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사람과 자연의 온화함, 그리고 맹목적 자유화
샤를 드골 공항을 이륙한 대한항공기는 힘차게 동쪽으로 날았다. 유럽에는 많은 나라가 있었지만 다 들러볼 수는 없었고, 전력산업 자유화에서 의미가 있는 나라만 찾다 보니 영국과 프랑스가 일단 최우선으로 뽑혔다. 물론 국영 전력회사 ENEL을 완전 분할 민영화했던 이탈리아도 있었지만, 이탈리아의 민영화는 한국이 하려고 하던 방식과 너무 똑같고, 유럽연합 내부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영국이나 프랑스와 비교해서는 상대적으로 약했기에 방문 일정에서 제외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두 나라 사이의 복잡한 역사 못지않게, 전력산업에서도 완전히 다른 길을 갔다. 그래서 이 두 나라만 둘러보는 일정을 짰다. 다음으로는 멀리 떨어진 호주와 뉴질랜드였다. 이 두 나라는 캐나다처럼 영연방의 일원으로 영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전력산업의 자유화 역시 영국식 모델을 그대로 베꼈다, 그래서 연구단의 방문지로 선택받기는 했는데, 두 나라의 위치가 애매했다. 미국과 브라질, 그리고 캐나다 일정에 끼워넣기도 너무 멀고 복잡했다. 그래서 두 번째 연구단 투어에서 아예 유럽과 묶어버렸다. 사실 지도를 놓고 보면 이게 얼마나 무리한 일정인지를 알 수 있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프랑스에서 뉴질랜드로 이동하는 과정 역시 참 특이했다. 연구단 일행은 프랑스에서 당연히 대서양을 건너 뉴질랜드로 가는 것으로 예상했지만, 연구단의 일정을 모두 설계한 여행사는 반대로 프랑스에서 인천으로 와서, 인천에서 다시 비행기를 갈아타고 뉴질랜드로 가는 방법으로 항공권을 예매했다. 이런 사실은 영국에 도착해서 처음 알았다. 그래서 왜 이런 일정을 선택했냐고 물어보니, 여행사의 답변은 연구단을 위해 국적기 중심으로 항공권을 예약하다 보니 그렇게 됐다고 설명했다. 프랑스에서 뉴질랜드로 날아가는 대한항공이나 아시아나항공은 없었기에 당연히 파리에서 인천으로, 그리고 다시 인천에서 오클랜드로 가는 식의 일정이 나온 것이었다. 전체적으로 비용 역시 절감된다고 했다. 연구단 일행 중 누군가는 프랑스에서 대서양을 건너 뉴질랜드로 가면 지구를 한 바퀴 노든 셈이 되는데 아쉽다는 말로 좌중을 웃겼다.
일행은 하루 정도의 빈 시간을 이용해서 각자 파리 시내를 탐색했다. 일부는 오르세 미술관으로 다른 일부는 루브르 박물관이나 퐁피두 센터나 오랑주리 미술관 등으로 흩어졌다. 연구단의 다수가 교수들이라 해외 경험이 많아서 그런지 각자의 선택이 다양했다. 오전에는 각자의 일정으로 움직였고, 오후 세 시가 되자 노트르담 성당에 다시 모였다. 최용석은 처음으로 루브르를 들렀다. 말 그대로 들렀다. 런던의 대영박물관에서도 그랬듯이 시간이 부족했다. 나중에 꼭 다시 와서 꼼꼼히 보겠다고 속으로 생각하며 아쉬웠지만 첫 루브르의 관람을 마쳤다.
뉴질랜드 일정은 달을 넘겨 2월 2일에 시작됐다. 첫 면담 기관은 뉴질랜드 공공노조인 NZPSA였다. 여기는 국제공공노련 PSI에 부탁해서 섭외했던 곳으로, 2003년에 회의에서 만났던 마이크 잉펜을 다시 만났다. 마이크는 소비자단체 대표 등 모두 네 명을 더 데리고 나와서 연구단 일행을 맞이했다. 뉴질랜드는 지구 전체 기준으로 보면 유럽, 아시아, 미주 등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진 오지와 같은 곳이었다. 그러다 보니 뉴스거리가 별로 안 되는 조용한 곳이었다. 영국식 전력 민영화는 섬 전체에 걸쳐서 한꺼번에 진행됐다. 인구라고 해봤자 8백만을 조금 넘었고 주된 산업도 목축인 이 나라에서 에너지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도 있었다. 전력 생산도 대부분 풍부한 수력자원을 이용했다. 모든 면에서 조용하고 청정한 나라였다. 그런데 왜 이런 급진적인 영국식 모델을 따라 했는지 모두가 궁금했다. 그 궁금증은 대화가 시작되면서 금방 풀렸다.
