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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산업 민영화, 그 뒷 이야기 28

친구와의 재회와 또 다른 호주

by 요아킴


빅토리아주의 "멜버른"(진짜 이름은 멜번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일본식 발음으로 아직 부름)을 떠난 일행은 시드니에 도착했다. 뉴질랜드에서 시드니 공항에 도착했다가 다시 멜번에 갔다 또 시드니로 돌아오는 복잡한 일정이었다. 시드니는 멜번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의 현대적인 도시였다. 반대로 멜번은 유럽의 고색창연한 도시를 그대로 옮겨 온 듯했다. 원래 멜번은 호주 최대의 도시였고 수도이기도 했지만, 시드니가 급성장하면서 최대 도시의 타이틀을 내려놓았다. 멜번은 시드니 보다 개발이 늦어졌고 그 덕분인지 몰라도 과거 빅토리아 시대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이에 반해서 시드니는 호주를 대표하는 대도시로 매우 현대적이었다.


시드니에서 연구단이 제일 먼저 찾은 기관은 호주공공노조였다. 불과 1년 전 최용석이 국제회의에서 만난 그렉 맥클레인이 호주공공노조 ASU에서 전력부문을 담당하고 있었기에 이 노조를 섭외했다. 최용석이 그렉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민주노총 소속의 공공연맹을 통해서였다. 최용석이 속했던 전력노조는 한국노총의 정부투자기관노련, 공공노련, 그리고 민주노총의 공공연맹, 보건의료노조, 공무원노조와 함께 국제공공노련(PSI)이라는 국제 노동단체에 가입해 있었다. PSI라는 약자로 불리던 국제공공노련은 프랑스에 본부를 둔 세계 최대 공공부문 노동조합 연맹으로, 조합원 규모가 1천만 명에 육박하는 대규모 노조연맹으로, 한국에서는 한국노총과 민주노총 각 3개 조직이 가맹한 상태였다. 한국의 가맹조직들은 PSI 가맹조직협의회(PSI-KC)라는 공동체를 조직해서 PSI와 관련한 국제업무를 함께 진행하고 있었다.


최용석이 전력노조의 국제담당자로 보직을 받은 후 PSI-KC의 집행위원으로 활동하는 중 민주노총의 공공연맹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공공연맹은 PSI-KC 주관으로 민영화 반대와 관련된 국제세미나를 하자고 제안했고, 그 세미나의 패널 중 한 명으로 그렉 맥클레인을 초청했다. 그리고 그렉을 안내하고 통역도 부탁한 것이었다. 그것이 그렉과의 첫 인연이었다. 그리고 공동연구단을 꾸리고 일정을 짤 때 호주 일정의 하나로 당연히 ASU의 그렉을 포함했다.

asu.jpg 호주 공공노조 포스터


약속된 시간에 그렉의 사무실을 찾았다. 키가 크고 체격이 장대한 그렉이 반쯤 벗겨진 곱슬머리를 쓰다듬으며 반갑게 일행을 맞이했다. 이번에 세 번째 만남이었다. 처음 민주노총 토론회에서 만났고, 그다음은 2003년 6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노동기구(ILO) 국제 노사정 3자 회의에서였다. 당시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과 민영화가 세계적으로 퍼져 나가던 때였고, 이를 놓고 각 나라에서는 공무원과 공기업 노동조합과 정부 사이에 심각한 대립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ILO는 세계 주요 나라의 정부 대표와 사용자 대표, 그리고 노동조합 대표를 불러 토론회를 열었다. 전력노조 위원장은 노조가 가맹하고 있던 국제조직인 국제화학광산노동조합연맹의 추천으로 여기에 참여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김대중 정부가 시작한 공공부문 구조조정과 이를 놓고 반대하던 공무원 노조 등 공공노동조합의 저항이 거세던 때였다. 그렉은 국제공공노련(PSI)의 호주 대표로 거기에 있었다. 두 번째 만남으로 처음보다는 조금 친해졌다. 그리고 노사정위원회 공동연구단이 발족하고 해외 조사가 결정되자 최용석은 그렉에게 연락했고, 연구단은 호주를 가게 된 것이었다.


그렉은 최용석을 보자 반갑게 팔을 벌려 덥석 포옹했다.

“먼 길을 잘 왔네. 호주에 온 소감은 어떤가?”

“어. 뉴질랜드에서 며칠 있다가 호주로 넘어온 지 3일 됐네. 한국과 계절이 반대라서 좀 이상하지만 모든 게 편안해.”

“연구단에 대해서는 전에 말해 준 대로 이해하는데, 지금까지 상황이 어떻지? 한국 정부가 정책 결정은 언제 하는 거지?”

그렉은 몹시 궁금한 표정으로 계속 물었다. 사실 궁금한 것이 당연했다. 세계적으로 전력산업이 쪼개지고 민영화되는 상황에서 한국과 같이 산업이 발전한 나라의 향방은 다른 여러 나라들에게는 참고 또는 롤 모델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음.... 지금까지 나쁘지 않아. 다 알다시피 이미 여러 나라에서 시장이 실패했고 또 정책 변화도 있잖아. 전체적으로 우리 주장과 논리가 더 설득력이 있지. 하지만 최종적으로 판단할 정부는 그런 사실을 애써 외면할 수도 있으니 걱정이 되지. 그래서 더 열심히 해야 하고. 당신이 오늘 도와줄 부분도 많아.”

