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 발렌타인(Blue Valentine)

데릭 시엔프랜스(Derek Cianfrance), 2012

by 리매진
다운로드.jpg 블루 발렌타인(2012)


요즘의 나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친구처럼 낯설다. 분명 사랑을 한 기억이 있는데, 어디가 고장 난 것인지 이제는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에도 설렘보다는 아쉬움을 먼저 생각한다. 아마도 나는 내가 가진 성격과 성향, 사회에서 배운 못 돼먹은 관습들 덕분에 건조한 인간으로 변해가는 것 같다(차마 무미(無味)라고는 말 못 한다.) 그런 와중에 조금이나마 나를 사람답게 하는 인문학에 대한 애정과 사랑에 대한 감각을 살려보겠다는 의지를 더하여 《사랑이 묻고 인문학이 답하다》라는 책을 최근에 완독하였다. 그리고 작가의 이야기 안에서 〈블루 발렌타인〉을 만났다.


블루 발렌타인에 대하여 정지우 작가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영화 〈블루 발렌타인〉은 사랑의 시작과 절정, 끝에 관해 지극히 현실적으로 보여준다. 서로의 감정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며 설레고, 흥분되고, 운명적인 기분이 정점을 이루다가, 그 순간 결정한 삶이 다시 그러한 감정들을 읽고, 무미건조한 일상과 현실로만 남는지가 절절하게 드러난다

작가의 말은 영화에 대한 아무런 정보가 없는 나에게 '한때는 열정적이었던 내가, 어떠한 과정을 거쳐 건조해졌는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라'는 메시지로 다가왔다. 그렇게 딘과 신디의 사랑 이야기에 초대받아 어쩐지 우울한 발렌타인을 보내게 된 것이다.


이미 포털사이트에 잘 정리되어 있는 영화의 줄거리를 제외하고 내 방식대로 영화를 기록해 보자면, 두 인물을 그리는 것으로 갈음할 수 있겠다.



<딘>

1. 어린 시절 어머니가 이혼을 계기로 가정을 떠난 후, 수위 일을 하는 아버지 밑에서 자라 이삿짐센터에서 일하는 중졸의 딘

2. 이삿짐을 나르지만, 요양원에 들어가는 할아버지의 방을 그가 가진 물건들의 추억과 가치를 읽어내 멋지게 꾸며줄 줄 아는 딘

3. 첫눈에 반한 여자에게 한 번만 기회를 달라고 쪽지를 건넬 줄 아는 딘

4. 사랑하는 여자와 그녀의 자식을 누구보다 사랑하여, 가족을 만들자고 고백하는 딘

5. 점차 자신을 떠나는 것들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처절하게, 또 슬프게 매달리다 쓸쓸히 뒤돌아 걸어가는 딘


<신디>

1. 할머니와 부모가 모두 한 식탁에 앉아 식사를 하지만, 이걸 먹으라고 내놓았느냐며 음식을 집어던지며 화내는 아버지를 보고 자란 신디

2. 의대 진학을 위해 유학을 희망하지만, 레슬링을 하다가도 여성을 탐닉하는 철없는 남자친구에게 감정적으로 의지하는 신디

3. 의도하지 않은 임신 때문에 수술 침대에 누웠지만, 결국엔 뛰쳐나와 거리를 걷는 신디

4. 사랑에 의지하며 행복하기로, 자신은 부모처럼 살지 않기로 다짐하지만 미래가 없는 결혼 생활에 지쳐 더 이상 웃지 않는 신디

5. 자신의 딸은 본능적으로 지키려 하지만, 옆자리를 지키는 딘과 자신은 돌보지 못하는 신디


딘과 신디에 대하여 그들이 처한 환경, 살아온 삶, 현재의 감정들을 정리하는 와중에도 내 마음은 딘에게 기울어져 있다. 누구나 그러하듯 자신이 가진 감정에 솔직하고, 사랑을 소중히 여겨 눈물짓는 남자를 처연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의 나는 신디와 너무나도 닮아있다. 신디가 딘을 사랑하기에는 딘은 너무나도 낭만적이고, 자신의 감정과 욕구에 충실하며, 함께할 내일을 그릴 때 그 색이 탁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블루 발렌타인〉은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나조차도 감정이 솟아 불타오르고, 꺼져가는 그 과정이 아주 적나라하고 절절하여 쉽게 몰입할 수 있는 영화이다. 누군가는 자신의 인생에 있어 가장 좋은 영화라고 생각한다고 하기도 하고, 어쩌면 인간으로 태어나 경험하는 '사랑'이라는 것의 일상적 본질에 닿아있다고 평하기도 한다. 씁쓸한 영화의 맛을 보며 쉬이 공감할 수 있는 까닭은, 내가 딘이나 신디와 같은 배경을 가졌다거나, 경험을 가졌다거나, 사고방식이 닮아서는 아닐 것이다. 그저 영화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들이 사랑과 이별을 해본 누구나, 혹은 결혼을 생각하거나 결혼한 누구나 미세한 교집합을 통해 안쓰러운 마음으로 살펴보게 되는 것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 속에서 신디의 할머니는 '진정한 사랑을 찾기 위해서는 감정을 믿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우리가 생각해야 할 핵심적인 것들이 '감정'인 것을 알면서도, 현실 속에서는 또 다른 조건들을 재고 따진다. '감정에 충실한 사랑'은 20대에나 가능하므로, 결혼을 할 거라면 아무것도 모르는 젊은 시절의 내가 했어야 한다고도 말한다. 이러한 말에 십분 공감하는 나에게 이 영화는 생에 남은 날들을 어떠한 사랑으로 채울 것인가 생각하게 만듦으로써, 다시 한번 내가 생각하는 '사랑'에 대하여 스스로 답하도록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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