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영화, 1947 보스톤
"윤복아, 윤복아" 이름을 부르는 그 마음
퇴직 후의 일상은 비우는 일의 연속이다. 주말마다 몰린 약속을 치러내고, 마사지와 정기검진 같은 미뤄둔 숙제들을 해치우며 집으로 돌아오면 몸은 젖은 솜방망이처럼 무겁다. 하지만 문을 열면 정작 나를 기다리는 것은 치워야 할 삶의 흔적들이다. 일터에서 마구 실어 온 짐들, 유통기한이 지나 비워내야 할 냉장고 안.
샤워로 겨우 에너지를 끌어올려 정리를 시작하다 보면 자정을 훌쩍 넘긴다. 그때 넷플릭스에서 우연히 만난 영화 <1947 보스톤>은 정리하던 내 손길을 붙들어 앉혔다.
영화는 하정우와 임시완이라는 출중한 배우들의 연기를 빌려오지만, 내 시선이 끝내 머문 곳은 배성우가 연기한 남승룡이었다. 그는 평생 손기정의 등 뒤를 보며 살았으나, 1인자를 시기하는 대신 그를 진심으로 존중했다. 자신이 주역이 아님을 기꺼이 받아들이면서도 달리기에 대한 진심만은 놓지 않았던 그. 남승룡이라는 넓은 품이 있었기에 손기정과 서윤복이라는 영웅이 비로소 완성될 수 있었음을 깨닫는다. 그가 그린 원은 참으로 넉넉했다.
또 하나 잊히지 않는 장면은 넘어진 제자를 향한 스승의 절규다. 보스턴 마라톤 선두로 달리다 강아지 때문에 고꾸라진 서윤복을 향해, 손기정은 그저 제자의 이름을 연신 부른다. "윤복아! 윤복아!" 스승이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었다. 1등을 놓칠까 봐 노심초사하는 것이 아니라, 넘어진 자식의 아픔을 제 가슴으로 받아내며 이름을 불러주는 일. 그 처절한 부름 속에서 나는 제자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세계를 확장하는 참스승의 얼굴을 보았다.
베를린 올림픽에서 일장기를 가렸다는 이유로 다리가 잘린 것이나 다름없던 손기정. 그는 보스턴 마라톤에서 성조리를 달아야 한다는 주최 측을 향해 호소한다. 이 청년의 두 다리는 자르지 말아 달라고, 그저 조국의 국기를 달고 뛰게 해달라고. 자신의 아픔을 딛고 제자의 앞길을 터준 그 마음이야말로 '더 큰 원'을 그리는 사랑의 본질이 아닐까.
기적처럼 승리한 서윤복이 가장 먼저 찾은 사람 역시 스승이었다. 기쁨의 순간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얼굴, 그가 바로 진짜 스승이다. 나는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였던 적이 있었을까. 조금 더 따뜻하게 품었어야 했다는 뒤늦은 회한이 밀물처럼 밀려든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아무짝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 회한에 머물기보다, 이제 내 곁에 오는 그 누구라도 내가 그린 더 큰 원 안으로 초대해야 한다는 것을. 그것만이 지난날의 부족함에 대한 진정한 사죄이자, 남은 생을 채워갈 나의 유일한 다짐이다.
(시) 이름을 부르는 마음
가장 낮은 곳에서 넘어진 무릎 보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네 이름을 부르는 일뿐이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길 위에서
내 다리가 잘려 나간 자리에
너의 두 다리를 심어주고 싶어
목이 쉬도록 불렀던 그 이름
기적처럼 네가 다시 일어섰을 때
나를 찾던 그 젖은 눈동자를 보며
나는 비로소 좋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
이제야 돌아와 짐을 꾸리며
내가 놓쳐버린 이름들을 떠올려 본다
더 따뜻하게 안아주지 못했던
더 깊게 눈 맞춰주지 못했던
철 지난 회한이 밀물처럼 밀려와
이제는 누구라도 내 곁에 온다면
가슴에 새겨진 그 절실한 이름들처럼
내가 그린 더 큰 원 안으로 온 마음 다해 불러주리라
비워낸 자리에 새로 돋아날
가장 눈부신 응원을 담아.
20260315 새벽
"누군가의 다리가 되어주는 일, 그것이 우리가 이 험난한 생의 레이스를 함께 완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