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룰 수 없던 합의와 결단
전력산업구조개편 노사정연구단은 노사정위원회의 공공부문개혁특별위원회 산하에 조직된 임시 조직이었다. 이 연구단은 전력산업을 관장하던 산업자원부, 그리고 산자부의 관리감독 아래 전력산업을 독점하던 한국전력공사, 그리고 이 회사의 노동조합이던 전국전력노동조합이 정부, 사용자, 노동자의 자격으로 참여했고, 이 3자가 각각 두 명씩 추천한 연구위원 6명의 위원으로 구성됐다. 노사정 공동연구단은 사회, 경제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는 산업구조조정 등의 상황이 있을 때 노동자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정부-사용자-노조의 3자가 함께 모여 머리를 맞대는 3자 협의체, 즉 Tripartite 기구를 설치하라는 국제노동기구 ILO의 권고에 따라 정부와 노조가 합의해서 만들어 낸 우리나라 최초의 3자 협의체였다.
이 연구단은 2003년 9월부터 활동을 시작했고, 해외실사를 마지막으로 2004년 5월에 활동을 종료했다. 그리고 최종 보고서를 완성했다. 최종보고서에는 국내에서 진행한 전력산업 관련 다양한 문헌연구, 관련자 인터뷰, 토론회, 그리고 해외실사보고서를 모두 들어갔다. 이 방대한 보고서는 국내에서는 이런 형식과 내용으로 처음 만들어진 것으로, 그동안 국가가 독점하는 것이 당연시되던 전력산업의 자유화와 관련된 다양한 내용이 다 포함됐다. 해외실사 부분은 물론 노조이 실무자로 연구단을 따라다녔던 최용석의 작성했다.
공동연구단의 단장 이근석 교수는 정부 측 위원이기는 했지만, 표면적으로는 중립위원이라는 직함을 받았다. 한국 정부는 노사정 구도보다는 한전 분할과 민영화를 노사의 대립 구도로 규정하고, 정부는 이를 중재하는 중립적인 입장이라는 모양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실제로는 분할과 민영화를 주도한 것은 한전이 아니라 정부이었는데도 말이다.
최종 보고서 작성 과정에서 진통이 나오기 시작했다. 표면적으로는 한전 측이지만 실제로는 정부를 대변하던 김창석, 신중린 두 교수와 노조 측의 안현필, 김명자 두 위원 사이에 극명한 의견차이가 나왔기 때문이다. 정부 위원들은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계획대로 한전의 마지막 몸통이던 배전과 송변전도 지역별로 쪼개고 이들도 완전히 민영화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조 측 교수들은 당연히 이를 반대하고, 여러 연구과 토론, 특히 해외실사에서 보듯이 이는 이미 실패한 방향이므로 더 이상의 한전 분할을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대 2의 대립이었고, 결정은 중립적인 위치에 서 있는 것으로 보였던 이근석, 이병호 두 위원의 손에 달려 있었다. 몇 차례의 토론에도 결론은 내려지지 않았다. 연구단은 만장일치 결론을 원했다. 시간이 갈수록 이는 불가능한 목표로 보였다. 연구단은 합숙을 통해 끝장 토론으로 최종 결정을 내리기로 하고 주말을 이용해서 제주도로 장소를 옮겼다. 뭔가 속이 탁 트이는 장소에서 시원한 결정을 원했다.
서귀포의 호텔은 전망 좋기로 유명했다. 두 시간의 첫날 오후 토론에서도 6명의 위원들은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정부와 노조 위원들의 대립은 여전했고 중립위원들은 말을 아끼고 있었다. 안현필 교수는 잠시 머리를 식히기 위해 로비로 나왔다. 5월 말이기는 했지만 제주도는 초여름의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로비를 나와 정원으로 발을 내딛자, 시원한 남풍이 머리칼을 쓸고 지나갔다. 잠시 눈을 감고 깊은 심호흡을 하고 있는데 옆에 누군가가 다가왔다. 문재송 과장이었다. 산자부 전기위원회 실세 과장이던 문 과장은 사실 서울대 경제학과 5년 선배였다. 학창 시절에 알고 지낸 사이는 전혀 아니지만, 남보다는 가깝게 느껴진 사람이었다. 문 과장은 겸손하고 성실한 성품으로 산업부 안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차근차근 승진해서 언젠가는 장관까지 갈 것이라는 주변의 인물평이었다.
“안 교수님, 머리가 아프지요?”
안 교수는 문 과장의 말에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아, 예. 각자 입장 차이가 참 크네요.”
대답과 함께 엷은 미소를 지었다.
“사실, 복잡할수록 간단하게 생각하면 될 것 같아요. 여덟 달 동안 보셨지만, 전력은 더는 국가 독점으로 운영이 어려운 산업입니다. 제도와 방식의 차이와 결과의 차이는 조금씩 있지만, 이미 세계는 다 그 방향으로 가고 있거든요.”
문 과장은 안 교수를 향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안 교수는 미소를 지으며 문 과장을 바라보고 답했다.
“과장님 말씀도 틀리지는 않았지요. 그런데 문제는 나라별로 이를 진행하는가 마는가는 냉정하게 각 나라의 사정에 따라 판단해야 하는데요, 우리는 아직 거기에 안 맞는 것 같아요. 전에 토론토에서 노 교수님이 한 말이 생각나네요. 한전은 민영화할 이유가 없어 보인다고.”
