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친 대륙 호주의 통과 의례
연구단 일행은 주말을 맞아 바쁘게 움직였다. 해외출장의 장점이라 할 수 있는 여유의 시간, 급하게 남섬의 크라이스트 처치로 날아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버스로 퀸스타운에 도착했다. 절경이 펼쳐진 곳이었다. 공동연구단의 일정을 짜던 한전은 의도적으로 이런 식으로 날짜를 조정했다. 최용석은 거기에 맞춰 해외기관을 섭외했다. 경치가 좋기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뉴질랜드 남섬에서의 이틀간의 휴식이었다. 그곳은 영화 반지의 제왕의 배경이 됐다고 했는데, 눈 덮인 설경은 정말 아름다웠다. 버스로 이동 중에도 푸른 들판에는 양 떼가 한가롭게 풀을 뜯는 모습이 사방에 보였다. 사람 보다 양이 더 많다는 뉴질랜드, 깨끗하고 아름다운 청정자연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남섬에서의 짧은 휴식을 마치고 크라이스트 처치에서 오클랜드로 이동한 후 하룻밤을 지낸 후 새벽 비행 편으로 호주로 이동했다. 뉴질랜드와 호주 사이는 그리 멀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비행기로 네 시간이나 걸렸다. 바로 이웃나라인 줄 알았는데 꽤 멀리 떨어져 있었다. 뉴질랜드에서 들은 이야기 중에 최용석이 가장 놀란 내용은 뉴질랜드의 젊은이들이 기회만 되면 호주로 일자리를 찾아서 떠난다는 말이었다. 사실 뉴질랜드는 목축을 비롯한 농업이 주된 산업이다 보니 제조업이나 서비스업이 발달하지 못했다. 인구도 천만도 안되기에 시장 자체가 작았다. 그러다 보니 대학 정도를 졸업한 젊은이들은 상대적으로 인구도 많고 일자리 찾을 기회가 많은 호주로 이주하는 일이 많아는 말이었다. 심지어 미국으로 떠나는 사람도 꽤 있다고 했다. 한국처럼 복잡하고 늘 뭔가 일이 생기는 나라에 살다가 뉴질랜드와 같이 목가적인 나라에 오니 숨통이 틔었지만, 막상 현지에 사는 사람들은 한국처럼 경제성장이 활발한 곳을 선망하는 이 모순. 모두가 남의 손의 떡이 커 보이나 보다.
시드니 공항에 비행기가 내린 시간은 오전 9시경이었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이동하는 새벽 항공편은 참 불편했다. 졸린 눈을 비비며 입국장에 줄을 섰다. 떠나온 오클랜드 공항에 비하면 시드니 공항은 시장판이었다. 최소한 30분 이상 줄을 서야 입국 심사대 앞에 도착할 것으로 보였다. 무료하게 줄을 서 있다가 갑자기 크라이스트 처치에서 오클랜드로 이동할 때의 인상적인 장면이 다시 떠올랐다.
크라이스트 처치 공항은 시골 동네 공항이었다. 사람도 비행기도 매우 한산했다. 일행은 게이트가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합실에서 활주로 쪽이 훤히 보이는 구조였고 창밖 멀리로는 눈 덮인 설산도 보이는 상큼한 경치가 펼쳐졌다. 그런데 갑자기 눈이 부시도록 푸른, 아니 하늘색의 대한항공 점보기가 나타났다. 대합실에 있던 모든 사람이 시골 공항에 어울리지 않는 점보기의 등장에 놀란 눈을 뜨며 관심을 보였다. 태극마크도 선명한 대한항공 점보기는 사뿐히 활주로에 내려앉았다.
이런 시골 공항에 저런 큰 비행기가 오다니, 모두가 어리둥절했다. 연구단 일행을 안내하던 현지 가이드는 일행에게 그 이유를 설명했다.
“저 비행기 안에는 김치, 고추장 단지를 안고 있는 아빠들이 가득 타고 있어요.”
가이드의 말을 들은 연구단 일해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되물었다. 그게 무슨 뜻인지를. 그러자 가이드가 웃음을 띤 얼굴로 대답했다.
