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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산업 민영화, 그 뒷 이야기 31

해외 실사의 마무리와 보고서

by 요아킴


일본 출장을 끝으로 공동연구단의 해외 현장 조사의 모든 일정은 마무리됐다. 2004년 1월 초부터 3월 중순까지 약 석 달이 걸린 일정이었다. 방문한 나라의 숫자는 9개였고 기관은 모두 24개였다. 정부 기관이 8개였고 연구소가 3곳, 전력회사가 6개, 노동조합과 시민단체가 6개, 그리고 컨설팅 기업이 두 군데였다. 짧은 준비기간과 활동기간에 비해 상당히 다양한 기관들을 방문했다. 연구단의 해외 실사는 원래 노사정위원회의 공공부문개혁특별위원회가 생길 때는 계획에 없었다. 하지만 이근석 단장이 국내에서의 조사활동 중에 긴급히 요청해서 이뤄진 일정이었다. 그리고 사실 이 해외 실사에 결정적으로 연구단의 최종 결론을 좌우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유는 단순했다. 국내에서의 문헌연구, 관련자 면접, 토론회 등으로는 배전분할을 위시한 전력산업의 민영화를 전제로 했던 전면 자유화에 대한 찬반 의견만 대립했을 뿐 뾰족한 결론을 내리기 어려웠다. 하지만 노조 측 위원들은 무슨 방법을 쓰더라도 민영화의 길을 막을 생각이었는데 반면 정부 측 위원들은 공동연구단의 이 모든 활동이 일종의 통과의례에 불과하고 결국 정부의 뜻대로 민영화는 진행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해외에서의 연구활동에서 모든 것이 뒤바뀌었다.


해외 실사 출발 단계에서부터 노조 측 위원들은 절박한 마음이었다. 그들 역시 해외 실사 자체가 정부가 이미 결심한 배전분할과 소매경쟁, 그리고 궁극적으로 전체 전력산업의 민영화라는 대세를 뒤집을 수 없다고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마음으로 혹시 해외에서 뭔가 반전의 기회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했다. 반대로 정부 측 위원들은 별 생각이 없었다. 정부는 이미 단계적으로 한전이라는 큰 괴물을 조각내서 시장에 내맡기기로 결정했고, 이는 이미 십여 년 전부터 세계적으로 진행돼 온 추세였으며, 노사정위원회에서의 이 쓸데없는 위원회는 여론을 달래는 하나의 과정으로 생각했다. 그들은 가벼운 마음으로 해외 출장을 즐길 생각이었다.


첫 방문지였던 미국에서 일이 좀 이상하게 돌아갔다. 미국판 전기연구소라 할 에프리에서 연구자들이 딴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결론적으로 전력산업 자유화는 위험하며, 미국은 주별로 선택적으로 이를 추진했지만 경쟁으로 효율성을 높이자는 목표는 달성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특히 그들은 한전은 매우 잘하고 있으며 자유화와 민영화를 할 이유가 없어 보인다는 말까지 했다. 노조 측 위원들은 환호했고 정부 측 위원들은 당황했다.


하지만 정부 측 교수들은 이는 미국에만 특히 캘리포니아에서만 국한된 문제로 판단했다. 그리고 그들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브라질로 넘어가자 상황이 역시 이상했다. 노동자 출신의 룰라가 대통령이 된 이후 주요 권력의 자리는 좌파가 차지하고 있었고 국영 전력회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정부 측은 이 역시 그러려니 했다. 캐나다에서는 공공경제학의 세계적 석학과 논쟁도 있었다. 구조개편과 민영화의 원조 영국에서는 모든 것이 바뀌어 있음을 알게 됐다. 왜 자유화와 민영화를 했는지 자체가 가물가물한 과거였다. 프랑스 사람들은 영국을 비웃고 있었다. 무리한 민영화가 바보짓이었다는 주장이었다. 뉴질랜드는 자유화를 비껴가고 있었고 호주는 참혹한 실패를 보여줬다. 중국과 일본은 영미식 자유화 자체를 거부하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한국 정부의 생각이 잘못된 길로 가고 있음을 확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구단에 참가했던 공무원이나 정부 측 교수들은 결론은 이미 정해져 있다고 믿었다. 2001년의 발전분할, 2004년의 배전분할, 그리고 소매경쟁, 마지막으로 각 발전회사와 배전회사의 단계적 민영화는 이미 정해진 길이었다고 믿었다. 반대로 노조 측 위원들은 분명히 목격했다. 시장화와 민영화를 기본으로 한 자유화는 이미 세계적 흐름에서 잊히고 있음을. 다만 한국 정부가 이를 인정할 것인가만을 의심했다. 사실 속으로는 자신이 없었다. 한국에서 공무원의 결정은 결국 그대로 가는 것이 현실이었다. 공무원들은 한 번도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한 적이 없었다. 단군 이래로 정부와 관리는 항상 옳았고 백성을 지배했다. 물론 국가가 위기에 빠지면 제일 먼저 도망친 자들이 정부와 관리였고 위기를 구한 존재는 백성들이었지만.


