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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산업 민영화, 그 뒷이야기 27

선진국으로의 꿈이 실패하다

by 요아킴

모두가 알고 있듯이 호주는 영국의 식민지였다. 한때 세계 육지의 4분의 1일 점령했던 영국의 식민지 중에서 호주는 당시에는 큰 가치가 없었다. 일단 영국에서 너무 멀었다. 계절도 반대이고 땅덩어리는 엄청 넓었지만, 사람이 살기에 편리한 곳은 아니었다. 원주민과의 갈등도 그랬고. 그래서 영국 사람 중에 제일 먼저 호주 땅에 정착한 사람들은 죄수들과 이들을 감시하던 간수들이었다. 원래 영국은 죄수들을 미국으로 보냈으나 미국의 독립으로 그게 불가능해지자 호주를 다음 유배지로 선택했다. 당시의 항해 기술, 의료 수준, 위생 등등 범선을 타고 희망봉을 돌아 인도양을 건너 다시 호주로 왔을 그 바닷길은 배 다섯 척이 가다가 두 척이 사라져도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었을 정도로 험난했을 것이다. 차라리 지금 우주선을 타고 달에 가는 것이 그때의 그 뱃길보다 안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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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레일리아 연방(Commonwealth of Australia)이라는 자치령으로 지정하고 독자적인 헌법을 제정한 것이 1901년이었다. 호주의 독립과 건국이었다. 하지만 이때에도 영국과 한 나라라는 생각이 강했는데, 완전한 독립을 꿈꾸게 된 것은 제1차 세계대전 때문이라고 한다. 당시 뉴질랜드의 식민지인들과 함께 호주인들은 유럽의 전쟁에 참전했고, 많은 희생을 치렀다. 인도를 비롯한 영국 식민지 대부분은 이 전쟁에 참전하는 대가로 독립을 약속받았다. 실질적인 완전 독립은 1986년에 호주 의회와 영국 의회가 오스트레일리아 법(Australia Act)을 통과시킴으로써 호주는 영국과의 법적 예속 관계를 청산하면서 달성됐다. 그 이전까지는 법률 개정 등의 절차도 영국 의회의 승인을 받는 등 내용 면에서는 불완전한 상태였다. 아무튼 호주는 영국의 품에서 태어났고, 이에 따라 전력산업 자유화도 영국의 방식을 그대로 답습했다.


영국의 식민지로서 호주는 전통적으로 농업과 광업 중심의 경제구조를 유지했고, 높은 관세를 통해 외부와의 경제교류는 제한적으로 진행했다. 하지만 1980년대 노동당 정부는 자유주의 노선을 도입해서 대외 개방을 했고, 많은 부분에서 개방, 구조조정, 자유화를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단순제조업은 큰 영향을 받았지만, 전체적으로 높은 경제성장을 이룩했다고 한다. 전력산업 역시 이런 기조에 따라 1990년대 중반부터 영국식 자유화를 도입했는데, 연방 정부의 특성상 주별로 그 속도와 규모는 달랐다. 가장 빠른 속도로 민영화와 자유화를 추진한 곳이 빅토리아와 뉴사우스웨일스 두 지역이었다. 구조개편은 영국식의 천편일률적인 모델에 따라 주의 전력공기업을 분리해서 발전과 판매를 나누고 전력시장을 개설하는 식으로 진행됐고, 이 과정에서 공기업의 민영화도 함께 진행했다. 우리나라가 하려던 바로 그 방식이었고, 호주의 전력산업 자유화를 설계했던 프리힐스와 같은 컨설팅 기업들도 우리나라의 구조개편에 이 방삭을 그대로 들고 왔다. 그게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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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3일 오전, 연구단은 멜버른에 있는 빅토리아 주정부의 공공서비스 규제기관인 필수서비스위원회를 방문했다. 약칭 ESC인 이 위원회는 정부가 임명한 커미셔너 3명이 운영하는 곳으로 전력, 수도 등 공공서비스 전체를 관리하고 감독하는 기관으로, 앞서 방문했던 미국 캘리포니아의 PUC와 유사한 권한을 가진 곳이었다. ESC에서는 국장급인 데이빗 코넬리우스와 피터 윌쉬 두 사람이 연구단을 맞았다. 이들은 빅토리아주의 구조개편이 1990년대부터 이어진 국가 전체의 자유화와 구조조정 일부였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전력산업의 경쟁력도 향상되고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전력산업을 총괄하는 주정부 기관으로서는 당연히 하는 말로 들렸다.