“ 지금 한국은 겨울방학이지요, 한국은? 그리고 여기도 1월은 방학입니다. 학기가 주로 1월이나 2월에 시작해서 10월 말에 끝나고 긴 여름방학에 들어갑니다. 1월 초까지는 대부분의 학교가 쉬지요. 한국에서 조기 유학생들이 많이 왔어요. 특히, 크라이스트 처치는 학교가 많습니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140개가 넘는다네요. 그래서 한국의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 유학을 많이 옵니다. 학생 혼자 보내기 불안하니 주로 엄마가 따라오지요. 그러다 보니 한국에 남은 아빠들은 기러기 신세가 되고요. 하하. 방학이 되니 아빠들이 휴가를 내서 자식들 얼굴 보러 옵니다.”
4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현지 가이드는 뉴질랜드 이민 생활이 15년째라고 했다. 한국에서는 무역회사에 다니다 자신도 일찌감치 아이들 입시 문제를 고민하다 과감하게 뉴질랜드로 왔다고 했다. 그가 뉴질랜드로 올 때는 지금처럼 한국 사람이 많지 않았다고 하면서 거의 초기 이민 세대와 가깝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이근석 교수가 물었다.
“근데 저 기러기 아빠가 왜 혼자 오는 겁니까? 자식들하고 부인이 한국으로 바람 쐬러 갈 수도 있는 거 아닌가요?”
“뭐 그런 사람도 있겠지만, 아빠가 여기로 오면 돈이 적게 들겠지요. 비행깃값 말입니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12월에서 1월 사이에 저렇게 기러기들이 날아옵니다. 대한항공에서는 이를 눈치채고 이 기간에 저렇게 대형 항공기를 띄웁니다. 평소에는 직항이 없거든요. 한국과의 직항은 오클랜드에 가야 있는데. 우리는 저 비행기를 기러기 수송선이라고 하지요.”
가이드의 설명을 듣던 일행은 갑자기 숙연해졌다. 자식 사랑 하나만으로 한국에 남아 고생하는 기러기 아빠들이 가족들을 보려고 먼 길을 날아오는 그 애절한 정성이 갸륵했고, 한국의 교육제도가 무엇이 문제이길래 이렇게 이산가족이 많은가 하는 현실적 아픔에 가슴이 아렸다.
최용석은 집에 있는 아들 얼굴이 떠올랐다. 본인도 부모 잘 만난 덕에 유학 생활을 했는데, 이제 갓 다섯 살에 접어든 아들에게 한국의 입시 고통을 맛보게 해야 하는지 아니면 저렇게 이산가족이 돼야 하는지. 언젠가 대학원 강의에서 진보적인 사회학 교수가 하던 말이 떠올랐다. 대한민국 입시제도의 문제는 대학입시 그 자체가 아니라 출신대학에 따라 사회적 서열이 만들어지는 사회구조 때문이라는 그 말을. 서울대를 나온 사람이 사회의 맨 꼭대기에 서고 그다음으로 연대, 고대 등 명문 사립대학교 출신들, 그리고 다음으로 소위 말하는 대학교의 입결에 따른 출신들이 줄을 서는 현대판, 하니 한국판 카스트제도가 분명히 살아있기에, 모든 부모는 자식들이 이 먹이 사슬의 한 칸이라도 더 높은 곳에 서기를 원한다. 이런 사회구조 속에서 대학은 학문 탐구나 지식 개발이라는 목적은 사라지고 취업을 위한, 사회의 더 높은 구석을 차지하기 위한 줄 서기 양성소로 전락했다. 연구단 일행은 대부분 최소한 학벌 기준으로는 한국 사회의 상층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에게도 저 멀리 뉴질랜드에서 접하는 한국의 현실은 서글펐다. 상위 계급을 차지하기 위해 벌어지는 이 무모한 싸움과 경쟁이 없다면, 아니 조금이라도 완화된다면 이를 통해서 얼마나 많은 대한민국의 에너지가 아껴질 것인가.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시드니 공항의 혼란 속에서도 입국장의 줄은 조금씩 줄어들어 마침내 최용석 차례가 됐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던 호주 입국심사관은 무표정하게 최용석의 여권을 받아 들고 이리저리 살펴봤다. 최용석은 속으로 말했다, 뭘 그리 유심히 보냐, 그냥 간단하게 입국 스탬프를 찍어, 나도 매우 피곤하거든. 그런데 심사관은 쉽게 입국심사를 마칠 기세가 아니었다. 꽤 꼼꼼히 여권을 이리저리 살피면서 뭔가를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 이래서 입국장이 혼잡하구나 하고 최용석은 생각했다. 2~3분 넘게 여권을 살펴보던 심사관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어디론가로 가 버렸다. 이게 무슨 낭패인가. 나도 시간이 걸려서 짜증이 나지만 재수 없이 내 뒤에 선 사람들은 어떨지 하는 생각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한 5분이 지난 후 돌아온 심사관은 내게 나오라고 손짓했다. 일단 줄에서 빠져나와 그를 따라 뒤쪽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가 안내한 곳은 복도 한편에 있던 조그만 방이었다. 작은 책상 하나와 마주 보는 의자 둘만 달랑 놓인 모습으로, 영화에서 보던 경찰의 취조실 같은 그런 곳이었다. 안내에 따라 의자에 앉으며 최용석은 갑자기 큰 불안감과 공포심이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내가 무슨 이유로 이런 곳으로 안내가 된 것인가? 혹시 과거 외국의 입출국 과정에서 무슨 문제가 있었나. 최용석을 방에 놓고 나간 심사관은 한참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혼자 남은 최용석은 일행들은 이미 입국장을 다 빠져나가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자 더 불안해졌다.
