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여름, 마음이 살짝 헛헛했다. 온라인에서 만나는 관계가 무의미해 보였다. 다른 탈출구를 찾고 싶었다. 예전에 잠시 관심 있었던 소모임이 생각났다. 독서 모임이 많아서 선택지가 넓었는데 실제 참여를 해보니 토론도 즐거웠던 기억이 떠올랐다. 딱 하나 걸림돌이 있으니 나이였다. 사람들과 책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언제나 즐겁지만, 3040들과 어울리기엔 나이가 마음에 걸려서 떠났던 소모임. 연령대 규정을 피해서 잘만 찾는다면 나이에 맞는 모임도 발견할 수 있을 듯했다.
검색을 해보다 지역 모임이 눈에 들어왔다. 가까운 지역에서도 독서 모임이 있었다. 매주 열리는 지역 독서 모임에 가입해서 참여해 보았다. 결론적으로 나보다 다들 열 살, 스무 살 아래라 또 한 번 뻘쭘했다. 나이 많은 누나가 부담스러울 것 같아 관두기로 했다. 오십 대만 아니라면 누릴 수 있는 경험이 훨씬 많을 것 같아 아쉬웠다. 나이만 아니라면, 폭넓은 모임참여도 가능할 텐데, 나이가 발목을 잡는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나에게 아킬레스건이라면 나이가 아닐까. 하지만 어쩌랴. 소모임의 목적 중에는 이성 간의 만남도 있을 테니 나이 많은 중년 아줌마는 피해야지.
나이에 상처받은 후, 독서 모임에서 범위를 넓혀 보았다. 인기가 많은 지역 모임도 괜찮을 것 같았다. 동네 친구도 좋으니까. 끌리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LP 바 모임' 우리 동네에 LP바가 있다는 것이 신기했는데, 혼자 갈 용기가 없으니 모임을 통해 가보기로 했다. 가입을 하면서 모임 대표에게 전화번호를 알려줘야 해서 부담스러웠지만, 회원이 많다 보니 나 하나쯤은 묻혀 있어도 될 것 같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첫 LP 바 모임이 생일 달이었다. 첫 모임에서 생일 축하를 받았다. 모임의 대표님이 개인 카톡으로 치킨쿠폰을 보내주기도 했다. 생일을 맞이한 회원에게 치킨 쿠폰을 보내는 것이 전통이라 해서 받을 수밖에 없었다. 생일이라서 쿠폰을 보내기 위한 연락일 뿐, 앞으로 연락올 일도 없을 터였다. 그게 상식이니 지키리라 믿었다. 딱 한 번의 LP 바 모임 이후로는 모임 자체에 나가지 않았다. 낯선 사람들과 저녁을 먹고 술을 마시는 일이 나에게는 쉽지 않았다. 낯을 가리는 사람에게 모르는 사람들과의 모임은 어울리지 않는 영역이기도 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 마음을 주고받는 사람과의 만남은 멀거나 힘들어도 열정을 보이지만, 낯선 사람들과의 식사나 술자리를 좋아하지 않는 나만의 특성을 잘 알기에 그 이후로는 활동을 하지도 않았고, 활동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결론적으로는 탈퇴를 했다. 의미 없는 '낯섦'은 숙제 같아서 벗어나는 게 맞았고, 나는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신경도 쓰지 않았던 대표라는 사람으로부터는 자꾸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관심조차 없는 사람이 보내는 알람이 점점 거슬리기 시작했다.
누낭, 누낭~ 벙개 나오세요
누낭, 누낭~ 모임에 가입해 주세요.
누낭, 누낭~ 모해요
누낭, 누낭~ 바빠요
누낭, 누낭~ 차 한잔 마셔요
누낭 누낭~프사가 너무 이뻐요
누낭 이번 모임 나오세요. 어떤 음식 좋아하세용
누낭 모임에 가입 안 해도 되니 연락은 해용
내가 왜 네 누나일까. 누나도 아니고 누낭이라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딱 한 번 단체모임에서 보았을 뿐인데 반복되는 누낭은 왜 주기적으로 날아드는 건지 몹시 힘들었다. 그래도 희망을 잃지 않았다. 그 정도 나이라면 눈치가 있을 텐데, 보내는 카톡을 확인하지 않으면 이러다 말거라 여겼다. 열심히 씹었다. 들어가지도 않았다. 자꾸 모임에 나오라고 해서 바쁘다며 탈퇴도 했다. 어플도 삭제했다. 어차피 어울리지 않을 모임이었다. 잠시 lp 바에 끌려 가입했던 나의 실수였다. 탈퇴를 했음에도 연락이 오길래 '제가 시력 시술을 해서 카톡을 못 봅니다' 한 마디 남긴 후, 줄기차게 무대응 했다.