연구단을 대표해서 이근석 교수가 기관방문 때마다 하던 의례적인 인사와 공동연구단의 활동 배경 등등을 설명했다. 그리고 뉴질랜드를 방문한 이유하 그 유명한 작은 정부 개혁 때문이라고 했다. 뉴질랜드의 노동당 정부는 1984년 집권하면서 전통적인 노동당의 노선을 완전히 버리고 영국 보수당의 대처 정부의 정책을 그대로 따라서 작은 정부로의 개혁을 시작했다. 이 신자유주의 개혁은 미국 레이건과 영국 대처의 신자유주의 개혁의 한 부분으로 소개됐는데, 정부 기구 축소, 세금 감면, 공공 부문 민영화 등이 핵심적인 내용이었다. 뉴질랜드의 영미 따라 하기는 한국에도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 각 언론에서 도배했다. 뉴질랜드의 전력산업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에 시작된 모든 시장주의에 따른 개혁의 결과가 다 그랬듯이 뉴질랜드의 급진적 자유화 시험도 대실패로 마무리됐다. 민영화 후 10년이 지난 시점인 1998년 2월부터 5월까지 오클랜드의 중심 지구는 전력 공급의 실패로 인해 완전한 암흑 상태에 빠졌다. 기업가들은 휴대용 발전기를 갖고 다니거나 사무실을 옮겨야 했고, 수천 명의 노동자들은 할 일 없이 놀아야만 했다. 민영화 지역의 민간 전력회사인 머큐리(Mercury)는 화가 난 소비자들을 달래고 시설을 고치는데 1억 2천8백 만 뉴질랜드 달러를 써야 했다. 이 회사는 민영화 후 설비투자는 뒤로 미루고 단기 수익 창출에 급급했고, 처음에는 인력감축과 각종 비용 절감의 효과로 전기요금이 떨어지는 듯한 착시현상을 보였다. 자유화와 민영화의 성공으로 보였다. 하지만 1990년대 말 몇 년 연속된 가뭄으로 수력발전 자원이 부족해지면서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전기요금은 급속히 올랐고 불구하고 대규모 정전 사태가 수도 웰링턴과 최대 도시 오클랜드를 중심으로 번져나갔지. 정부는 무너지고 민간 전력회사에 대규모 정부 재원이 투입되면서 민영화는 중단됐다. 그게 늘 들어온 비슷한 이야기 중의 하나였다.
토론이 시작되자 소비자단체의 대표인 폴 듀키가 먼저 입을 열었다. 머리가 반쯤 벗어지고 마른 체형의 폴은 소비자 관점에서 민영화의 실패를 설명했다. 그는 정부가 민영화를 시작할 때 가장 크게 내세운 이유가 충분한 투자자금을 전력산업으로 유인하자는 것이었는데, 결론적으로 실패했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전력과 같이 장기적인 투자가 필요한 산업은 투자자들에게 안정적인 수익을 보장하는 한편, 정부의 장기 계획이 필요한데, 자유화는 이를 보장해 주지 못했기에 투자자들이 전력산업에 자본을 넣기가 불안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리고 지난겨울, 갑작스러운 폭풍으로 많은 전력 설비가 유실됐는데, 민간 전력회사들이 소극적으로 대처하면서 요금도 올랐다는 말도 했다. 이에 대해 이근석 단장은 전기요금 규제가 민영화 이후 어떻게 진행되는가를 물었다.
NZPSA의 국제담당자 마이크 잉펜은 이 질문에 대해,
“자유화 이후 시장을 감시하는 조직이 없습니다. 전기와 같이 매우 중요한 서비스는 국가 또는 이를 대신하는 기관이 요금을 비롯한 여러 가지 규제를 해야 하는데, 자유화로 이런 제도를 모두 없앴지요. 그러니 통제가 안 되고 있습니다.” 라고 답변했다.
대화를 듣고 있던 김창석 교수가 끼어들었다.
“여러분들이 보기에 구조개편, 즉 자유화가 구조적인 문제 때문에 실패했는가요, 아니면 가뭄과 폭풍과 같은 자연재해 때문이었나요, 그렇지 않다면 시장설계와 제도의 문제였나요?”