이근석 교수가 물었다.

“호주에는 NEMMCO라는 전력시장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 기관은 언제 생겼고 또 하는 역할은 무엇인가요?”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약간 뚱뚱하고 마음 좋게 생긴 코넬리우스라고 자신을 소개했던 ESC의 대외관계 담당자가 대답했다.

“전력자유화를 시작할 초기부터 중립적인 시장이 필요해서 만든 곳이 바로 NEMMCO입니다. NEMMCO는 전력망을 운영하는 SO 기능과 전력의 도매거래를 하는 MO 역할을 동시에 합니다. 빅토리아는 모든 전력거래를 바로 이 NEMMCO에서 하게 돼 있습니다.”


대화를 듣고 있던 김창석 교수가 코넬리우스에게 물었다.

“자유화 이전에는 빅토리아의 전력산업이 공기업 독점이었다고 들었습니다. 구조개편을 하고 나서 발전과 송전은 연방정부의 관할 아래 있고, 배전과 판매는 주정부가 규제하고 있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큰 특별한 이유는 없는데, 송전은 주 경계선을 넘어가는 사업이기 때문에 연방정부가 관리하고, 배전과 판매는 지역별로 특성이 있어서 주정부에게 관리 권한이 있으므로 그렇게 설계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발전부문은 왜 연방정부 관할에 있는지는 정확하게 모르겠습니다. 제 생각에는 에너지를 직접 생산하는 부문이라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합니다. 환경이나 에너지 효율 등의 문제가 연방정부 차원의 이슈이기 때문에요.”


김 교수의 질문에 시장담당관인 피터 윌쉬는 이렇게 대답했다.

“현재 빅토리아의 전기 소매요금이 급하게 올라가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너무 급하게 전력시장을 도입한 결과가 아닌지요? 일부에서는 전기와 같은 망 산업은 다른 재화를 다루는 산업처럼 시장경쟁에 맡기면 안 된다는 말도 있던데요? 호주의 전력산업 자유화는 여러 문제를 일으켰던 영국식을 그대로 따라 했다는 비판도 있던데요. 여기에 관한 생각은 무엇인가요?


이병훈 교수의 질문이었다. 이 교수 질문의 의도는 간단했다. 세계적으로 유사한 형태의 영국식 전력거래 모델은 이를 도입했던 여러 곳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국은 초기에 떨어지던 전기요금이 다시 오르기 시작함으로써 애초에 달성하려던 요금인하 목표가 흔들렸고 더 심각했던 문제는 쪼개고 민영화했던 여러 전력회사의 소유권이 프랑스와 독일의 손에 넘어갔다. 캘리포니아에서는 발전회사가 주도권을 쥐고 요금담합을 함으로써 심각한 전력부족 사태를 불러왔다. 호주에서도 일순간에 독점 공기업 전력회사를 영국처럼 나누고 민영화했던 빅토리아에서는 영국과 유사한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상대적으로 느린 속도로 민영화했던 뉴사우스웨일스에서는 이런 현상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이런 소식을 이미 전해 들은 이 교수는 핵심적인 질문을 한 것이었다.