20분이 다 돼서 돌아온 심사관은 심각한 표정으로 심문을 시작했다.
“당신 이름이 뭔가요?”
뜬금없는 질문에 어이가 없었지만, 따지거나 싸울 분위기가 아니었다. 최용석의 답변을 들은 심사관은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거기에다 한글로 이름을 쓰라고 했다. 황당했지만 그대로 했다. 이름을 쓰고 나자 다시 물었다.
“한국 사람들이 태어나면서 가지게 되는 고유번호 13 자리도 써 보시지요?”
정말 어이가 없었지만 뭔가 감이 잡혔다. 주민번호 13 자리를 종이에 쓰면서 최용석은 이 심사관이 나를 한국인이 아닌 다른 나라 사람으로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이름과 주민번호 쓰는 것을 지켜보던 심사관은 다시 말없이 방을 나갔다. 그리고 또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약 10분 정도가 다시 흐른 후 다른 백인이 방에 들어왔다. 그는 말없이 테이블 가운데 있던 전화기의 스피커 폰을 켰다. 그리고는 최용석에게 말했다.
“지금 이 전화의 반대편에 나와 있는 사람과 한국말로 대화하세요. 영어는 안 되고 반드시 한국말로 말하세요.”
대충 짐작이 갔다. 아마 한국 영사관이든 어디든 한국인과 전화를 연결했구나. 스피커 폰에서 한국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지금 듣고 계신가요?”
“예, 듣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 공항인데 무슨 일인지 몰라도 이 사람들이 이상한 질문을 계속하네요. 무슨 이유인가요?”
“아, 예, 이유를 제가 직접 말씀드릴 수는 없고요, 아무튼 한국분이 맞이시지요?”
“물론이지요. 지금 일행들은 다 나가서 기다릴 건데 큰일이네요. 이 사람들한테 설명 좀 잘해 주세요. 저는 분명히 한국인이고 전에 호주에 와 본 적도 있다고요. 뭔가 큰 오해가 있나 봅니다.”
“예, 알겠습니다. 이제 별일 없을 겁니다. 좋은 여행 하세요.”
전화 통화가 마무리되자 배가 나온 그 중년 백인은 다시 밖으로 나갔다. 한 1분 정도 지났을까, 전화 통화를 지켜보던 백인이 최용석의 여권을 들고 돌아왔다. 그리고 이 상황에 관해 설명했다. 문제는 여권이었다. 최용석이 유럽과 호주로의 2차 일정을 떠나기 전 여권을 잃어버렸다. 사실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입던 옷의 주머니 속에서 세탁기로 그대로 들어가 버렸다. 한참을 찾다가 이미 세탁이 끝난 청바지에서 여권을 발견했을 때, 여권은 세탁물과 함께 깨끗하게 세탁이 됐다. 결과는 여권이 너덜너덜해졌다는 것이었다. 걱정은 됐지만 여권을 새로 만들 시간이 없기에 그냥 출장을 떠났고, 영국, 프랑스, 뉴질랜드 입출국 과정에서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호주 입국에서 문제가 생겼다. 체격이 크고 머리가 벗어진 백인 심사관은 최용석에게 말했다.
