갱년기 인사이드아웃
사람에 대해 섣불리 판단하지 않으려는 이유는 내가 좋은 사람이라는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을 함부로 무시하지는 않지만, 마음에서 우러나는 존중이 태도에 배어있는지 자신할 수 없다. 지하철에서 시끄럽고 느린 노인들을 피하는 나의 모습에서 인류애가 있는지 의심스러울 때도 있다. 경계성 지능인 아동의 학습 지도를 하면서 고구마 먹은 듯 답답해하는 내가 감지될 때면, 인내심이라곤 없는 나를 자책하게 된다.
스스로가 도적적이거나 윤리적이지 않아서 마음에 들지 않을 때가 많다. 그보단 마음 씀씀이가 넓지 못하고 인심이 넉넉하지 않아서 서울깍쟁이스러워서 아쉬울 때가 있다. 그나마 못되진 않고 착한 구석이 있어서 다행이라며 합리화를 시도한다.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으니 남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포장이라도 잘하자고. 좋은 사람이도록 노력이라도 하자고. 선과 악으로 명확하게 구분하기 어려운 인간 세상에서 51% 수준의 '선'이면 괜찮다며 조금 더 애써서 60%로 끌어올려보자며 다독이기도 한다. 그나마 부정적이지 않고 긍정적인 성격이니 얼마나 좋냐며 본인에 대한 칭찬도 남발한다.
잘 흔들리기도 해서 주변 사람들이 좋은 사람이길 바라곤 한다. 교류하는 사람들로부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람이긴 한데, 유독 심하다. 아닌 척 해도 덩달이. 친한 사람들의 인생을 관찰하며 자극받기를 좋아하다 보니 배울 점이 있는 친구, 존경할 면모가 있는 사람들과의 교류를 추구하는 편이다. 인연이 오래될수록 친구나 언니들 후배, 동생에게서 장점을 주로 본다. 인생의 기본자세가 덕후라서 단점은 파악이 둔하고 장점 발견에는 빠른 편이다. 적응된 사람은 대체로 좋게 생각하지만, 적응 전에 선을 넘으면 바로 선을 긋고 회피해 버리기도 한다. 어쩔 수 없다. '덕후& 덩달이'는 사람을 잘 사귀어야만 한다.
쓰고 보니 위선적이다. 지구에서 유일하게 싸우는 상대라며 아들 욕하는 엄마이고, 직장생활의 스트레스를 쏟아내며 관리자 험담을 자유롭게 해대면서 타인 비방을 하지 않는 아름다운 영혼인양 표현을 한 것 같다. 가족 욕도 하고, 부정적인 이야기를 풀며 마음의 찌꺼기를 비우는 사람은 맞지만, 그래도 이야기의 결론은 자기반성적이면서 긍정적인 대화를 좋아한다고 해야 맞겠다. 겉과 속이 다르지 않은 사람들과 담백한 이야기를 좋아하고, 무엇보다 배울 점이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을 즐겨한다고 하면 거짓은 아니겠다.
오십을 넘으며 사회생활을 삼십 년쯤하고 나니, 대체로는 좋은 사람과의 인연만 남은 것 같다. 주변 사람들이 상식적이고 반듯하면서 평안하고 온화한 성품이라 우울한 구석이 없다. 타인에 대한 비방보다 이해가 앞서고 상대방 입장에서 헤아려주다 보니 갈등 없이 잘 지낸다. 상대방의 어려움을 알아주고, 고마운 일에 대해서는 마음을 알맞게 전하는 사람들과 친분을 유지하고 있어서 넓지 않은 인간관계지만 만족스럽기도 하다.
25년의 가을은 좀 더 특별하다. 기대조차 없었던 인연이 시작되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갑작스러운 출발은 복권당첨이나 경품행사에 당첨된 기분이다. '혹시나'가 '역시나' 되는 일이 대부분인 일상에서 혹시나? 가 혹시나!로 응답한 경우는 처음이랄까. 작가라면 이번 인연과의 시작을 소설처럼 써 보고 싶은데 마땅하게 표현할 기술도, 풀어낼 공간도 없다. 인연의 일이 아직 작고도 여려서 오픈된 플랫폼에 드러내기엔 꺼낼 말들이 빈약하다. 풀어낼 방식을 찾지 못해 빈곤한 순간, 내가 해 볼 수 있는 것은 두루뭉술한 단어들로 감정을 조금 드러내 보는 것뿐.