긴 여정을 마치고 최용석은 생각했다. 두 달 동안 세계를 돌면서 확인한 것은 그리 새로운 것들이 아니었다. 이미 외국에서는 당연히 벌어지고 있던 사실들이었다. 다만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었다. 불과 2년이 채 안 되는 노조 활동에서 이미 신자유주의적 자유화와 세계화는 저물어 가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자연독점적이고 공공서비스인 전력산업은 정부 또는 정부를 대리하는 공기업이 수행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일종의 신념이 미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나라들이 공통적으로 공유하고 있었다. 미국은 건국 초기 알렉산더 해밀턴과 토머스 제퍼슨의 논쟁 시기부터 정부의 역할에 대한 상반된 견해가 부딪혀왔다. 한마디로 정부가 큰 역할을 해야 한다는 연방주의와 개인의 자유가 더 중요하다는 분리주의의 대립이었고 이것이 폭발한 사건이 바로 남북전쟁이었다. 아무튼 월스트리트의 금융거래를 흉내 냈던 전력자유화는 대실패로 끝나고 있었다. 그런데도 한국 정부는 맹목적으로 그 길로 달리고 있었다.


사농공상의 신분제에 찌든 한국 사회는 노동을 경시해 왔다. 그래서 조선이 망했고 남북이 분단되는 고통을 겪었지만, 솔직히 지금도 노동 경시의 풍조는 여전하다. 그러니 노동자가 뭉친 노동조합을 경멸하는 태도 역시 사회 일반의 현상이다. 자신이 노동자이면서도 노조를 싫어하는 한국 사회. 물론 노조조차 만들지 못하는 사회적 약자가 많기 때문이기는 하지만, 조선 후기의 노론, 그 후손이었던 친일파, 그리고 또 뒤를 이어 독재에 복종하고 강남의 부동산으로 부를 이룬 지배세력들이 그렇게 국민의 의식을 묶었다. 국민이 시민이 못되도록 분열시키고 지배하고 있다. 그러니 노조의 주장에는 귀를 안 기울인다. 전력노조 역시 그랬다. 민영화 반대를 아무리 외쳐도 밥그릇 지키려는 귀족노조라고 욕을 먹었다. 강아지도 자기 밥그릇 지키는데 노동자가 자기 밥그릇 지키는 게 무슨 잘못인지는 모르겠지만, 노조에다 귀족을 가져다 붙이는 기술 역시 황당하다.


노사정위원회.jpg


해외 실사 최종 보고서가 완성됐다. 최용석은 모든 회의를 직접 손으로 기록했고, 귀국 후 이를 정리했다. 노조 측 위원들은 이를 노사정위원회에 제출했고, 정부 측은 뜻밖에도 이를 공식 보고서로 제출하자는 노조 측 의견에 동의했다. 읽어보지도 않았던 것이 분명했다. 이미 노사정위원회의 공동연구 결과는 뻔하다고 생각했으니까. 최용석은 자신의 기록이 공식적인 최종 보고서의 핵심으로 채택되는 모습을 보며 신기했다. 이제 마지막 절차만 남았다. 노사정위원회의 이 보고서를 정부가 채택하는가 하는 마지막 관문이었다. 최용석의 기록을 토대로 만들어진 초안에는 배전분할이 중단돼야 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정부와 정부 측 위원들은 이것도 읽어보지 않았다. 결정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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