그렉은 마시던 커피잔을 내려놓고 조용히 말했다.

“그런 점이라면 걱정하지 마. 여기 호주에서, 특히 빅토리아 주에서 무슨 일이 생겼는지는 확실하게 말해 줄 테니까.”


최용석은 다른 일행들이 둘의 대화를 멀리서 물끄러미 보며 서 있는 상황을 뒤늦게 이해했다. 둘만의 반가운 재회의 시간을 계속 보낼 수는 없었다. 그렉은 일행을 안내해서 널찍한 원탁 테이블에 앉게 했다. 그리고 먼저 자기소개를 하고 ASU에 대해서도 간단한 안내를 했다.


이어진 약 두 시간의 대담은 부드러운 분위기로 진행됐다. 그렉은 일단 호주 전체 전력산업의 현황에 대해서 설명했다. 호주에서는 원래 각 지자체 별로 독립적인 민간전력회사들이 자연발생적으로 생겼는데, 경제 규모가 커짐에 따라 1950년대에 소형 전력회사들을 통합해서 규모를 키우는 국유화 작업이 먼저 시작됐다고 했다. 그러면서 정부의 규제 형태에 대해서도 설명했는데, 발전부문은 연방정부, 송전부문은 주정부, 그리고 배전과 판매는 지자체가 각각 나눠서 규제하는 복잡한 형태라고 했다. 이는 국토가 넓고 지역별로 자연환경을 비롯한 조건이 다양한 호주의 특성 때문이었다.


호주 정부의 자유화는 특별히 외부의 압력이나 다른 요인이 아니라 호주인들 스스로 전력산업의 환경이 변함에 따라 내린 결정이었다고 그렉은 설명했다. 주로 산업체 등에서 전력회사 선택권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고, 석탄 등 관련 산업의 변화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주별로 자유화의 형태가 달랐는데, 시드니가 속한 뉴사우스웨일즈주(NSW)는 발전과 배전의 경쟁체제는 구축했지만 전력회사 민영화까지 계획하지는 않은 반면, 수력 등을 비롯한 자원이 풍부했던 빅토리아주는 전면적인 자유화화 민영화를 한꺼번에 시작했다는 것이다. 두 주에 비해서 경제 규모가 작고 인구도 적었던 다른 지역들은 규모의 경제를 유지하는 것이 유리했기에 자유화를 설계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NSW와 빅토리아의 자유화 결과는 매우 달랐다. 빅토리아주에서는 당장 급격한 요금 인상이 있었고 정전 사태도 벌어진 것에 비해 국영기업 체제를 유지했던 NSW주에서는 이런 일이 없었다고 했다. 급진적 자유화, 민영화와 점진적 경쟁체제 도입의 차이였던 것이다.


그렉을 설명을 듣던 김창석 교수가 먼저 질문했다.

“지금 설명을 들으면 NSW에서는 공기업이 각각 발전, 송변전, 그리고 배전을 담당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 공기업의 경영 실적은 어떤가요?”

“전체적으로 수익을 잘 내고 있습니다. 적절한 요금으로 전기를 생산하고 공급하며, 규제 아래에서 소비자들에게 전기를 파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 공기업들이 벌어들이는 수익은 거의 정부의 예산으로 들어가서 다른 공공재를 확대하는 데 사용됩니다. 주민들도 대부분 현재의 전력산업 구조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그렉의 대답이었다.


그렉의 설명을 들은 이병호 교수가 물었다.

“내가 이해한 바로는 빅토리아와 NSW가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 같은데요. 당신이 생각하기에 어느 쪽이 더 우월한 시스템인가요?”

“지금 단계에서 어느 쪽이 더 낫다는 말을 단정적으로는 하지 못하겠지만 NSW에서는 빅토리아와 같은 요금 급등이 없었다는 말로 대신 설명하겠습니다.”

