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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산업민영화, 그 뒷 이야기 30

일본식 개혁과 동아시아의 연대

by 요아킴

일본에는 당시 10개의 민영전력회사가 지역별로 발전에서부터 판매에 이르기까지 전력산업을 분할해서 독점하고 있었다. 가장 규모가 컸던 회사는 수도 도쿄를 중심으로 전력을 생산하고 판매하던 도쿄전력이었고 그 뒤로 오사카 지역의 간사이 전력, 추부 전력 등 외딴 섬인 오키나와의 전기를 책임지던 오키나와 전력까지 모두 10개가 지역 독점을 하고 있었다. 이런 독점적인 전력산업을 해체하고 경쟁체제로 바꾸라는 외부의 압력은 주로 유럽과 미국에서 왔다. 그리고 당시 일본의 전기요금은 세계적으로 비쌌고 산업계에서는 외국의 전력시장 자유화로 인한 전기요금 인하를 일본에서도 도입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매사에 신중한 일본인들은 남들이 한다고 무작정 자유화를 따라할 생각이 없었다. 특히, 10개 전력회사와 이들을 관리감독하던 경제산업성은 자유화 자체에 부정적이었다.


일본 전력산업계가 자유화와 시장경쟁을 반대한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전기는 물리적으로 자유경쟁이 불가능한 독점 서비스라는 논리였다. 이는 전기는 자연독점이 불가피하다는 주장으로, 일단 전기를 대체할 대체재가 없고, 경쟁시장이 붕괴하면 회복 불가능한 파국적인 결과가 온다는 기존의 시각과 일치했다. 하지만 안팎에서 불어오던 자유화를 더이상 거부할 명분이 약해지자, 일본 정부는 마지못해 부분적으로라도 전력산업을 자유화하겠다고 선언했다. 소위 말하던 “일본식 개혁”이었다.


일본식 개혁의 핵심은 지역별 독점회사 체제를 허물지 않고 소매와 발전 부문을 개방해서 누구나 발전소를 세우거나 소매 전력회사를 차려 전력시장에 참여하는 길을 열어주는 방식이었다. 예를 들어 도쿄전력이 발전소와 송배전 선로, 그리고 판매까지 독점하는 도쿄의 소비자가 멀리 떨어진 오사카의 간사이 전력회사와 전기수급 계약을 맺고 전기를 살 수 있도록 하는 그런 제도를 허용한 것이다. 이때 그 고객이 사용하는 전기는 실제로 도쿄전력의 발전소에서 생산한 전기이고, 공급하는 송배전 선로 역시 도쿄전력의 설비였지만, 고객은 간사이전력에게 전기요금을 내고 이후 두 회사가 상호 정산하는 그런 방식의 거래를 시작했다. 미국과 영국 등의 급진적인 자유화를 거부하던 일본 정부도 세계적으로 자유화가 몰아치고 특히 세계은행을 비롯한 국제 금융기관들이 구조개편을 강력하게 요구함에 따라 가장 보수적인 방식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공동연구단 일행은 2월27일 아침에 일본의 전력산업을 담당하던 경제산업성을 방문했다. 널찍한 회의실에는 경제산업성의 가와모토 아키라 산업구조과장과 이와노 히로시 전력유통대책실장이 일행들을 맞이했다. 두 사람 모두 전형적인 일본 관료의 모습을 하고 있던 40대 중후반의 사내들이었는데, 평범하면서도 가와모토 과장은 은테 안경의 날카로운 인상의 마른 체형이었지만, 이와노 실장은 펑퍼짐하게 둥근 얼굴의 덩치가 꽤 큰 푸근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가와모토 과장은 일행들에게 “일본식 전력산업구조개편”에 대해 프레젠테이션했다.