전화도 끊어지고 카톡도 안 하면 알아채려니 했다. 전혀 관심 없다는 시그널을 지속적으로 보냈으니 상대도 알지 않을까. 그래도 카톡이 계속 오길래 결국. 자책했다. 내가 왜 소모임에 가입해서 지역 모임에 참여를 했을까. 낯선 환경을 좋아하지 않으면서 왜 그렀을까. 억울하기도 했다. 여름에 딱 한 번 단체 모임에 나갔을 뿐인데 난 왜 11월까지 시달려야 하는 건지.
결국 소모임에 뜻이 없으니 연락하지 말아 달라는 카톡을 직설적으로 보냈다. 카톡을 보지 않으니 전화가 오기 시작했는데 받고 싶지 않았다. 매일 오는 카톡도 징그러웠다. 이토록 무응대라면 알아채셔야 하는 것 아닐까. 마음이 답답했다.
'치킨만 받고 모른 척이네'
치킨? 아... 몇 달 전에 모임에서 준 치킨 쿠폰이 생각났다. 거절당한 상대는 선을 긋자 도덕성을 들먹이기 시작했다. '나란 인간, 생일이라며 치킨만 받은 파렴치한 사람이었구나.' 잊었던 치킨 쿠폰을 상기시켜 주시길래, '기분 나쁘시면 치킨 값 보내드릴게요'라고 응대했다. 바로 계좌가 오길래 보내는 이름에 '치킨'을 넣어 2만 원 보내드렸다. 그리고 드디어 차단했다. 카톡도 전화번호도.
세상에 공짜는 없나 보다. 괜히 치킨 쿠폰을 받았다가 겪지 않아도 될 일을 겪었다. lp바가 궁금해서 단체 모임에 나갔다가 여름부터 가을까지 몇 개월을 시달리고 2만 원을 송금한 후 자유를 찾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 2만 원 진즉 보낼걸.
몇 년 전 해돌에서 겪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작은 호의와 정성이라고 여겨서 '이 정도는 괜찮겠지' 라며 받았다가 된통 당했던 기억이. 그 후 꽤나 시달렸던 기억이 아직 선명하다. 그렇게 당하고도 같은 실수를 반복했다. 앞으로는 온라인에서 파생된 오프 모임에 관심조차 두지 않을 거라는 결연한 다짐을 했다.
무엇보다 치킨의 철학은 강렬했다. 인생은 치킨을 알기 전과 후로 나뉜다더니 내가 딱 그랬다. 앞으로 치킨 쿠폰은 함부로 받지 않을 거다. 치킨 쿠폰뿐이랴. 공짜는 모두 거절.
공짜가 싫어서 조금이라도 얻어먹으면 갚으려 했다. 모임에서 단체로 얻어먹는 경우가 생기더라도 개인적으로 꼭 갚곤 했다. 치킨도 예외는 아니어서 안 받고 싶다는 의지를 표현하기도 했었다. 결론적으로 받은 게 문제였다. 앞으로는 치킨 쿠폰에 담긴 인생철학을 뼛속깊이 기억하며 모든 공짜는 룰이건 규칙이건 예외 규정을 두지 않기로 했다. 치킨의 교훈은 너무 강렬해서 정이 떨어졌다. 당분간 치킨은 먹지 않기로 했다.
교훈이랄 것도 없는, 재미있는 에피소드라 끄적여 보았다.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이 쪼잔해서 이런 일도 생기나 보다. 경계 없이 폭넓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는데, 의지를 꺾는 일이 생겨서 결국 내 영역 안의 좋은 사람들하고만 어울려야겠다는 의지를 다지게 된다. 결이 다른 사람들까지 수용하기엔 내가 그릇이 좁은 이유다. 전혀 다른 세계의 타인을 경험했으니 잘 기억하기만 하면 된다.
인생은 치킨을 알기 전과 후로 나뉜다는 뼈저린 교훈을 잊지 않기로 한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