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이 온다, 내 인생이 구석까지 찾아왔다

이병률 시집, 『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를 읽고

by 홍반장

어머나?

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고? 내게? 슬픔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고? 내게? 어떻게 이런 표현을 길어 올릴 수 있을까. 시인의 감각에 그만 홀딱 반하고 말았다. 제목에서 이미 마음의 빗장을 다 풀어주었다는 얘기다.


나는 언제쯤 이런 표현 한 자락 세상 밖으로 건져 올릴 수 있을까.


그런데 말이다. 정말로 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하면 나는 선뜻 나갈 수 있을까? 왠지 뒷걸음질 치며 내 마음이 준비될 때까지 자꾸만 도망갈 것 같다. 이별이, 슬픔이 오늘 좀 보자고 할 때 "그래, 알았다. 나도 할 말이 좀 있다" 하고 당당하게 맞설 재간이 내게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오늘 아침은 유독 조금 슬프다.


바다 방향, 그리고 슬픔의 위치

시인의 말에서....

집이 비어 있으니 며칠 지내다 가란다. 바다는 왼쪽이고, 슬픔은 집 뒤에 있단다. 아휴, 이토록 근사하게 미친 말이 또 있을까. 바다의 방향을 일러주더니 곧바로 슬픔이 집 뒤란에 있다고 툭 던지는 말에 방심했던 내 마음이 '쿵' 하고 내려앉는다. 이런 설렘 가득한 문장을 품고 어찌 시인의 집에 편히 머물 수 있을까. 그저 변죽만 울리다가 울타리 한번 넘겨다보지 못하고 돌아오고 마는 것이지.


<눈물이 온다>

'눈물이 난다'도 아니고 '흐른다'도 아니다. '눈물이 온다'니.

눈이 오고 비가 오는 것처럼 눈물이 온단다. 흐르는 것과 오는 것의 차이. 단어 하나를 슬쩍 바꿔 섞었을 뿐인데, 이 구절만으로 이미 한 편의 시가 완성된다.


<슬픔이라는 구석>

이 생에서는 실컷 슬픔을 상대하고 단 한 줄로 요약해 보리라 다짐하며 시인이 되었건만, 상대는커녕 밀려드는 슬픔을 막지 못해 매번 당하고 마는 마음들. 그 마음들을 무슨 재주로 요약할 수 있을까.


슬픔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


마지막 한 줄의 잔상이 너무 강렬해 다른 구절들은 모두 결 너머로 흘러가 버린다. 시인은 이 한 줄에 영혼을 갈아 넣었나 보다. 슬픔이란 놈은 참 집요한 구석이 있어서 피한다고 피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온전히, 온몸으로 받아내야만 하는 것이었다. 음, 그렇지. 그랬지.


<겹쳐서>

"양말에 구멍이 났다"로 시작하는 시를 읽으며 지난 미국 연수 길을 떠올렸다. 공항에서 내 짐을 들어주던 친구의 구멍 난 양말이 생각나서다. 내 짐 속엔 하필 요플레와 사과 두 알이 들어 있었다. 사과는 무사 통과였으나 요플레는 반입 금지였다.


그것들이 가방에 들어 있는 줄도 몰랐으니 모두 버려야 한다 해도 나는 아무렇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짐을 재검사할 때까지 벗어둔 신발을 받지 못한 내 친구는, 구멍 난 양말을 신은 발을 그대로 방치한 채 많은 사람 앞에 서 있어야 했다. 너무 미안하고 절박해서 내 발로 친구의 발을 살포시 덮어주고 싶던 그 심정. 시인은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오래 있어야 하는 자리였고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양말 구멍으로 내민 살이 꼭 그곳에 있기 싫은 내 얼굴 같았다.”


수치심을 덮기 위해 새 양말을 사서 그 위에 겹쳐 신었다는 시구처럼, 세상에는 속옷을 두 장 입는 사람도, 가면을 겹쳐 쓰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지나가는 바람>

'인생'이라는 말이 참 싫었다. 그런데 오늘 나한테 인생이 찾아왔다. 늘 그래왔듯 열한 시의 정적 속에서 예고도 없이 구석까지 찾아왔다. 좋은 소식인지 안 좋은 소식인지 묻기도 전에 큰 배를 타고 와 엄청난 짐들을 내 앞에 내려놓는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인생'은 참 버거운 단어였고, 내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 사람이 남기는 것은, 오로라>

우리는 우리가 떠난 뒤, 남겨진 물건 앞에서 후손들이 나의 비밀번호를 조합하려 애쓸까 봐 두려운 존재들이다. 그래서 아무것도 남기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었다. 예순이라는 나이는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마지막 날의 내 모습을 차분히 그려보게 되는 나이인가 보다.


<단추가 느슨해지다>

꽉 물고 안 놓을 것 같던 인연이 헐거워져 단추처럼 느슨해질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그저 밤길을 걷거나 기도를 할 뿐이다. 그 기도는 새벽 예불이 되기도 하고, 애인에게 건네는 고백이 되기도 한다.


<가을날>

마음에서 마음으로의 이사

명치께에서 명치끝으로의 이사

생각에서 생각으로의 이사

이상하게 그때는 항상 가을이었다


가을은 그런 계절이다. 마음 깊이 파고들어 아프게 드나드는 감정이 하도 '쓰르르'해서 제자리에 안착하지 못하고 자꾸만 떠다니게 되는 계절.


<눈물이 핑 도는 아주 조용한 박자>

제목에 또 한 번 마음이 빠진다. 내게 그런 박자는 언제였나. 무심코 시계를 봤는데 11:11일 때, 5월의 햇살에 눈이 베여 고개를 떨굴 때, 혹은 고요가 거실을 점령한 날 당신 없이 종일 보내야 할 때. 시인의 말처럼 '영 세상에 자신이 없을 때'와 '그럼에도 연필로 선을 그어서라도 연결되고 싶을 때'의 그 조용한 박자 말이다.


<문장>

책 속의 벌레를 눌러 죽였더니 검은 글자 사이에서 검은 글자가 되었다는 시인의 통찰. 나 역시 며칠 동안 화장실 문 앞에 엎드려 있던 검은 존재를 치워버린 적이 있다. 아무런 표식도 남지 않았다. 벌레였을까, 김 부스러기였을까. 그 정체조차 헷갈리는 밤이다.






아, 나는 단박에 알아버렸다.

내가 이 시인을 무척 좋아하게 될 것을. 한 번만 읽기엔 아쉬워 다시 2독을 시작한다.

이병률이 내일 또 만나자고 한다.

"이병률 시인의 문장들은 마치 제 마음의 비밀번호를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구석구석을 건드립니다. 여러분에게 '인생'이 찾아오는 시간은 언제인가요? 오늘은, 느슨해진 마음의 단추를 가만히 만져보는 시간을 가져보시길 바랍니다."

20240207 새벽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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