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버지는 갑자기 집에 오셨다. 어둑어둑해지던 시간으로 기억난다. 5살짜리였던 나는 아버지의 손에 끌려 택시를 탔다. 12월 초의 짧은 해, 사방은 어두웠고 어디로 가는지 어린 나는 몰랐다. 도착한 곳은 대구 시내의 어느 병원이었다. 아버지와 함께 병원 문을 들어서서 어디론가 가니 작은 침대에 갓난아기 하나가 울면서 간호사의 손길을 받고 있었다. 신기한 장면이었다. 그게 나의 유일한 동생이었다. 지금은 50이 넘어 서울 모 대학의 교수로 있는 내 동생을 처음 만나는 순간이었다. 1972년 12월 3일 밤이었다.
2. 사방이 시끄러운 때였다. 연일 뉴스에서는 경제가 어렵다는 말이 나왔다. 한보건설이 망하고 제일은행이 망했다. 진로그룹, 또 무슨 그룹, 잘 나간다고 요란하던 재벌들이 도미노처럼 무너지고 있었다. 회사 생활 4년 차인 나로서는 어리둥절했다. 모두가 잘 나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무슨 일인가. TV에 낯선 외국인 한 명이 나왔다. 미셀 캉드쉬, 프랑스 사람으로 기억난다. IMF라는 익숙하지 않은 기관의 총재였던가. 같이 등장한 사람, 당시 경제기획원장이자 부총리였던 임창열이라는 남자. 두 사람은 뭔가 발표를 했다. 잘 못 알아들었다, 무슨 말인지. 나중에 알고 보니 외환부족으로 국가부도사태가 발생했고, 우리나라는 IMF라는 돈놀이 장사꾼들에게 긴급 자금을 요청했으며, 그 조건으로 IMF는 우리나라 경제 정책을 장악했다. 그다음 3년 동안 IMF는 자기들의 투자자였던 서방 국가들이 대한민국을 마음대로 털어먹기 좋게 모든 정책을 세웠다. 세계화라는 달콤한 미국의 꼬임에 넘어가 금융에 대한 규제를 풀고 그들의 손아귀에서 놀아난 결과였다. 1997년 12월 3일이었다.
3. 대통령이 밤 10시 27분에 TV에 등장했다. 피곤한 눈을 비비며 멍하게 있던 내 귀에 들린 말은 비상계엄이었다.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긴급 속보는 금방 사라졌다. 초등학생 때 들었던 말, 비상계엄이 지금 선포된다고? 전쟁이 났나? 북한은 남한과 미국이 무서워서 철도를 끊고 담장을 쌓고 최대한 움츠리고 있는데, 그게 다 쇼였나? 북한의 도발 아니면 무슨 계엄? 그런데 용어가 전시계엄이 아니고 비상계엄이었다. 비현실적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모두가 다 안다. 너무나 비정상적이다. 대통령이 군인들을 보내 국회를 침범했고 시민들은 막았고 군인들은 주저하다 쫓겨났다. 이게 무슨 초현실적인 장면인가.
여의도 사무실 주변은 계속 이상한 집회가 벌어졌다. 20대 여성이 주로 일주일 내내 소위 말하는 응원봉을 들고 축제를 벌였다. 대학시절, 투석과 화염병과 최루탄이 사라진 참 희한한 집회. 과거에는 데모라고 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계엄에 놀라고 대통령을 처벌하자는 여론이 75%, 나머지 25%는 대통령을 옹호한다. 나라가 한순간에 망할 뻔했다가 잠깐 살아났다. 인공호흡기는 꼈지만 회복은 안 된 환자이다. 대통령이 스스로 반란을 일으키는 나라를 외국인들은 믿지 못한다. 투자는 끊어지고 외국 자본은 떠난다. 무너지던 경제는 절망적인 수준으로 가고 있다. 1997년 12월의 소위 IMF 사태가 올 것 같다. 이대로 가다가는. 어떤 정당은 끝까지 저항한다. 자신들의 정치 운명을 국가 운명에 같이 걸고 있다. 조선시대 후기 노론 시파와 유사하다. 나라를 망하게 한 세력이었다. 2024년 12월 3일부터 벌이지는 일이다.
우리는 중요한 사건이 벌어진 일들을 숫자로 정리해서 기억한다. 8.15, 4.3, 6.25, 4.19, 5.16, 10.26, 12.12, 5.18, 12.12, 등등. 외국인들에게는 암호와 같은 숫자들이지만 한국인이라면 다 안다. 그 숫자들의 의미를. 12.3은 벌써 두 가지로 큰 의미를 가졌다. 또 다른 해의 12.3에는 아무 일이 없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