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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산업 민영화, 그 뒷이야기 29

만리장성의 문을 열다, 중국식 구조개편과 전력산업의 변화

by 요아킴


설 명절이 연구단 활동 기간의 중간에 끼었다. 호주에서 돌아온 일행은 모처럼의 휴식을 했다. 1월 첫 번째 주부터 시작해서 지구를 동서로 남북으로 날아다니는 참으로 특이한 일정이었다. 처음 노사정위원회에서 협의할 때만 해도 이렇게 일이 커질 줄은 몰랐다. 전력이라는 생소한 분야에 처음 발을 들인 교수들은 해외에서의 자유화 상황이 궁금할 뿐 세계 곳곳을 돌아다닐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근석 교수가 아이디어를 냈다. 떡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해외의 상황을 직접 눈으로 보고 확인하자고 했다. 정부 역시 이에 반대할 특별한 이유가 없었다. 세계 여러 나라의 실제 상황을 조사한다는 명분은 모두를 만족시켰다. 물론 모든 비용은 이미 도마에 올라 처분만 기다리는 한전이 내는 조건이었다.


공동연구단의 합의에 따라 정부가 자유화의 좋은 사례로 생각되는 방문 기관을 섭외하기로 했고, 역시 그 일은 한전에게 떨어졌다. 그리고 민영화와 자유화의 실패나 문제점이 있는 곳은 노조에서 추천하자는 약속이 맺어졌다. 그 몫은 불과 1년 정도의 노동조합의 국제활동 경험이 있던 최용석에게 주어졌다. 다급한 대로 명함첩을 뒤져서 그동안 만났던 에너지와 전기 쪽 노동조합으로 무조건 메일을 날렸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불안했다. 아무도 답장을 해 오지 않으면 어떻게 할까, 그리고 말로만 듣던 자유화 실패 사례를 제대로 찾지 못하면 어떻게 할까라는 불안이 밀려왔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답장들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답장을 보내온 사람은 유럽의 공공노조인 EPSU의 국제담당자였다. 그는 상황을 물었고 최용석의 설명을 들은 후 영국 그리니치 대학의 스티브 토마스를 추천했다. 토마스와의 첫 인연이었다. 미국에서는 전력노조인 IBEW에서 환영의 뜻을 밝히면서 연구단의 방문을 기다리겠다고 했다. 역시 미국의 다른 전력노조인 UWUA에서는 캘리포니아의 칼 우드를 소개했다. 그리고 우연히 인터넷에서 이름을 알게 돼서 연락해 본 소비자단체 퍼블릭 시티즌에서도 연구단을 기다리겠다고 했다. 이때 연락을 주고받은 친구가 타이슨 슬러컴이었다. 이런 식이었다. 일본이나 중국의 전력회사와 관련 기관은 한전의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연락은 국제회의에서 한 두 번 만났던 사람과 주고받은 명함의 연락처를 통해 연락을 했고 거의 대부분 최용석의 연락을 환영했다. 누군가의 도움의 손길이 내려오듯이 관련 기관 섭외가 너무 쉽게 이뤄졌다. 반대로 한전이 정부 대신 연락하던 기관들은 쉽게 섭외가 되지 않았다. 이미 시장화와 자유화의 실패가 많았기에 이를 옹호하는 개인이나 기관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공동연구단이 북경에 도착한 날짜는 2004년 2월 24일이었다. 북경의 날씨는 겨울의 끝자락인데도 추웠다. 중국은 공산당의 1당 국가였고, 거의 모든 기관이 정부 소유였으며, 심지어 노동조합 격인 공회 역시 당의 통제 아래 있었기에 최용석으로서는 연락할 곳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한전의 북경지사를 통해 이와 유사한 기관들 섭외할 수밖에 없었다. 서울에서 거리도 가깝기에 중국 일정은 2박 3일로 잡았다. 첫날 여장을 푼 후 다음날 오후 찾아간 기관은 중국 정부의 경제와 산업 정책을 설계하는 국가개혁위원회(NDRC) 산하의 경제경영발전연구소였다. NDRC는 중국의 개혁개방정책을 상징하는 기관으로, 시장경제로의 전환을 이끄는 중국 정부의 핵심 정부기관이며, 경제경영발전연구소는 이 조직의 정책설계를 담당하고 있었다.


