐였다. 정부 측 위원들의 질문은 프랑스 국내 시장은 열지 않으면서 영국의 전력산업을 인수한 공정하지 않은 것 아니냐는 물음이었다. EDF와 RTE의 답은 간단했다. 영국인 스스로가 지분을 내놓았고 시장을 열었는데 왜 프랑스가 사는 것이 잘못됐냐고. 그리고 누가 영국에게 자유화와 민영화를 하라고 강요했냐는 것이었다. 능글맞은 프랑스식 대답이었다.


토론이 끝나고 최용석은 속으로는 만족스러운 기분을 겉으로는 숨기며 장 세노에게 물었다.

“영국인들은 억울하겠네요? 자신들은 과감하게 자유화했는데, 프랑스가 배전회사를 두 개씩이나 인수해 버려서. 그러면서 프랑스 시장은 외국에 개방하지 않았잖아요?”


“아니지요. 누구든지 원하면 프랑스 시장에도 들어올 수 있어요. 배전 같은 경우 약 20% 정도는 지방의 독립된 회사들입니다. 물론 EDF와 협력관계가 좋기는 하지만 누구라도 원하면 이들 배전회사 중 하나를 인수 가능해요. 물론 아무도 팔겠다는 생각은 안 하지만요.”

장 세노는 묘한 웃음을 띠며 대답했다.

베커.jpg 윔들던을 세 번이나 우승해서 영국인들을 화나게 한 보리스 베커


바로 그것이었다. 영국인들은 스스로 자유주의를 믿으며 전력산업을 자유화했다. 누가 팔을 비튼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자유화된 시장에는 프랑스 공기업과 독일 민간 전력회사가 과감하게 들어갔다. 영국인들은 이제 전력산업의 자주성을 잃어버렸다. 영국인들의 선택이었다. 그런 과감한 자유화를 하지 않은 것은 프랑스와 독일의 선택이었다. 선택에 따른 결과는 어쩔 수 없었다. 프랑스와 독일의 영국 전력산업 진출은 영국 공격이었다. 과거 프랑스 출신 노르망디공이 잉글랜드를 점령했고 1980년대에 독일 테니스 선수 보리스 베커가 세 번이나 윔블던을 우승한 이후 대륙의 영국 점령이었다. 프랑스 사람들은 영국의 개방을 즐기며 여유를 부렸다. 그게 영국과 프랑스의 차이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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