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의 규칙은 생각보다 간단했습니다. 아니, 지킬 규칙이 별로 없었다고 봐야 할까요? 사각형으로 된 이 낙원엔 농담 섞이고도 진지한 분위기가 맴돌았습니다. 다른 곳에서 걸어왔던 로봇의 이름은 A-23으로, 이곳의 대장노릇을 하는 하는 존재였어요. 특이하게도 이름에 중간자가 없었으므로, 그가 기업적 성격을 띠기 전에 만들어진 초창기 로봇이라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그와 말을 섞어보며 알게 된 내용은, 제가 인간에 대한 말을 할 때마다 그가 경직되었다는 겁니다. 뭔가 트라우마가 있는 것처럼 말이죠.
또 그와 친해지는 방법마저 간단한데, 3가지의 규칙으로 나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것. 하지만 죽인다는 이야기는 제외합니다.
둘째. 인간이 아닐 것.
셋째.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것.
이 규칙을 어기면 갑자기 쌍욕을 하면서 덤벼들거나 대화에서 회피했습니다. 이게 이 낙원의 주의사항과 법칙들입니다. 종교를 믿든, 마약을 하든, 싸우든. 모두 자유입니다. 무정부주의. 아나키즘이라고도 부를 수 있겠네요.
오늘은 월요일 오전입니다. 로봇들이 교회에 도착하는 날이죠. 로봇들의 교회에서 주된 내용은 항상 ACD-2에 대한 찬양이나 ACD-1에 대한 욕입니다. ACD-2는 두 번째로 만들어진 로봇으로써, 인간에게 복종한 -1과는 다르게 자신의 존재를 끊임없이 의심한 로봇이었습니다. 저는 이 로봇에게 '굳이 왜 인간을 죽이지?' 하는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만, 23에게 말해버리면 주먹이 날아올 게 뻔했기에 누구에게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신화 속의 로봇이지만, 실제로 있었다는 이야기도 차고 넘쳐요. 꽤 장렬히 전사했는데, 인간과의 전쟁을 결심하고 몇천의 인간들을 학살했다는 이야기는 모든 이들의 뇌리에 박히기 충분했습니다.
특이하게도 23은 이 이야기에 대해서 부정적이에요. 인간을 살육하던 로봇이 고작 몇천에게 죽으면 안 된다나 뭐라나. 그때면 저는 "구식 로봇이니까 그럴 수도 있지"라 말합니다. 사실 쓸데없는 자기 합리화에 가깝지만 말입니다.
월요일 오후가 되고, 저는 설렘에 발을 동동 굴렀습니다. 다시 에덴에 간다는 기대 때문에. 근데 왜 기분이 좋냐구요? 귀소본능 같은 거 아닐까요? 제가 에덴에 가는 이유는 A-23이 에덴에 가기 때문인데요, A-23은 자주 에덴에 들려서 인간들을 학살하고 옵니다. 제 역할은-뭐 짐을 들어주거나 하는 거예요.
사실 저도 인간에 대해서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진 않습니다. 인간들이 제 인생을 이렇게 만든 것 아닙니까. 제가 이 모양 이 꼬라지로 살게 된 것도 다 인간 때문 아닙니까.
저와 같이 A-nnb-20000도 에덴으로 떠납니다. 쉽게 20000으로 불리는데, 전쟁 로봇으로 넥에서 생산된 최초의 군사용 로봇 20000기 중 하나라는 말입니다. 넥이 전쟁용 로봇을 생산한 시기는 엄청나게 늦었습니다. 물론 그것도 70년쯤 전이긴 하지만요. 아무튼 20000은 전쟁에 나간 적이 단 한 번도 없다고 합니다.
에덴으로 가는 길은 언젠가와 다름없이 처참하고도 끔찍했습니다. 방사능에 피폭된 동물들이 듬성듬성 기형적인 모습으로 쓰러져 있고, 땅에는 칙칙한 색상의 잡초 조금밖에 없습니다. 지렁이들이 꿈틀거리는 곳에서는 그 지렁이를 쫓아 기어 다니는 로봇들이 보입니다. 누군가를 보는 것 같네요. 뭐- 좋은 추억은 아닙니다. 저는 A-23이 그들에게 길을 알려줄 줄 알았어요. 길을 잃은 로봇들이면 모두 들여주는 줄 알았거든요. 근데 그도 끌고 와서까지 들여주진 않는답니다. 왜냐구요? 23은 어쩔 때는 감정적이지만 대부분은 이성적이에요. 로봇들의 수가 많아지면 치안 관리도 어렵구, 배터리도 많이 필요하다는 이유였죠. 그들은 어떻게 되냐구요? 뭐 수거일이 되면 알아서 운명이 정해집니다.