NDRC.jpg 중국국가개발개혁위원회 심벌


북경 중심부에 위치한 경제경영발전연구소 회의실에서 연구소 부소장인 가오 박사와 미국 측 고문이던 리차드 코와트와 프레드릭 웨스턴이 연구단 일행을 맞이했다. 가오 부소장은 우선 중국의 전력산업 개편 계획을 자세한 자료를 보여주며 설명했다. 중국의 정책연구소에 미국인 고문이 있다는 사실이 특이했다. 당시 중국은 WTO 체제에 편입된 지 그리 오랜 세월이 지나지 않은 상태로, 중국을 국제무대로 이끈 미국과의 관계가 긴밀하던 시기였다. 사실 미국은 과거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중국과 매우 가깝게 지냈고, 1990년대를 이어 2000년대 중반까지 양국은 친구와 같은 관계를 유지했다. 가오 부소장은 중국의 전력산업 개혁이 1997년부터 시작됐는데, 가장 큰 이유는 급속한 경제성장에 맞춰 전력산업의 투자를 촉진하고 산업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서였다고 했다. 1997년 이전에는 중앙 정부의 에너지성이 모든 전력 관련 산업을 독점했지만, 1997년 1월, 전력분야를 공기업 형태로 독립시키면서부터 규제 개혁이 시작됐다고 했다. 크게 전국을 두 개 권역으로 나눠서 국가전망공사와 남방전망공사로 분리, 송전망을 독립시켰고, 발전부문은 각 성 단위의 독립 공기업으로 분리하고 일정한 수준으로 시장화를 했다. 이 과정에서 규제기관으로는 국가전력규제위원회(SERC)를 설립해서 전력산업의 모든 규제를 한다고 했다. 이는 중국과 유사한 연방제 체제의 미국식 모델을 도입한 것으로 보였다. 결론적으로 중국식 구조개편의 핵심은 지방분권화, 독립화, 그리고 시장화로 요약할 수 있었다.


질의 시간이 되자 평소 중국에 대한 자료가 부족했던 연구단 교수들의 질의가 쏟아졌다. 안현필 교수와 김창석 교수는 NDRC의 기능과 역할에 관해 물었는데, 특히 중앙정부와의 관계를 궁금해했다. 가오 부소장은 NDRC가 독립된 위원회 형태의 기관이기는 하지만, 중앙정부의 일부로 보는 것이 맞다고 했다. NDRC는 중국공산당 산하의 중앙정부 아래에 놓인 조직으로, 당과 정부가 결정하는 방향으로 국가발전계획을 세운다는 말이었다. 결국 중국은 아직 일당독재 국가임이 분명했다.


이어진 질문과 답변에서 발전시장이 개방돼 있다는 뜻에 대한 질문이 있었고,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날카롭게 생긴 백인 웨스턴 고문은, 중국에서는 이제 막 발전시장이 공개된 상태이며 발전소는 중국의 민간인, 정부, 그리고 심지어 외국자본까지 투자를 하고 있다고 했다. 생각보다 개방의 폭이 커 보였다. 하지만, 도매시장이 열려 있기는 하지만 과거에 비해 전기요금이 낮아지거나 하는 눈에 띄는 성과는 아직 없다는 것이 웨스턴의 설명이었다. 놀라운 사실은 발전소 투자이윤(ROR)이 15%나 된다는 점이었다. 시장과 투자 활성화를 위해서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중국 정부가 발전소의 충분한 이익을 보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중국은 발전과 도매가격은 중앙정부, 즉, SERC가 규제하고 있었지만 소비자에게 부과하는 소매요금은 지방의 각 성 정부가 규제했다. 시장에 의한 자유로운 입찰가격은 아예 없었다.


공동연구단 일행은 그동안 중국에 대해 궁금했던 내용을 자세히 물었다. 결론적으로 중국은 국가의 강력한 통제 아래에서도 부분적으로 시장화를 진행하고 있었다. 이 자유화의 궁극적인 목표는 급증하는 전력수요를 충당하기 위한 투자를 늘리자는데 있었다. 중앙정부의 능력만으로는 발전소와 송전선로 건설이 벅차기에 일부를 개방함으로써 외국을 비롯한 민간의 투자를 받겠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민간 영역이 그리 크지 못했고, 경제의 거의 대부분을 국영 체제로 운영하는 사회주의 경제 시스템의 한계를 아직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었다. 반대로 국가가 직간접적으로 국영기업을 통해 막대한 자금을 지원하는 기존 시스템에도 장점은 있었다. 국영기업들은 이윤을 쫓기보다 정부의 정책 목표를 충실히 수행하면 됐기 때문에 과감한 투자도 가능했다. 중국의 전력산업은 기존 계획경제와 시장경쟁 사이에 있었다. 물론 정부의 영향력은 그 어떤 힘보다 막강한 것이 전환기 중국 전력산업의 모습이었다.