일본사람들은 유난히 “일본식” 표현을 자주 사용했다.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이외에는 외세의 지배를 거의 받지 않았던 자부심에서 그런지, 아니면 유난히 보수적인 집단주의 문화 때문에 자기들만의 고유성을 지킨다는 것을 나타내려고 그런지는 몰라도, 자신들은 남들과 좀 다르다는 그런 주장이 숨어 있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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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자유화 역시 마찬가지였다. 영미를 중심으로 세계는 전력시장에 의한 강제적 전력거래 모델을 추종할 때, 자신들은 매우 제한적이고 안정적인 수준에서 전력의 부분적 자유화만 추진한다는 그런 설명이었다. 가와모토 과장의 발표 내용도 바로 그랬다. 일본식 개혁의 가장 큰 이유는 한 마디로 말해서 전기는 다른 상품이나 서비스와는 다르다는 것이었다. 저장이 안 되고, 대체품이 없으며, 수요탄력성이 거의 없기에 전기는 시장거래 자체가 원리 없어야 한다는 가장 보편적 논리였다.


발표 후 질의 응답 순서에서 김명자 교수가 제일 먼저 질문했다.

“제가 이해하기에는 일본식 자유화는 시장거래를 통한 경쟁보다 전력산업의 안정성을 추구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좋은 질문입니다. 일본이 생각하는 개혁의 목표는 효율성 향상인 동시에 안정성 확보입니다. 서구의 급진적 시장화 보다는 일본의 특성에 맞는 개혁을 하는 겁니다. 사실 일본은 1995년부터 일종의 제도개선을 통해 전력산업 개혁을 진행하고 있으며, 두 차례 전기요금을 낮추는 긍정적인 결실을 맺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독점을 조금씩 허물면서도 이를 점진적으로 천천히 하는 것이 일본식 개혁입니다.”

이와노 국장의 대답이었다.


신중진 교수와 이병호 교수가 차례로 질문했다. 두 사람의 질문은 대동소이했다. 신 교수는 지역독점 회사가 전국을 나눈 상태에서 어떤 방식으로 경쟁이 가능한가를 물었고, 이 교수는 과연 이런 제한적인 경쟁이 효과가 있는지가 궁금했다.


이에 대한 답변도 이와노 실장이 했다.

“쉽게 설명하자면, 현재의 지역독점은 유지하면서 다른 곳의 전력회사로부터 전기를 사는 길을 터 주는 겁니다. 우선 공공기관부터 허용을 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도쿄도청입니다. 도쿄도청은 당연히 도쿄전력에서 전기를 공급받았습니다만, 이번 자유화를 통해 오사카의 간사이전력과 전력거래를 했습니다. 실질적으로는 도쿄전력의 전력망으로 도쿄전력의 발전소에서 생산된 전기를 공급받지만, 이 계약의 주체는 간사이전력입니다. 즉, 도쿄도청은 전기요금을 간사이전력에 납부하고, 간사이전력이 다시 도쿄전력에게 도쿄도청이 사용한 만큼의 전기요금을 내는 겁니다. 이런 방식으로 전기를 거래하면 서로 상대방 지역의 소비자를 확보하기 위해 전기요금을 낮추는 노력을 기울이게 되고, 이것이 효율성을 높이는 방법입니다. 물론, 오사카에 사는 소비자도 원할 경우 도쿄전력과 계약을 하고 오사카전력에게 전기요금을 낼 수도 있고요.”


처음 듣는 사람에게는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을 내용이지만, 이것이 일본식 전력자유화의 핵심 내용이었다. 일본 열도의 북쪽부터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홋카이도전력(北海島電力), 도호쿠전력(東北電力), 도쿄전력(東京電力), 츄부전력(中部電力), 호쿠리쿠전력(北陸電力), 간사이전력(關西電力), 주코쿠전력(中國電力), 시코구전력(十國電力), 큐수전력(九州電力), 그리고 오키나와전력(沖縄電力) 등 모두 10개 전력회사가 지역의 발전부터 판매까지 모두 독점했다. 이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군이 일본 정부가 직접 운영하던 전력회사들을 강제로 쪼개서 민영화한 민간전력회사들이었다.