예상했던 반응이 나왔다. 코넬리우스가 이 병훈 교수와 윌쉬의 대화에 개입했다. 윌쉬 역시 이런 상황을 다 이해했기에 변명 아닌 변명을 해야만 했다. 윌쉬의 답은 이랬다. 구조개편과 자유화 자체의 문제는 아니라 시장의 설계에서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작용이 나타났다는 것이었다. 빅토리아는 영국이나 캘리포니아와는 달리 시장을 설계할 때 베스팅 컨트랙트를 도입했는데, 이 과정에서 정부의 목표 가격 설정이 잘못 됐다는 점을 강조했다. 여기에서 말하는 베스팅 컨트랙트는 여러 계약에서 사용하는 것을 전력산업에 적용한 방법으로, 경직된 산업에 자유시장을 도입하면서, 정부가 초기에는 거래 물량과 목표 가격을 미리 설정하고 판매자와 구매자의 계약을 이 범위 안에서 하도록 유도하는 계약 방법이다. 판매자와 구매자가 이 목표 물량과 가격을 기준으로 거래하고 나서 시장상황의 변동에 따라 실제 정산가격이 차이가 날 경우 이 차액을 판매자와 구매자가 정산하도록 유도하는 방법이 바로 베스팅 컨트렉트이다. 단어가 설명하듯이 베스팅, 즉 갑옷을 입고 서로 보호하는 계약 방식이 바로 그것이다.


베스팅 컨트랙트가 성공하려면 정부, 특히 거래를 직접 조정하는 정부 기관이 정확한 물량과 예상 가격을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 특정 날짜 또는 기간에 전기가 얼마나 필요하고 이를 생산하는데 소요되는 원가를 정확하게 예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정부, 또는 규제기관이 이를 토대로 그 날짜의 전기 생산과 소비량을 제시하고 발전회사와 판매회사가 이 범위 안에서 계약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 예상이 빗나갈 확률이 당연히 높다는 것이다. 그래서 적정 범위 안에서 실제 거래량과 이에 따른 실제 가격을 계산하고 만약 소비가 공급보다 높았을 경우 판매회사가 추가 발전회사에게 구매 대금을 지급하도록 하고, 반대의 경우에는 발전회사가 판매회사에게 정산금액을 환불해 주는 그런 제도이다. 이는 시장거래의 초기 단계에서 예상하지 못하는 위험을 없애기 위한 제도인데, 캘리포니아는 이런 제도가 아예 없었다. 그래서 발전회사가 갑자기 전력생산량을 줄여도 판매회사는 올라가는 전력구매대금을 그대로 지급할 수밖에 없었고 결과적으로 지급불능 상태에 빠져버린 것이었다.


윌쉬는 자신이 시장설계에 참여했고 이 베스팅 컨트랙트가 어떤 구조인지를 잘 이해했다고 했다. 그런데 발전회사와 판매회사 사이의 거래가 몇 년 정도 흐르는 과정에서 몇 가지 이유, 특히 가뭄 때문에 수력발전량이 줄어드는 것과 동시에 국제 석탄가격 인상으로 화력발전소의 생산단가가 갑자기 올라가는 바람에 주정부가 설정한 베스팅 컨트랙트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다는 것이 윌쉬의 대답이었다. 그래서 단기적으로 최종 소비자의 전기요금이 급등했고, 주정부는 이를 바로잡기 위해 제도를 바꾸고 있다고 답했다. 그런데 여기에서 다른 문제가 터져 나왔다. 주정부의 해법이 시장을 더 자유화한 것이었다. VC로 불리는 베스팅 컨트랙트를 아예 없애고 본격적인 전력시장인 NEMMCO를 도입해 버린 것이었다. 물론 이 전력시장은 연방정부가 설계하고 도입한 것이므로 빅토리아 주정부만의 실수는 아니었다. 하지만 거래 물량과 가격을 미리 설정한 안정적이던 VC가 제대로 작동 못하는 현실을 완전 도매시장을 통해서 해결하려는 방식이 문제였다. 노조 측 교수들은 이 문제를 지적하기 시작했다.


