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비를 좋아한다.
비가 내리면 모두가 차분해진다.
들뜬 봄날의 햇살도 좋지만
가을날의 차가운 빗발도 좋다.
비가 오면 우선 깨끗해진다.
먼지도 가라앉고 꽃가루도 잦아든다.
그리고 내 마음도 차분히 내려앉는다.
어릴 적, 한옥의 처마 끝마다
물받이가 있었다.
비가 내리면 정겨운 소리가 거기서 나왔다.
비 오는 날
나는 처마 끝이 가까운 마루에 엎드려
그저 비가 처마를 타고 내리는 모습을 즐겼다.
첫사랑 여친은
비 오는 날보다 비 오기 직전의 잔뜩 구름 낀 날을 좋아했다.
왜냐고 물었다.
그녀의 대답은 먹구름 흐린 날이 그저 좋다고 했다.
내가 비 오는 날이 그냥 좋듯이.
비 오기 직전을 좋아하던 그녀와
비 내리는 날을 좋아하던 나는
그저 이유 없이 그렇게 좋았다.
지금은 둘은 멀리 있다.
잘 있기를.
오늘도 비를 잔뜩 머금은 구름이 끼는 날
나는 그녀가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