일본 전력산업에서 가장 특이한 점은 한 나라에 두 가지 전기 주파수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도쿄전력과 도호구전력, 그리고 홋카이도전력은 50헤르츠를 사용하고, 서쪽의 나머지 전력회사들은 60헤르츠 전기를 생산한다. 이는 전력산업을 시작할 때 도쿄지역은 독일 지멘스산 발전기를 수입했고, 오사카 등 서쪽은 미국 GE산 발전기를 들여오면서 생긴 어이없는 일 때문이었다. 주파수란 화력발전기가 1초에 회전하는 숫자를 말하는데, 전기에서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아무튼 동서로 주파수가 달라서 간사이전력이 생산한 전기를 도쿄에서는 사용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다만 동서 양쪽의 전기를 조금씩 보내기 위핸 주파수변환소가 있기는 하지만 이 변환소를 통해 보낼 수 있는 전기의 양은 얼마 안 된다. 따라서, 일본은 한 나라 안에서도 물리적으로 전기를 자유롭게 주고받기 어려운 구조였다. OECD나 세계은행이 일본 정부를 압박해서 전력시장 개방을 요구했지만, 일본정부는 이런 전력산업의 구조와 공급안정성 등의 이유로 매우 제한적인 전력자유화를 했다. 지역독점은 그대로 유지하고 단지 계약상으로만 소비자에게 전력회사 선택권을 주는 이런 방식을 일본에서는 휠링(Wheeling)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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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개방된 전력시장에 신규 전기사업자를 허용하지는 않았나요? 기존의 전력회사가 아닌 독립적인 사업자를 허용했다고 들었습니다.”

안현필 교수의 질문이었다.


“예, 맞습니다. 일종의 독립전기사업자를 허용했습니다. 이들을 PPS, 즉 Power Producer and Supplier라고 부릅니다. PPS에는 두 가지 모델이 있습니다. 오사카의 소비자가 도쿄전력의 전기를 사게 되면, 이 경우 오사카의 전력회사인 간사이전력은 유틸리티가 되고 도쿄전력은 PPS가 됩니다. 지금 휠링이 허용됐기 때문에 이게 대표적인 PPS의 사례입니다. 두 번째 경우는 아예 민간사업자가 독자적인 발전소를 건설하고 전기를 전력회사 또는 일반 소비자에게 파는 길도 열려 있습니다. 이들 역시 PPS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PPS는 신규 사업자이기 때문에 지역 독점의 유틸리티 보다 전기요금을 싸게 책정한다는 점입니다. 기존의 전력회사에서 소비자를 유인하려면 그렇게 해야 하겠지요.”


가와모토 과장의 대답이었다. 이를 흥미롭게 듣고 있던 이병호 교수가 가와모토 과장을 처다보며 물었다.

“그렇다면 현재까지 타 지역의 전력회사나 PPS로 이동한 고객의 비율은 어떻게 됩니까?”


이와노 국장이 끼어들면서 대답했다.

“현재 모든 고객이 다 전력회사 선택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전체 고객의 약 30% 미만에게만 허용합니다. 계약전력의 크기에 따라서 단계적으로 확대합니다. 전력회사 선택권이 보장된 고객은 계약전력 1만 kW 이상 고객들입니다. 이 고객들 중에서 2% 정도가 PPS를 선택한 것으로 보입니다.”


“아까 발표에서 OECD나 세계은행이 일본정부에게 시장 자유화를 요구한다는데, 만약 이들의 권고를 듣지 않고 이런 제한적인 일본식 시장개방만 하면 문제가 없을까요?”

신중진 교수의 질문이었다.


마치 올 질문이 왔다는 듯이 이와노 실장이 연구단 일행을 차례로 돌아보면서 대답했다.

“다들 아시다시피 전력산업은 특수합니다. 일본은 섬나라이며 외부와 전력망이 차단돼 있습니다. 안정성이 제일 중요한데 미국과 같은 방식의 자유화를 했다가 그 안정성이 무너지면 되돌릴 수가 없습니다. 일본은 일본의 현실에 맞는 방식으로 전력시장을 개혁합니다.”