안현필 교수와 김명자 교수는 비슷한 질문을 했다. 공기업 독점체제가 일부 비효율적이라고 해서 자유화를 시작했고 또 전력산업의 소유권을 민간에게 개방한 것까지는 이해가 된다, 하지만 VC를 적용해서도 불안정했던 전력산업을 더 적극적인 도매시장으로 해결한다는 것은 이해가 안 된다, 이는 심장에 통증이 있는 환자에게 심장 근육을 당장 키우라고 달리기를 시키는 것과 같은 무리한 생각이 아니냐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김창석, 신중진 두 정부 측 위원들은 정반대의 논리로 질문했다. 김 교수와 신 교수는 처음부터 도매시장을 자유화했어야지 어정쩡한 VC를 적용함으로써 전력시장의 이해당사자들이 제도를 악용하는 사태를 불러온 것이 아니냐고 했다.


ESC의 두 사람은 당황했다. 한국에서 호주의 전력산업에 대한 질문을 하는 방문단이 온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런 구체적인 사안까지 쟁점화해서 논쟁이 벌어질 줄은 몰랐다. 그저 호주가, 특히 빅토리아주가 어떤 식으로 구조개편을 하는가 정도를 물어보는 사람들이 오는 것으로 알았는데, 시장설계와 요금구조까지 캐묻는 사람들이 온다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둘은 속으로 생각했다, 당초에 한전에서 방문 목적을 제대로 말해 주지 않았구나, 그냥 정부의 연구기관에서 해외사례를 살펴보러 오는 줄 알았는데 이 연구단이 내부적으로 서로 의견이 대립하는 구조였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당혹했다. 코넬리우스와 윌쉬는 자신들이 잘못된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자리에는 자신들과 같은 단순한 공무원이 아닌 호주 전력산업 자유화를 결정한 정치인들이 와서 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후 토론은 마무리 분위기로 돌아갔다. ESC 사람들은 10년이 조금 지난 자유화 과정에서 요금 변동 같은 일은 원래 발생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해명하면서, 궁극적으로 전력시장을 계속 활성화하면 많은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믿는다고 했다. 정부 측 교수들은 이들의 말을 지지하면서, 캘리포니아와 같은 파국적인 상황은 시장구조의 문제였을 뿐 시장화와 민영화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했다. 반면 노조 측 위원들은 항상 그랬듯이 전력산업이라는 산업의 무리한 자유화는 문제가 많다고 지적했다. 이근석, 이병호 두 중립 측 교수들은 양측의 논쟁에서 핵심적인 사실들에 대해 호주 사람들에게 질문하고 확인했다. 이를 지켜보며 회의록을 작성하던 최용석은 서서히 사안들이 정리되는 것으로 느꼈다. 정부와 노조 양측이 선임한 위원들은 어차피 서로 양보하지 못할 논리를 가지고 있었다. 멀리 외국까지 와서 현장을 보면서도 각자의 잣대에 맞게 해석하고 이를 합리화했다. 물론 구조개편 자체의 부당성을 믿는 최용석은 당연히 노조 측 교수들과 뜻을 같이 했다. 현상이 아닌 신념과 이념의 문제였다.