다음 날인 2월 26일에 연구단은 중국에서 가장 거대한 전력회사인 국가전망공사(State Grid)를 방문했다. 국가전망공사는 이름 그대로 원래 중국대륙 전체의 송전선로를 건설하고 운영하는 엄청난 규모의 전력기업이었다. 하지만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불어닥친 자유화의 바람에 따라 중국 정부는 국가의 전력망을 남북으로 분리했다. 중국 남부지방을 담당하는 남방전망공사를 국가전망공사에서 분리해서 광둥성, 광시좡족자치구, 윈난성, 구이저우성, 하이난성과 홍콩, 마카오와 동남아시아 일부 지역에까지 전력을 송전하게 했다. 따라서 중국의 전력산업은 각 성별로 나눠진 발전회사와 전국의 송변전 사업을 담당하는 국가전망과 남방전망으로 크게 구성됐다. 국가전망과 남방전망 산하에는 각 성별로 전력망 자회사가 또 있었다. 중국이 정부가 직접 관장하던 전력망 회사를 지역별로 나누기 시작한 것이 중국 전력산업 자유화의 핵심이었다. 공동연구단을 맞이한 사람은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퀴 지안 계획주석이었다. 우리나라로 치면 기획부사장 정도의 지위로 보였다. 백발이 인상적이던 퀴 수석은 국가전망공사의 현황과 중국 각 지역의 전력망 회사의 현황을 일단 설명했다. 설명 이후 연구단의 질의와 퀴 주석의 답변이 이어졌다.


국가전망.jpg 중국국가전망공사


이근석 단장이 먼저 질문했다.

“지금 발표하신 내용을 보면 일단 중국에는 국가전망과 남방전망이라는 큰 두 송전회사가 있어 보입니다. 그리고 그 산하의 성 단위의 전력망 회사가 또 5개가 있는데, 이들 사이의 관계는 어떻게 되나요?”

“중국의 사업 단위는 중앙정부, 지역 전력망회사, 성 정부의 3단계로 구성됩니다. 중앙 정부는 SERC이고 지역 단위는 국가전망과 남방전망이고 성 단위는 그 아래의 5개 회사로 보면 됩니다. 모두가 정부가 소유한 형태로 보시면 됩니다. 민간기업은 소규모 발전소가 새로 생기고 있지만 전력산업 거의 대부분은 중앙 또는 성 단위의 정부 소유입니다.”

“그럼 중국의 자유화는 아직 민영화는 아니네요? 기본적인 목표가 민영화입니까, 아니면 효율 향상을 위한 자유화입니까?”

이병호 교수의 질문이었다.

“민영화 계획은 없습니다. 중국은 시장경제로 전환 중이지만, 기본적으로 주요 기업은 아직 정부 소유입니다. 전력시장 자유화는 효율을 높이기 위한 정책이며, 소유권을 민간에 넘길 생각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중국 전력산업 자유화는 무엇을 추구하나요? 자유시장을 도입하려는 가장 기본적인 이유하 있지 않습니까”

안현필 교수가 물었다.

책상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마시고 퀴 주석은 미소를 띠면서 대답했다.

“기본적으로 전력설비가 너무 노후됐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쟁체제를 도입하면서 외부의 투자를 유인해서 설비 투자를 늘린다는 것이 제일 중요한 목적입니다. 지도를 놓고 보세요. 중국 땅은 거대합니다. 특히 새로 건설하는 풍력이나 태양광 같은 재생에너지는 주로 내륙에 몰리는데, 전기 수요는 동쪽 해안의 공업지대에서 늘어납니다. 이를 연결하는 전력망에 대규모 투자를 해야 합니다. 여기에는 많은 투자가 필요합니다. 이것이 자유화의 가장 중요한 목표입니다.”

이후 여러 위원들이 중국의 미래에 대해서 물었다. 질의 응답의 대부분은 비슷했다. 즉, 중국은 시장경제로 연착륙을 원하고 있고, 과거 공산당의 중앙집중적인 경제정책을 유연하게 바꾸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 과정은 매우 길고 인내가 필요한 과정이었다. 전력산업은 세계의 공장으로 급성장하는 중국 제조업을 뒷받침하는 핵심 인프라인데, 투자가 크게 부족하다고 했다. 그래서 조금씩 시장을 도입하면서 효율을 높이고 그 과정에서 다양한 자본투자를 원한다고 했다. 하지만 전력산업 전체의 규제와 통제를 완전히 풀 생각은 없다고 했다. 발전소와 판매회사는 각 성에서 관리하는데, 이 역시 정부 소유이며 민영화 계획은 없었다. 우리가 잘 몰랐던 중국 전력산업의 본모습이었다.


이틀간의 북경 방문을 마치고 일행은 수도공항에서 다시 비행기에 올랐다. 연구단의 순회 방문 일정의 마지막 나라, 바로 일본이었다. 일본은 우리나라와 여러 면에서 매유 유사한 산업 구조를 가진 나라였다. 부존자원도 부족하고 전력계통망이 고립되는 등 비슷한 점이 많았다. 일본에 대한 관심과 기대는 그래서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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