바로 이것이었다. 최용석과 김명자, 그리고 안현필 교수가 기다리던 답이었다. 각 나라는 자신에게 맞는 방식을 택해야 한다. 유럽이나 미국, 그리고 영국은 각자 사정이 다르다. 한국과 일본은 고립된 곳이다. 전력망이 한 번 붕괴하면 파멸이다. 전기를 수입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나라들은 급진적 자유화를 쫓다가 파국으로 갈 수도 있다. 일본 공무원의 답변에 강한 동지애를 느꼈다. 사실 한국, 일본, 대만 세 나라의 전력회사들은 옛날부터 동지적 관계를 맺고 있었다. 냉전시절까지 아시아에서 공산권과 대립하던 최전선의 세 나라는 당연히 미국의 강력한 동맹국이라는 공통점이 있었기에 사로 간의 연대감은 강했다. 한국의 한전과 일본 10개 민간전력회사의 연합체인 일본전기사업연합회(FEPC), 그리고 대만의 대만전력공사는 서로 상대를 방문하며 인적, 물적 교류를 하고 있었다. 회사 뿐만 아니라 세 나라의 전력노동조합들도 끈끈한 유대관계를 형성했다. 세 나라의 공통점은 많았다. 일단 전력망이 다른 나라와 연결되지 않은 채 고립됐고 중국, 소련, 북한이라는 공산권과 대립한다는 정치적 환경도 서로 비슷했다.


한국, 일본, 대만 전력회사들의 연대는 영미식 자유주의에 의한 전력산업 자유화에 대한 대응에서도 서로 비슷했다. 사실 아시아권은 정부의 강력한 개입과 규제 아래에서 전력산업을 국가 또는 국가를 대신하는 공기업이 독점으로 유지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일종의 공감대가 있었다. 이들에게 전기는 일반 상품이나 서비스처럼 거래하는 존재가 아니라 국가 경제의 토대가 되는 공공서비스였다. 따라서, 영미권을 중심으로 전력산업 자유화와 민영화가 진행돼도 이는 아시아의 정서에 맞지 않다는 입장이었다. 일본은 선진국의 일원으로 OECD 등 외부의 전력산업 자유화 요구를 피할 수는 없었지만 전력산업의 특성에 맞는 보수적 입장에서 아주 제한적으로만 자유화를 일본식이라는 이름으로 보수적으로 추진하고 있었다. 이는 일본과 여러 면에서 비슷했던 우리에게도 큰 힘이 됐다. 당시 한국, 일본, 대만은 암묵적으로 서로 영미식 자유주의에 맞선다는 뜻을 나누고 있었다. 일본 방문의 결과는 이것을 확인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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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날 오후, 일본 최대 전력회사인 도쿄전력을 방문했다. 도쿄전력에서는 가스토시 부사장을 비롯한 10명의 임직원이 대규모로 연구단 일행을 맞이했다. 카스토시 부사장은 직접 프레젠테이션을 통해서 일본의 전력산업 현황과 해외 구조개편의 주요 흐름 등을 설명하고, 앞서 경제산업성에 말했던 일본식 구조개편과 개혁의 입장을 밝혔다. 결론은 전력산업은 발전에서부터 송변전, 그리고 배전과 판매에 이르기까지 일관체제, 즉 지역별 독점체제가 제일 우월하다는 것이었다. 물론 산업의 발전을 위해 발전과 판매 부문에 시장을 개방하는 것에는 찬성한다는 입장이었다. 이후 질의 응답 과정에서도 도쿄전력은 일본적 특성을 강조하며, 한국 정부의 자유화에 대한 우려를 당부했다. 여기에서도 최용석을 비롯한 노조측 위원들은 도쿄전력의 입장을 마음 속으로 적극 지지했다. 일본 방문은 이렇에 마무리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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