문제는 중립 측 위원들의 자세였다. 아직 이 두 교수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가늠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다소 딱딱하고 완고해 보였던 이근석 교수에게서는 일정이 지나면서 생각보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면이 보이기 시작했다. 비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농담도 자주 던졌다. 이병호 교수는 평소 TV나 언론의 인터뷰에도 자주 등장하는 사회학자로 성격 자체가 온화했다. 전체 일행과의 관계도 좋았고 웃음도 많았다. 정부 측 김창석, 신중진 교수는 처음부터 여유가 많았다. 그들은 이 해외 조사 일정 자체가 일종의 요식행위, 즉 이미 한전의 배전을 쪼개고 민영화하기로 정부가 결정한 이상 무조건 노사정 공동연구는 일종의 요식행위이며, 특히 참여정부의 정신을 살린 보여주기식 절차에 불과한 것으로 이들은 느끼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래서 일정을 진행할수록 이들은 여행 자체를 즐기려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고, 방문기관에서의 토론과 조사에서도 그리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반면 노조 측 두 교수는 이번 해외 실사에 모든 것을 걸고 있었다. 이들은 정부의 잘못된 민영화를 막는 상징적 투쟁으로 이번 배전분할 공동연구단을 설정했다. 그리고 이 연구단에서 배전분할과 민영화를 막는 것은 다른 국가기간산업의 연쇄적 민영화를 막는 첫 단계로 생각했다. 그래서 이들은 치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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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오후와 다음 날, 연구단은 미국계 배전회사 한 곳과 프리힐스라는 컨설팅 회사를 방문했다. 텍사스에 본사를 둔 텍사스 유틸리티가 인수한 배전회사 TXU였다. TXU에서의 논점은 상대적으로 전력도매시장에서 발전회사에 비해 불리한 배전과 판매회사의 생존 방법에 관한 문제였다. 앞에 설명한 베스팅 컨트랙트가 유지될 때는 배전회사는 일정한 보호를 받는다. 하지만 본격적인 전력시장 NEMMCO가 가동되면서 배전과 판매회사는 전력시장에서 불리한 위치에 놓인다. 이유는 단순했다. 전기는 물리학적으로 생산과 동시에 소비가 되며, 경제학적으로 보면 대체품이 없는 수요탄력성이 0인 재화이다. 즉, 발전소의 발전기가 멈추는 순간 모든 것이 사라진다. 생산자가 우월한 시장이다. 그래서 전력산업 민영화 반대 목소리가 나온다.


TXU와의 토론에서 전력소매 자유화에서 소외되는 약한 소비자를 위한 제도인 ROLR에 관해 집중적으로 토의가 진행됐다. 전력시장이 자유화돼 고객이 전기회사를 선택하는 시스템이 도입되면 전기를 많이 사용하는 소비자들이 유리해진다. 이들은 협상력을 동원해서 전력회사로부터 좋은 조건으로 전력공급을 계약할 수 있다. 배전이나 판매회사로서도 안정적으로 많은 전기를 사가는 고객에게 유리한 조건을 주는 것은 당연하다. 이 과정에서 가정집과 같은 소규모 고객들은 당연히 불리한 위치에 놓인다. 전력판매사업이 자유화되면 전기를 공급하는 비용은 상대적으로 많이 들면서 전기는 적게 사용하는 소형 고객은 아무도 관심이 없게 된다. 특히 농촌과 같이 배전선로를 길게 깔고 전주를 많이 세워서 공급원가가 비싼 지역에는 아무도 전기를 팔고 싶지 않다. 대도시나 대형 공장에는 서로 전기를 팔고 싶어 한다. 따라서, 전력시장에서 외면받는 소형 고객들은 소외당한다. 또 경쟁적인 전력시장에서는 파산하는 전력판매회사가 나올 수도 있다. 이 경우 소형 소비자들은 전기를 공급받을 방법이 없어진다. 이를 막기 위한 제도가 바로 ROLR, Retail of Last Resort 제도이다. ROLR를 실행한 최초의 국가가 바로 호주였다.


ROLR를 한 마디로 설명하면, 위와 같은 극단적인 상황이 와서 주택용과 같은 소형 소비자들이 전기공급을 받기 어려워질 때 정부가 개입하는 시스템이다. 정부가 국가재정을 투입해서 전기공급에서 소외되는 소비자를 지원하는 것이 이 제도의 핵심이다. 전기는 단 한순간도 공급이 중단되면 안 되는 필수적인 공공서비스이므로 만약 자유화를 한다면 이런 보완적인 제도가 필요하다. 하지만 캘리포니아와 같은 급진적인 자유화 지역에서는 이런 보완 제도를 준비하지 않고 무조건 시장을 믿었기에 공급중단과 같은 파국적인 결과가 나왔다. 필수공익서비스를 공기업이 수행하면 이런 일이 생기지 않지만, 이윤을 추구하는 민간기업들이, 그것도 발전과 송배전 그리고 판매를 나눠서 하게 되면 나올 수 있는 결과였는데, 시장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전기를 일반 재화나 상품으로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다음날 연구단은 전력산업 자유화를 설계하는데 세계적으로 유명했던 컨설팅 회사인 프리힐스를 찾았다. 프리힐스는 영국식 모델을 전 세계로 확산한 일등공신이었다. 이들은 모든 전력거래를 풀시장이라는 구조의 시장에 무조건 맡기면 전기 생산자와 소비자가 알아서 최적의 조건으로 전기를 만들고 사용한다는 신념으로 영국식 시장모델을 들고 비용절감과 산업구조 개편을 원했던 여러 나라 정부를 상대로 컨설팅 활동을 했다. 영국에서 시작된 구조개편은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를 이어 태국과 한국에까지 상륙했고, 그 과정에 프리힐스는 각 정부의 용역을 받아 똑같은 자유화 모델을 제시했다.