그렉의 설명이 끝나자 잠시 침묵이 흘렀다. ASU를 방문하기 전부터 이미 일행은 짐작은 하고 있었다. 노동조합이 섭외한 곳이므로 어떤 말이 나올지를. 연구단의 지난 1차 방문지에서 노조 측 이 섭외한 곳에서는 한결같이 민영화를 포함한 자유화에 강한 반대 의사를 보였다. 사실 상황이 그랬다. 캘리포니아와 온타리오에서 실패가 명백히 생긴 후이니까 자유화 반대론자들의 목소리는 높을 수밖에 없었다. 공동연구단의 양측 교수들은 이제는 더 세밀한 질문을 할 필요를 못 느끼기 시작했다. 정부 측 위원들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런 시장의 실패는 일시적이거나 단기적인 현상이다. 궁극적으로 독점에 비해서 자유경쟁이 옳다는 것이 밝혀질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 연구단이라는 것이 어차피 노사정위원회 내부에 만들어진 것이고, 이는 반발하는 노조를 달래기 위한 하나의 요식행위에 불과하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최종 결정은 결국 정부의 의도대로 배전까지 완전분할하는 것으로 갈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이들과 구조개편이 옳으니 그르니 굳이 다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노조 측 위원들은 달랐다. 이들은 모든 것이 불리하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한국에서는 보통 공무원들이 한 번 결정한 정책이 뒤집어지는 경우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력산업구조개편은 사실 공무원들의 생각이 아니었다. IMF 금융위기 당시 김대중 정부는 국가 자산이라도 매각해서 외환위기를 극복하려 했고, 그 매각 대상에 철도, 전력, 통신 등 당시 정부 산하 공기업이 담당하던 일종의 망 산업들이 모두 포함됐다. 당시 영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는 이런 정부 독점의 네트워크 산업을 사업 영역에 따라 분할하고 하나씩 민간에 매각하는 소위 말하는 개혁이 유행하고 있었다. 막대한 국가 부채를 해결하고 산업 자체를 구조조정하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모두가 믿었다. 신자유주의의 전성기였다.


김명자 교수를 비롯한 노조 측 위원들은 이를 강하게 반대했다. 공기업이 독점하던 산업들은 대부분 국가 경제와 국민들의 일상 생활에서 필수적인 공공재를 다루는 분야였고 거의 모든 정부들은 일종의 포퓰리즘에 빠져 공공요금을 원가 이하로 묶었다. 그러니 당연히 철도, 전력, 통신 등의 산업은 사업을 할수록 적자에 빠지는 구조였다. 그리고 정부는 이를 보전하기 위해 국가재정을 투입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런 공기업의 부채, 그리고 국가의 재정 지원이 잘못됐다는 비난을 받았고, 남미를 시작으로 무지막지한 민영화와 자유화가 이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김대중 정부 역시 이 공식을 충실히 따랐고 이미 철도와 통신은 민영화가 완료됐다. 이제 한전만 남았다.

workers.jpg 호주 전력노동자들의 작업 모습


김대중 정부가 한전의 분할과 민영화를 생각할 때 공무원들은 반대했다. 당시 산업자원부 공무원들은 전기는 다른 재화와 달라서 분할과 민영화가 매우 어렵고, 만약 한 번 시작하면 그 결과를 예측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김대중 정부의 청와대는 불같이 화를 냈고 반대하는 산자부 고위 공무원들의 사표를 요구했다. 공무원들은 일순간 조용해졌다. 이게 그들의 생리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입장을 바꿔 청와대의 명령에 순순히 굴복했다. 1999년 1월에 발표된 전력산업구조개편기본계획이 바로 그 결과였다. 입장을 바꾼 공무원들은 이제 과거를 잊고 충실한 민영화 추종자로 돌변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한 번 결정한 정책은 끝까지 완수하겠다는 것이 대한민국 공무원들의 충성스러운 자세이다. 노조 따위가, 시민단체 정도가 반대한다는 것은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이런 사정을 이해했기에 김명자 교수와 안현필 교수는 이번 연구단에 합류하기는 했지만 정부를 상대로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없었다. 그저 최대한 노력해 보자 이런 각오였다. 매일 일정이 끝나면 그들은 최용석과 한전의 이강산 실장과 함께 모였다. 밤이 늦도록 오늘의 면담 결과를 정리하고 내일의 계획을 논의했다. 그들은 그렇게 치열했다.


ASU와의 면담이 끝나고 최용석은 이근석 단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그렉과 함께 그날 오후 열리기로 했던 ASU 지역 모임에 참석했다. 연구단이 그렉을 만나자고 했던 날이 마침 ASU의 시드니 지역 회의가 예정됐던 날이었다. ASU는 말 그대로 공공서비스 전반에 걸친 조직이었다. 시청 소속의 청소 노동자, 항구의 항만 노동자, 전력, 가스, 전기 등등 다양한 업종에 걸친 노동자가 모인 조직이었다. 오페라 하우스가 멀찍이 보이는 야외 회의장에 약 200여 명의 ASU의 시드니 지역 대표자들이 모여 있었다. 김명자 교수도 일행에서 벗어나 최용석과 함께 회합에 참여했다. 먼저 그렉이 단상에 올라 뭐라 한참 연설을 하는데, 자세히 들으니 한국에서 온 공동연구단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최용석을 단상으로 불렀다. 그리고 소위 말하는 연대의 연설을 하라는 것이었다. 준비된 말도 없고 원고도 없는 상태에서 잠시 당황했지만 최용석은 연구단의 성격, 목적 등을 장황하게 설명했다. 역시 미리 준비하지 않은 상태여서 무리가 됐다. 어느 순간 말이 꼬이고 어떻게 마무리를 해야 할지를 걱정하며 연설을 마쳤다. 청중들은 조용했다. 뭔가 제대로 전달이 안 된 것 같았다. 이마에서는 땀이 흘렀고 속으로 낭패였음을 되씹으며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깊은 후회를 했다. 모국어도 아닌 영어로 준비도 하지 않고 연설을 하다니.


깊은 반성의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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