“그건 그분의 생각이고... 의견은 다를 수 있으니까요.”
문 과장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속에서는 그냥 한전 분할에 동의해 주세요, 이미 정부가 결정한 사안이므로 아무리 노조가 추천한 위원이라도 그냥 정부의 뜻에 동의해 주세요 라는 말이 말이 끓고 있었지만 공연히 안 교수를 자극할 것 같아서 말을 아꼈다. 그리고는 많이 순화된 표현으로 속내를 조금 비쳤다.
“저.. 교수님, 교수님이나 김 교수님 생각은 다 이해합니다. 그리고 한전 노조 의견도 충분히 알겠고요. 문제는 이미 정부가 대내외적으로 한전의 완전한 자유화를 선언한 상태인데, 여기에서 계획에 차질이 생기면 많은 문제가 있을 것 같습니다. 노조나 노동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민영화는 적극적으로 추진하지 않으면 양해가 될 것 같지 않습니까? 일단 경쟁체제는 갖추고 노동자들을 충분히 보호하는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면 서로 이해가 되지 않을까요?”
안 교수는 문 과장의 말이 끝난 후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그 역시 최대한 순화된 표현으로 대답했다.
“과장님 말씀은 알겠네요, 무슨 뜻인지. 그런데 자유화가 한 번 시작되면 이게 잘못된 결정이라도 되돌리기가 불가능한데, 많이 신중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알기에 전력노조도 지금 자유화를 반대하는 이유가 단지 자신들의 고용이나 이런 것에 국한된 생각은 아닌 것 같아요. 좀 특이하지요. 전력산업 자체를 걱정하는 그런 우려도 큰 것으로 보입니다. 전력노조는 상당히 전문성이 있습니다. 공부도 많이 하는 것으로 보이고요. 단순히 고용안정 약속 같을 걸로는 노조 설득이 안 될 것 같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짐작했던 대로 서로의 간극이 컸다. 정부는 한 번 결정한 정책을 뒤집기가 거의 불가능한 입장이었고 노조 측 역시 자신들의 신념을 꺾기에는 너무 멀리 와 버렸다. 모두를 만족시킬 중간의 길은 보이지 않았다.
이근석 단장은 불면의 밤이 찾아왔다. 사실 속마음은 이미 기울어 있었다. 자유주의자 입장에서도 전력산업 민영화는 잘못된 길로 보였다. 하지만 이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국가에 의한 산업 독점은 이 단장의 신념과는 맞지 않았다. 경실련을 만드는데 일조했고 활동했던 자신으로서는 개발독재의 그림자가 강하게 드리어 있는 국가의 독점은 바람직한 모델이 아니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전력산업은 좀 달랐다. 수요와 공급이 자유시장에서 맞춰지는 그런 산업도 아니고 무엇보다 화석에너지의 대부분을 수입하는 한국으로서는 섣부른 자유화가 참극을 불러올 수도 있었다. 그걸 깨달았다. 당초 연구단에 추천을 받았을 때는 이 문제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8개월의 경험이 모든 것을 바꿨다. 평생을 살면서 전기의 소중함 같은 것은 느낄 기회가 없었다. 그저 스위치만 올리면 불이 들어오고 노트북이 켜지고 매우 당연한 존재였는데, 이 전기를 만들고 보내는 일이 여러 복잡한 내용들을 품고 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이 단장은 이병호 교수를 잠시 불러냈다. 두 사람은 호텔 로비 구석 자리에 앉았다.
“이 교수님, 어때요? 우리가 어떤 입장을 내야 할까요?”
단도직입적인 이 단장의 질문에 이병호 교수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사회학자로서 세상 일에 관심이 항상 많았는데 전기 문제는 또 다른 신세계였다.
“교수님도 다 보셨잖아요? 자유화, 아니 민영화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교수님 생각이 대충 짐작이 가는데 저도 거의 비슷합니다.”
이병호 교수의 대답에 이 단장이 약간 웃음기를 띄고 되물었다.
“독심술이라도 하시나? 내 속마음을 어떻게 안다고 그래요?”
“단장님이나 저나 전기 문외한이었잖습니까? 근데 여덟 달 동안 전문가가 다 된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되네요. 그리고, 정부가 한 번 잘못 결정하면 되돌릴 수 없지 않습니까? 지금 김 교수나 신 교수는 입장이 확고해 보입니다. 그냥 정부 손을 들어주는 거 아닙니까? 저는 사실 그분들 의견과 다릅니다.”
“입장이 확고한 건 김명자 교수나 안현필 교수도 마찬가지 아니오? 내가 보기에는 네 사람은 타협이 안 됩니다. 만장일치가 제일 좋지만 만약 계속 이렇게 된다면 우리가 나서야 합니다. 어느 쪽이든.”
이 단장은 말을 마치고 잠시 허공을 올려다봤다. 제일 힘든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뭔가 결론을 내야 하고 마음은 대충 정해졌다. 여섯 명이 3대 3으로 갈라지면 안 되기에 이병호 교수의 마음을 확인하고 있었다. 이 교수의 마음도 대충 알게 됐다.
“저는 단장님과 의견을 같이 하겠습니다. 내일 오전에 투표를 하든지요. 더 이상 설득이 안 되면 말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저는 한전의 분할에 반대입니다. 교수님도 그럴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근석 단장은 이병호 교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일어서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제주도의 밤은 깊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