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번의 구타(The 400 Blows)

프랑수아 트뤼포(François Truffaut), 1959

by 리매진
프랑수아 트뤼포(François Truffaut), 1959

좋은 영화들을 삶에 들이기로 하였지만, 영화에 대해서는 무지렁이기 때문에 그저 보고 느낀 대로만 글을 쓸 수 있다는 것 또한 내가 가진 행운이다. 물론, 앞으로는 '알고 보는 즐거움'을 누리기 위하여 시작한 영화에 대한 공부를 해나가면서 조금 더 다양하고 깊이 있는 해석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서울아트시네마'는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익숙하고, 너무나도 당연히 의미 있는 장소겠지만 나는 추석 연휴의 전야제를 위해 그곳을 처음 찾았다. <가을날의 재회-트뤼포와 고다르>라는 주제로 열 편의 영화를 상영하는 프로그램은 꽤나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감독들의 작품들을 잘 정돈된 일정으로 선보이는 것이라고 했다. 그중 <400번의 구타>는 트뤼포의 입봉작으로 '누벨바그'의 상징이며, 새로운 영화의 시대를 여는 기념비적인 영화라고도 했다.


가을날의 재회, 공식 포스터


스스로 기억을 하기 위해 남겨두는 영화 외적인 정보는 이만하고, <400번의 구타>에 대하여 남겨보자면 '1959년 파리, 벗어나지 못한 2023년 지금 여기' 정도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영화는 프랑스 파리를 배경으로 부모, 교사, 사회로부터 약간은 어설프고 부족한 관심을 받는 어린 앙투안 두아넬의 이야기를 다룬다. 12살 소년인 두아넬이 자신을 둘러싼 환경으로부터 '부족한 관심'을 받는다는 것은, 영화에서 보여주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아래 사건이나 현상에서 읽어낼 수 있다.



1. 아이를 천덕꾸러기로 여기는 교사와 자유(휴식 시간)를 박탈함으로써 벌을 주는 교실

2. 단칸방과 현관문 사이의 좁은 공간에서 한껏 웅크리고 자는 두아넬

3. 점심 값을 달라고 이야기하지만, 아빠에게 달라고 요구하라는 엄마

4. 점심 값은 챙겨주지만, '이 집은 매번 모든 것이 없어지고, 거짓말을 늘어놓는다'라고 핀잔을 주는 (새)아빠

5. 아이가 무단결석을 하자 '걱정'보다는 '문제'로 여겨버리는 외도하는 엄마와 교사

6. 가출 생활을 위해 돈을 벌고자 타자기를 훔치게 되는 두아넬과 이를 가로채려는 거리의 청년

7. 타자기를 도난당했다는 사실을 고발하지만, 예의를 갖추어 전화를 받던 아빠 회사의 직원

8. '소년범'이라는 결정을 내리기 위해 사무적으로 일에 관여하는 '경찰'로 그려지는 '사회'

9. 교화라는 명목으로 아이들을 줄 세우고, 호령하지만 빵을 먼저 먹었다는 이유로 아이를 폭행하는 관찰관

10. 더 이상 너를 감당할 수 없다며 다시 한번 아이를 그 자리에 남겨놓는 엄마



약 10가지로 정리한 영화 속의 무관심은 두아넬이 가지고 있는 개인사와 배경에 대하여 드러내는 데는 불충분하지만, 한 사회가 어린아이 한 명을 어떻게 통제하려고 하며 한 편으로 방치하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영화를 보는 동안 내내 생각했던 한 가지는 '1959년의 파리는 왜 이렇게 시리도록 2023년의 오늘과 닮아 있을까?'였다. 분명, 국가나 시공간의 차이가 있다손 치더라도 약 60년이라는 시간은 우리를 더 나은 시절에 살고 있다고 세뇌시켰고 그렇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물론 우리나라의 80년대를 그린 영화에서 보여지는 무자비하고 무차별적인 폭력(영화 <친구>에서 학생들을 패며 아버지의 직업을 묻는 것과 같은)과는 그 양상이 다르지만, 아래처럼 말을 바꾸어 보면 어떨까.



1. 아이를 통제하지 못하는 교사와 또래 사이에서 고립되어 가는 아이

2. 국가에서 지원하는 최소한의 지원을 받으며, 힘들게 하루를 살아가는 저소득층 아이

3. 점심 값을 달라고 할 부모조차 존재하지 않는 가족돌봄청소년

4. 학교에 소속되어 있지만, 낙인으로 인해 모든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아이

5. 소통하지 않는 부모-자녀와 '학교생활기록부'로 목을 매어둔 출결 관리

6. 단순 절도를 뛰어넘어 살인, 강간 등 강력 범죄의 가해자가 된 촉법소년들

7. 아이에겐 엄격하고 불친절하지만 성인 관계자에게는 친절한 또 다른 어른

8. 보호라는 이름 아래 아이들을 관찰하고 감시하는 사회망

9. 낙인이 찍힌 아이들이 모여 또 다른 범죄를 배우는 곳으로 지목되고 있는 '학교(소년원)'

10. 더 이상 누구의 보호도 받지 못하도록 성인이 되면 사회로 내쫓기는 청소년



위에 나열된 몇 가지는 영화 속의 현상과는 호응이 잘 되지 않는 억지처럼 보일 수 있겠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가 마주치고 경험하는 것들은 두아넬이 경험하는 그 사회와 크게 다름이 없다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 영화를 보면서 마음 한편이 불편했던 이유는, 두아넬의 방황이 '가난'에서 시작되었다거나 혹은 사춘기를 맞은 아이의 단순한 '호기심'으로 해석할 수 있는가에 대해 스스로 대답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가난한 청소년들이, 호기심이 많은 사춘기의 청소년들이 두아넬과 같은 결말로 다다르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들은 그 하나하나를 짚어 돌아보기엔, 지면이나 필력의 한계가 너무도 선명하다.



영화 제목인 <400번의 구타>에 대한 해석은 영화의 원제와 연계되어 해석되는데, <the 400 blows>는 '구타'라는 직접적인 폭행보다는 한 아이가 성장하기 위해 경험하는 '충격, 상처' 정도로 해석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 같다. 내가 나열했던 열 가지 현상은 소년 두아넬이 어른으로서 자라기 위해 경험해야 하는 400번의 충격과 상처를 유발하는, 감독의 통찰력이 돋보이는 '설정(setting)'일 것이다. 영화 속 파리의 흔들림과, 오늘의 우리가 경험하는 흔들림이 다르지 않은 까닭 또한 어쩌면 어떠한 형태로든 경험하게 되는 과정이라서 일지도 모른다. 같지는 않지만, 다르지도 않은 그 구타에 의하여 우리는 내적으로 충격받고 상처받지만 성장하는 것이다.


태어나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바다에 가고 싶다던 두아넬이 비로소 마주한 바다 앞에서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는 것은, 맹목적으로 추구하던 어떤 것 앞에서 잠시 멈춰 선 것처럼 느껴진다. 분명 두아넬은 또 다른 것을 찾아 쉼 없이 뛰고, 상처받겠지만 그것이 '어른이 되는 과정'이라고 말하기에는 나이만 어른인 나로서는 미안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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