“정부는 뉴질랜드 전체를 휩쓴 대정전의 원인을 기술적인 문제, 즉 낡은 선로 때문이라고 발표했습니다. 맞습니다. 하지만 이는 진실의 절반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100년이 넘는 뉴질랜드 전력산업은 새로운 투자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자본 유입을 목표로 한 민영화가 오히려 투자를 방해했습니다. 장기적인 계획이 없었고요. 지금 정부는 새롭게 뭔가 해 보려고 하는데, 기본적으로 국가의 규제체제를 다시 가동하지 않고는 아무도 책임 안 질 겁니다.” NZPSA의 케빈 버로가 대답했다. 그는 이 노조에서 전력을 비롯한 유틸리티 사업의 담당자였다. 케빈은 계속해서 민영화의 문제점 중 하나를 직원들의 교육과 안전에 대한 투자가 줄었다는 사실도 강조했다. 비용 절감 때문에 인력을 줄였고 교육비용도 감축함으로써 충분한 현장 기술자를 배출하지 못하고 있으며. 안전사고도 높아진다고 했다.
뉴질랜드 공공노조와 시민단체와의 토론은 앞서 진행한 순서들과 너무 유사했다. 테이블 한 끝에서 회의록을 받아 적고 있던 최용석은 더 이상 메모를 하기가 귀찮다는 생각도 들었다. 지금까지 모두 6개 나라를 갔고, 방문한 기관 숫자만 해도 15개가 넘는데, 모두 같은 이야기였다. 물론 자유화에 대해 옹호적인 기관들도 있었지만, 이들도 결과적으로 예기치 않은 실패가 있었다는 사실 자체는 부정하지 못했다. 다만 시장설계와 운영의 실수를 강조했다. 구조개편과 자유화의 큰 방향은 같지만 뭔가 잘못된 점이 있였고 이는 제도개선을 통해 바꿀 수 있다는 그런 주장이었다. 반대로 시민단체나 노동조합 등 자유화 자체를 부정하는 곳에서는 원론적인 민영화의 문제점을 들었다. 대화의 내용이 별 차이가 없었다. 시장과 규제의 싸움, 어디에서나 벌어지고 있었고, 일단은 무리한 시장은 실패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같은 날 오후, 정부 측이 섭외했다는 컨설턴트와의 면담은 웰링턴 시내의 어느 호텔에서 진행됐다. 한국정부의 전력산업구조개편에도 참여했다고 자신을 소개한 마이크 토마스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CRA라는 컨설팅 기업에 속해 있었는데, 직업의 특성상 자주 소속 회사를 옮겼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리고 뉴질랜드의 전력산업은 발전의 한계가 분명했기에 새로운 성장을 위해 산업의 자유화가 필요했다고 설명했다. 특히 농사용과 서비스업 중심의 뉴질랜드에서는 수력발전 위주로 전력산업이 구성돼 있는데, 수십 년간 침체된 상태로 투자가 부족했다고 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규제기관 없는 완전 자유시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자유시장을 설계했다. 하지만, 기후변화 등의 영향으로 강수량이 줄어들고 폭풍이 잦아지는 등 환경변화가 커짐에 따라 자유화된 시장을 어느 정도 규제하기 위해 전기위원회를 새로 만들었으며, 이를 통해 산업과 시장의 규제가 적절히 이뤄질 것으로 기대한다고 했다.
노조 측 위원들은 마이크에게 여러 질문을 했는데, 기본적으로 똑같은 질문이었다. 자유화 자체의 모순과 실패, 그리고 공공체제의 안정성에 대해서도 물었다. 마이크의 답변은 다른 시장주의자들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공공 독점은 한계가 있고 특히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려면 어쩔 수 없다. 그리고 지금 눈앞에 보이는 실패는 제도적 장치의 문제이고, 이를 잘 극복하는 것이 바로 시장의 진화이다. 그게 다였다. 마치 무한 루프에 끼어서 달리듯 계속 반복되는 이런 논쟁. 정답은 어디 있나?
그런데 한 가지 특이한 사실을 느꼈다. 뉴질랜드라는, 한국에서는 지구의 반대쪽인 그곳의 사람들과 자연이 매우 부드러웠다는 사실이었다. 일단 풍광은 정말 좋았다. 무공해라는 말의 뜻을 확실히 알았다. 물과 하늘이 깨끗한 것은 물론이고 환경 자체가 청정하다고나 할까. 길거리의 사람들도 예뻤다. 영국을 닮은 듯 그러나 영국과는 뭔가 다른 그런 사람들의 느낌이었다. 젊은이도 중년층도 남성들은 검은색 양복을 많이 입고 다니고 있었다. 사람들의 표정은 모두 온화했다. 얌전한 환경과 비슷해서 그랬는지. 물론 남섬은 좀 달랐다. 반지의 제왕을 촬영할 정도로 웅장한 산과 호수가 그림과도 같은 곳이었다. 이틀의 남는 시간을 활용해 들러본 퀸스타운은 영화 촬영장 같았다. 시끄럽고 요란한 북반구와는 완전히 다른 남쪽의 온화한 시골, 그리고 그 목가적인 배경을 안고 온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이게 뉴질랜드의 인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