“확인 결과 당신이 한국인이라는 건 분명하네요. 그런데, 보세요, 당신 여권 상태를. 이런 여권을 들고 다니면 누구나 의심할 수 있어요. 집으로 돌아가신 다음에 즉시 새 여권으로 교체 발급하세요. 다른 나라에서도 이런 의심을 할 수 있습니다.”
“미안합니다. 여권이 실수로 세탁기에 들어갔나 봅니다. 그런데 어떤 의심을 하셨나요?”
다른 나라에서는 나라에서는 다 괜찮았는데 왜 당신들만 문제를 삼느냐는 말을 속으로 삼키며 물었다.
“요즘 중국인들이 한국이나 일본 여권을 위조해서 입국을 시도하는 일이 많습니다. 당신 여권 상태가 이러니 우리로서는 그런 의심을 안 할 수가 없었지요. 무슨 말인지 아시지요?”
백인 심사관은 아까보다는 좀 친절한 태도로 상황을 설명했다. 괜한 의심을 받은 것에 대해 짜증도 났지만, 원인 제공은 본인이 했기에 최용석은 그냥 참을 수밖에 없었다. 대충 마무리하고 재빨리 방을 벗어났다. 입국장으로 들어오니 여기에도 사람이 많기는 마찬가지였다. 자기 때문에 혹시 연구단 일행이 걱정을 할까 급한 마음에 입국장 여기저기를 둘러보는데, 김창석 교수가 어디론가 부지런히 가는 모습이 보였다. 급하게 따라붙으며 물었다.
“교수님, 제가 문제가 있어서 시간이 오래 걸렸네요. 다들 어디 계시는가요?”
김 교수는 뒤돌아보며 씩 웃으며 말했다.
“어, 최 부장도 시간이 걸렸나요? 나는 이놈을 고추장 때문에 한참 헤맸네.”
“고추장이라뇨? 짐에서 문제가 있었나요?”
“아니, 이 친구들이 이걸 검색한다고 이리저리 보더니 나보고 어디로 가자고 해서 독방에서 짐검사를 완전히 새로 받았어요. 무슨 마약을 갖고 온 것처럼 말입니다. 힘들어 죽겠네. 어딜 다니면서 이런 일은 처음이었어요.”
사정은 이랬다. 김 교수가 부친 짐 속에 마트에서 새로 산 고추장이 하나 있었는데, 이게 검색대에서 걸렸다고 했다. 그래서 김 교수를 호출해서 모든 짐을 다 검색했고, 심지어 옷까지 다 벗겼다고 했다. 무슨 마약범 취급을 받았으니 엄청 화가 났을 것이었다. 최용석은 속으로 웃었다. 일행 중 한 사람은 마약사범, 그리도 또 한 사람은 불법입국자 취급을 잠시나마 받았네.
두 사람은 바삐 걸어서 대합실을 빠져나와 나머지 일행이 기다리는 곳으로 합류했다. 호주 시드니 현지를 안내할 현지 가이드를 만나자마자 두 사람의 상황을 설명했다. 가이드에 따르면 시드니 공항에서는 자주 있는 일이라고 했다. 호주는 외부 입국자의 심사를 매우 까다롭게 하기로 유명한데, 특히 남반구에 홀로 떨어진 곳이라 북반구에서 오는 사람들의 검역에 매우 민감했는데, 최근에는 중국 출신의 불법입국자 문제가 사회 문제로 부각되면서 더 철저해졌다는 말이었다.
최용석은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본 여권 위조 관련 뉴스를 떠올렸다. 뉴스에서는 한국 여권을 무비자로 받아주는 나라가 늘어남에 따라 해외에서 한국 여권 도난 문제가 심각해졌다며, 여행객들의 주의를 당부했다. 생체정보가 입력된 전자여권이 도입되기 전의 여권을 냉동고에 얼린 다음 예리한 칼로 얼어붙은 코팅을 벗긴 다음 사진을 바꿔치기하고, 다시 뜨거운 다리미로 코팅 부분을 눌러주면 완벽하게 위조 여권이 탄생하는 장면을 그 뉴스가 방영했다. 호주 공무원들이 최용석의 여권을 의심할 만한 상황이었다.
최용석과 김창석 교수 이외에도 일행 중 여러 사람이 상당히 까다로운 검색을 받았다고 했다. 다들 시간이 지체되고 그 과정에서 짜증도 많이 났다. 최용석은 자신 혼자만의 문제로 일행이 기다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뉴질랜드에서 호주로의 이동은 이런 고난의 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