연구단은 프리힐스에서 먼저 영국식 구조개편을 전 세계에 홍보하는 전도사 역할에 대해 물었다. 이에 대한 프리힐스의 답변은 매우 단순했다. 민영화와 자유화의 목표는 경쟁을 통한 효율향상, 그리고 결과적으로 전기요금을 내리는 것이라고 했다. 노조 측 위원들은 항상 묻던 질문을 했다. 과연 그게 성공하고 있냐고. 프리힐스의 답변도 역시 다른 구조개편 옹호론자들과 같았다. 나라별로 사정이 다르듯이 시장설계에 차이가 났기 때문에 그 결과를 일률적으로 평가할 수는 없다는 주장이었다. 연구단의 노조 측 위원들은 최초 시장을 추진했던 사람들과 이를 수익사업으로 여러 나라에 퍼트린 컨설팅 회사들의 잘못이라는 지적을 했다.


호주의 여러 기관과의 면담을 통해 얻은 결론은 명확했다. 공기업 독점이 옳으냐 민간기업 주도의 시장체제가 옳은가를 놓고 논쟁하는 것은 사실 탁상공론에 머물 수도 있었다. 공급안정성만을 목표로 삼는다면 수직독점 공기업 체제가 분명 우월했다. 하지만 독점의 비효율을 제거하기 위한 경쟁체제로 전환한다면 다음 다섯 가지 조건은 갖춰져야 한다는 것이 구조개편 찬반 양쪽의 공통된 입장이었다. 첫째, 전력망이 고립된 지역에서는 자유경쟁체제가 위험하다는 것이다. 만약에 있을지도 모르는 시장의 실패에 대비하는 외부로부터의 전력공급이 가능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둘째, 발전부문의 경쟁을 먼저 시작하고 순차적으로 배전과 소매경쟁을 도입해야 한다. 너무 급하게 발전과 소매 경쟁을 동시에 진행하면 대혼란이 벌어지며, 이는 캘리포니아의 결과에서 입증됐다. 셋째, 발전회사가 소매회사를 함께 가지는 부문별 크로스 오버가 필요하다. 이는 일종의 시장위험 헤징을 위한 최선의 선택이다. 넷째, 구조개편을 설계할 때 경쟁을 통한 비용감소만 생각하지 말고 구조개편으로 발생하는 비용도 고려해야 한다. 시장을 설계하는 비용, 전력거래 과정에서 발생하는 각종 비용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다섯째, 전력산업의 각 부문에서 독립된 엄정한 규제감독기관이 필요하다. 이 다섯 가지 필수 고려사항에 대해서는 모두가 이견이 없었다.


전통적으로 보수적인 전력산업의 독점을 깨고 자유화의 바람을 불어넣는 것은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문제는 이를 이념적 잣대를 놓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하나의 선택에는 반드시 다른 하나의 문제가 나온다. 호주의 여러 기관을 둘러본 연구단의 견해였다. 물론 모두가 이런 의견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어느 한쪽이 반드시 옳다고 믿는 신념을 가진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현실은 이론적 잣대로 깔끔하게 정리되는 사례 보다 더 복잡한 경우가 많다는 것이었다. 고색창연한 멜버른을 둘러보며 느낀 최용석의 소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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