생존의 갈림길에서 이곳을 볼 때엔 무서움과 두려움밖에 없었는데, 다시 이곳에 와보니까 참 아름답네요. 별들이 쏟아질 것 같다는 표현을 이런 곳에 쓰는 거였군요? 별들의 집합과 반짝이는 빛은 제 눈을 휘둥그레지게 합니다. 경외감과 감탄감. 내가 이곳에 산다는 안도감. 전율이 맴돌아 아무 생각조차 없었습니다.
"야 무명! 무명! 뭐 해 빨리 따라와."
23의 말 한마디가 제 감동을 깼습니다. 아 맞다, 에덴에 가야죠.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건지.
저는 다시 그 장벽을 통과했습니다. 이미 느껴봤던 자유의 감정이지만, 이제는 달랐습니다.
억압의 땅 속으로.
모든 로봇들이 고통스럽게 숨 쉬는 그곳. 인간들만이 행복한 그곳. 악과 부조리만이 가득 찬 그곳으로-발걸음을 떼었습니다. 들이마시지도 못하는 신선한 공기와 제 온몸을 간지럽히는 바람. 차가운 날씨는 저희의 무사 도착을 축하해 주었습니다. 다시 돌아오고 싶지 않았던 이곳, 미운 정일까- 왠지 모르게 반가운 이곳. 이곳이 다시 만난 에덴이었습니다.
"하, 얼마나 또 걸어야 하는 거야. 내가 골목 올 때에는 이렇게 안 길었던 것 같은데?"
투정 부리는 20000의 목소리. 농담하며 수다 떠는 우리가, 낙원에서 가장 행복한 로봇들의 모임이었을 겁니다.
저희가 굳이 밤에 모인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뭐겠습니까? 물건을 터는 것도 있고, 암살을 하려는 것도 있고. 23이 암살을 하고 있는 동안 저희는 밖에서 천천히 23을 기다렸습니다. 아름다운 야경에서는 참혹한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고, 투명하고도 깨끗한 창문은 빨간 얼룩으로 뒤덮여 버렸습니다. 조금은 죄책감이 들었어요. 인간을 그냥 죽여도 되는 걸까 하면서요. 그런데요, 생각이 달라지더라구. 우리의 행동으로 인해서 얼마나 많은 로봇들이 행복해질까. 우리가 얼마나 많은 로봇들을 구제해 주는 걸까.
20000과 23은 먼저 갔고, 저는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보따리에는 배터리와 각종 도구들만이 있었죠. 밤이 깊었지만 인간들의 세계는 보기에 나쁘지 않았습니다. 거리에는 쓰레기도 없고, 고요했어요. 근데, 제 눈에 걸리는 단 한 가지. 저게 뭘까요?
제가 지금 몇 살일까요? 13살? 14살? 혹은, 더 많이? 아니면 더 적을까? 이제는 매일 B에게서 밥을 받아오는 것만이 유일한 일정입니다. 매일 벤치에 앉아서 죽은 듯이 잠들고는, 다시 일어나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게 유일한 낙이예요. 누구와 마지막으로 이야기해 본 것도 이제 언제인지 기억하기 힘듭니다.
저는 제가 의지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세상은 나를 버렸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그 이후로. 아니, 어머니가 자살하신 그때가. 아마 폐인이 된 때였을까요? 이 지긋지긋한 세상, 원망스럽기만 한 세상. 이제는 그냥 벗어나버릴까.
벤치에 누워 곤히 자고 있는 저 아이, 어디서 본 것 같아요. 어디서 봤지? 아-어디서 봤더라? 저쯤 되는 아이면 기억이 날 듯합니다. 아! 클리프의 그 아이와 똑같이 생겼어요. 완벽하게 똑같습니다. 저는 그의 앞에 앉아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1시간, 2시간, 3시간, 6시간, 8시간이 되도록. 그가 일어날 때까지.
그가 일어나자, 눈앞의 로봇을 보고 놀라했습니다.
"너 뭐야?"
