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골 연대기

나를 만든 첫 번째 이야기

by 홍반장



하루에 버스가 두 번 다니던, 깊은 산골.

나의 고향, 보리골은 그렇게 세상의 변두리에서 시작되었다.


지금은 대구시로 편입되어 '광역시'라는 영광을 누리고 있지만 내가 기억하는 보리골은 논밭과 흙먼지, 그리고 가난이 진하게 배어 있던 시골 마을이었다.


이 연대기는 그 보리골에서 자라난 한 아이의 성장사이며, 동시에 자연 속에서 피어난 우리들의 작은 소망에 관한 기록이다.


한창 새마을운동이 진행되던 시절, 아침마다 동네 아이들은 마을 어귀에 모여 줄을 맞추어 학교로 향했다. 다락골 재를 넘는 그 길은 우리 동네 아이들이 긴 행렬로 이어졌고, 학교에 도착하면 운동장을 가득 메운 다른 동네 아이들이 우리를 넋놓고 구경했다. 그것은 우리 동네의 위세였다.


운동회 날이면 그 위세는 절정을 이뤘다. 어른들까지 학교에 모여 들고, 음식을 싸 와 멍석을 깔고 둘러앉아 함께 먹고 마시며 아이들의 경주를 응원했다. 하이라이트는 언제나 동네별 이어달리기와 청백 대항전이었다. 당시 봉의초등학교에서 가장 큰 동네였던 우리 마을은 언제나 우승 후보였다. “우리 동네가 1등 당상이지!” 어른들은 으레 그렇게 말했다.


학년 대표 선발은 하나의 큰 이벤트였다. 야밤이면 갱변에 온 동네 아이들이 모였다. 모래 위에서 삼세번 달려 가장 빠른 아이가 대표가 되었고, 나는 그 자리를 놓치지 않으려 매일 밤 연습했다. 오빠와 언니들은 달리기를 잘 못했기에, 온 가족의 기대는 자연스레 내게로 쏠렸다. 특히 나와 실력을 겨루던 친구가 한 명 있었는데, 우리는 출발선에서 기싸움까지 벌이며 단 1초, 1보를 앞서려 안간힘을 썼다.


우리 동네는 100호가 넘었고, 내 동기만 해도 17명이었다. 반 전체 60명 중 28%가 우리 동네 출신이었다. 우리는 홍씨 집성촌이었다. 드물게 섞여 있던 박씨, 정씨는 강가에서 멀리 떨어진 산중턱에 살았다. 강에서 빨래할 때도, 우리 홍가 사람들은 완만한 물살과 넓은 바위를 가진 자리를 차지했고, 타성들은 그보다 열악한 자리에서 멱을 감았다. 그때는 몰랐지만, 훗날 최명희 선생의 『혼불』을 읽고서야 그것이 텃세였고, 차별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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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의 놀이는 곧 위계였다. 공기놀이, 고무줄놀이, 자치기, 사방치기를 잘하면 골목의 대장이 될 수 있었다. 나는 그 모든 놀이에 능했고, 어떻게 그리 잘하게 되었는지는 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언니를 따라 배운 것인지, 타고난 것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언제나 '잘하는 아이'였다.


공부를 잘하게 된 계기는 보다 분명하다. 초등학교 2학년, 막내 삼촌이 잠시 우리 집에 머물렀다. 그 삼촌은 한때 원양어선을 탔고, 성격도 호방했다. 그 삼촌이 오빠들과 언니에게 “미야 공부 시켜라이” 하고 당부했다 한다. 내가 기억하는 장면은, 2학년 여름 방학식 날, 억수같이 비가 내렸고, 교문을 나서는 나를 향해 달려오던 언니의 젖은 신발, “2등이네, 잘했네. 마카 수우수우네” 하며 기뻐하던 모습뿐이다. 그날 나는 석차와 점수의 차이도 몰랐던 아홉 살이었다. “힝아, 2등이 좋은 거가?” 하고 물었을 만큼.


이후로 나는 통지표에 '우수우수'가 적히는 아이가 되었고, 전교 1, 2등을 다투며 자랐다. 키도 커서 늘 줄의 맨 뒤에 섰고, 아이들은 나와 편 먹기를 원했다. 정오의 뜨거운 햇살 아래 당산나무 그늘에서 공기놀이를 하다 보면, 할아버지들이 지팡이를 휘저으며 꾸짖었다. “그리 공깃돌을 받으니 비가 안 오제.” 가뭄이 드는 걸 우리 탓으로 돌리는 어른들의 꾸지람에도, 우리들의 공기놀이는 계속되었다.


공기놀이를 하려면 좋은 돌을 찾아야 했다. 1인당 20개쯤은 주워야 했고, 옷자락에 돌을 싸서 큰 원 안에 모아 ‘많은 공기놀이’를 했다. 친구 중 누군가가 규칙을 어기면 죽었다, 아니다 하며 다투었고, 토라진 친구는 자신이 주운 공깃돌을 챙겨 떠나기도 했다. 며칠간 말을 안 하고 빈대가 되기도 했지만, 언제나 그랬듯 하루를 못 넘기고 다시 어울려 놀게 마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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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공기놀이를 함께 하던 동무들이 이제는 환갑을 바라보고 있다. 사위와 며느리를 보고, 손주를 돌보며 산다. 두 달에 한 번쯤 만나 짭조름한 옛이야기를 꺼내면, 가슴 한구석이 조용히 달떠오른다.

보리골에서의 시간들은 나에게 정서적 안정감을 주었고, 그 풍경과 사람들, 그리고 그곳에서의 추억은 언제나 내 마음 속에 살아 있다. 고향이 주는 그리움은 나의 정체성과 연결되어 있다. 보리골에서의 그 시간들이 허기진 내 배를 채워 주었고, 비루한 내 이력에 힘이 되었다.


이제는 당산나무 아래에서 공기놀이하던 아이들은 모두 도시로 흩어졌고, 지팡이를 휘두르던 어른들도 저마다의 별이 되어 떠났다.


그러나 보리골은 여전히 내 안에 살아 있다.


지치고 상처받은 날엔, 그 흙먼지 나는 골목길을 따라 다시 걷는 상상을 한다. 공깃돌을 가득 품은 손, 모래 위의 달리기, 언니의 젖은 신발, 그리고 “마카 수우수우네” 하고 웃던 말투까지.


보리골은 나를 만든 첫 번째 이야기였고, 지금도 여전히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오래된 연대기다.



"흐르는 강물 위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윤슬처럼 반짝이던 날들, 그 평범한 풍경들이 모여 지금의 나를 만드는 단단한 뿌리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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