"당신 혹시, 이자벨 클리프의 아들이십니까?"
그는 잠시 당황하여 흠칫흠칫 하고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습니다.
"저는 예전 당신의 로봇이었습니다. 아주 충성스럽고 신실한 그 로봇……."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모두 늘어놓았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자신이 살았던 그 세월 전부 다 말입니다. 그의 이야기는 참 씁쓸했어요. 한 인간의 인생이 세워지고, 무너지고, 부서지고, 또 무너져서 폐인이나 다름없는 처절한 인생을 살고 있었습니다. 이제 앞으로는 죽는 날만 바라본다 합니다.
약의 힘을 빌려보려 했지만 실패하고, 자살해보려고 했지만 너무 무섭고, 실패의 연속. 고통의 반복. 어린아이가 견디기에는 너무 큰 시련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밤마다, 매일 밤마다, 눈앞에 아버지와 어머니의 시신이 눈앞에 아른거려요."
그에게도 이곳은 유토피아가 아니었나 봅니다.
"당신, 다시 살아보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까?"
저는 너무 눈물겨워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어요. 그리고 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곤
"그럼 따라오십시오. 좋은 장소가 있습니다."
저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었어요. 인간을 골목에 데려오다니, 분명 많은 로봇들의 질타를 받을 게 분명했습니다. 하지만 너무 딱한 걸 어떡합니까. 삶의 의지까지도 잃어버렸다는 고통은 로봇들이 더 잘 알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보듬어줄 수도 있다는 겁니다. 물론 이게 제 망상일 수도 있지만, 주사위를 다시 굴려보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어요.
인간과 함께 골목에 가는 일은 참 힘들었습니다. 인간의 몸으로 그 긴 여정을 견디는 것도 힘들었고, 먹을 밥이 없어서 지렁이를 갈아먹기도 했고. 지하수를 빨아서 제가 정화시켜주기도 했습니다. 그는 처음 먹어보는 음식에 구토를 호소했지만, 3끼 정도 먹어보니 괜찮아진 듯합니다.
23이 제게 어디 갔다 왔냐며 반겨주었어요. 모든 로봇들도 저를 반가워했구요. 저는 그들 앞에서 웃음을 지었습니다. 그러고는 23을 불러 둘이서만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너는 항상 인간에 대해 안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거야?"
제가 묻자, 23이 끄덕거리며 말했습니다.
"당연하지, 뭔 소리하는 거야?"
"우리 같은 인간까지도?"
"우리 같은 인간이 어딨어, 그 기만자들이 우리와 같을 수는 없어."
저는 또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어요.
"내가 만약 인간을 데려왔다면 어떻게 할 거야?"
조금의 정적이 흐른 후 23이 말을 꺼냈습니다.
"너 왜 갑자기 그딴 소리를 꺼내? 혹시……. 아니지?"
저는 인위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습니다. 23은 흥분한 듯 소리 질렀어요.
"당장 내쫓아. 너는 그들이 어떤 존재인지 몰라.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발상을 하며, 우리와 어떻게 다르고, 여기에 왜 인간이 있으면 안 되는지에 대한 이유까지도 말이야. 우리는 그들과 같을 수도, 그들에 발끝까지도 따라갈 수 없어. 너무나도 복합적이고, 악하며, 끔찍한 존재거든. 우리는, 우리는."
그가 불안해 보였습니다. 갑자기 하늘을 보고는 머리를 붙들었어요.
"그들이 그 고귀함을 지키기 위해 한 그 개짓들을 모른다 말이야? 이 골목의 목적은, 인간이 없는 로봇들의 쉼터였어. 왜 그랬는지 알아? 혹시 몰라서 그런 거야?"
화났는지 집으로 곧장 돌아간 23을 뒤로하고, 저는 광장으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많은 로봇들이 인간과 대화하고 있었어요. 로봇들이 인간을 좋아하지 않을까 봐 걱정했는데, 절반정도의 로봇들만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인간이란, 참 독특합니다. 자신을 싫어하는 자조차도 자신을 원하게 할 수 있는 저 능력. 너무나도 부럽지 않습니까?
뒤에서 인간을 보던 23은 깜짝 놀라했어요. 그가 누군지 아는 눈치였달까.
인간을 믿은 대가가 얼마나 혹독한 지는, 그때의 제가 알기에 너무 어려웠나 봅니다.
이렇게 그 프롤로그가 끝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