짧은 시간의 관찰이지만 언어로 전달되는 생각이 반듯한 사람. 말투와 태도에서 타인에 대한 깊은 배려가 보이는 사람. 행동에서 따스함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사람을 알게 되었다. '살다 보니 존경할만한 사람을 만나는 때도 오는구나.' 경험해 보지 못한 자각이 새롭다. 20대에 잠시 있었지만 사라졌던 감정들이 다시 깨어난 것도 같고, 철 지난 가요지만 아직도 마음을 울리는 노래의 주인공이 된 것도 같다. 마음이 끌리는 사람을 발견했지만, 왜 그런 건지 이유를 몰라 분석해 보는 요즘, '나에게도 이런 인연이 찾아올 수 있구나.' 신기하고 신비롭기만 하다. 한 마디로 드라마 속에서 살고 있는 중이다.
사람이 좋아서 설레고 떨리는 마음, 생각만으로도 배시시 웃음이 새어 나오는 내 모습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그런 시절이 있기는 했는데, 기억이 나질 않는다. 살아온 이력이 있으니 사람에 대한 판단이 빨라서 '이런 사람이겠구나' 라며 예상했는데, 긍정적인 기대에 잘 어울리는 모습과 더불어 그 이상을 뛰어넘는 매력을 발견했을 때의 신선함을 자주 마주하고 있다. 조심스럽고 진중해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일 거란 기대에 어울리는 반듯함에 예상 보다 더 따스한 배려와 더불어 구석구석 장난스럽고 재미있어서 심장이 훈훈해진다.
청춘의 감정은 녹슬지 않았다. 그때의 기억이 명확하지 않지만 심장의 온도는 전혀 다르지 않다는 실감. 사람이 좋을 때 느껴지는 내 안의 농도는 20대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오히려 불안한 청춘이 아닌, 안정된 중년이라서 그런지 감정의 집중도는 더 높다. 삶을 독립적으로 꾸리며 평온함을 유지하고 있기에 인연에 대한 마음씀이 불안정하지 않다. 휘둘리지 않는 안정감이 스스로도 만족스럽다. 오히려 내 위주였던 20대, 시야가 좁아서 서툴렀던 그때와는 다른 너그러움이 훨씬 더 풍성한 감정을 만들어 내는 중이다. 한 가지에 치우쳤던 젊은 날과는 다른 다채로움은 구석구석이 풍요롭다. 시선이 넓어지며 타인의 이해도가 높아진 인생 시즌의 인연은 편안하다. 20대보다 50대가 훨씬 좋다는 상대방의 말에 충분히 동의된다.
불안하지 않은 만큼 허황된 과장을 하거나 치장을 하지도 않는다. 인연의 일이 어떤 것임을 살아오며 알았기에 억지를 부리지도 않는다. 인연의 유통기한이 있다면 그 또한 받아들일 여유를 늘 품고 있다. 둘 만의 일이라고 해도 둘 만의 의지만은 아님을 잘 알기에 '앞으로'에 대한 막연한 기대나 계획보다 현재에 충실하게 된다.
현재 존경하고 싶은 사람과의 인연이 시작되었고, 나는 현재에 집중 중이다. 평범한 사람이고 부족한 면도 많아서 인연과의 사이에서 실수를 할 수도 있고 실망을 줄 수도 있다. 마음이나 감정만큼 인연이 곱게 이어질지도 알 수 없다. 사람 사이의 일은 장담하지 말아야 한다는 뼈아픈 경험을 여러 번 했다. 좋은 일이 있으면 그렇지 못한 일이 찾아들고, 힘이 들 때는 위로가 되는 일이 생긴다는 것도 안다. 인생은 늘 총량의 법칙처럼 좋고 나쁨이 적당하게 조율되곤 했다. 인연 앞에서 겸손해야 함을 잘 안다.
머릿속 생각은 관두고, 설레고 들뜬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고 싶다. 좋은 마음만큼 좋아하고 훈훈한 심장만큼 따스하게 아끼고 싶다. 갑작스럽게 찾아든 귀한 인연을 조심스럽게 대하고 싶다. '앞으로'는 아무것도 모른다. 섣부를 짐작도 하고 싶지 않다. 기한이 정해져 있다면, 그 기한까지 최선을 다해 집중하고 싶다. 소설책을 펼치면 전개되는 스토리처럼 내 인생에 찾아든 놀라운 사간을 순수한 농도로 유지하고 싶다. 욕망도 아집도 고집도 자존심도 없는, 좋아서 좋은 게 전부인 아이처럼 마주하고 싶다. 인연의 길이를 짐작하지 않으며 짧으면 짧은 대로 길면 긴 대로 주어진 몫만큼 아름답게 지키고 싶다.
이 시즌이 내 인생에 어떤 의미일지 언젠가 알게 될 날이 올 것이다. 짧은 인연이건 긴 인연이건, 좋은 사람이건 그렇지 못한 사람이건 모든 경험은 지난 후에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지금의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종점이 어디인지 모른 채 출발했다. 어디까지가 주어진 경로인지, 내가 변경할 수 있는 것인지도 알 수 없다. 특별한 여행인지, 일상인지도 가늠할 수 없다. 여행이라면 짧은 여행일지, 긴 여정인지 일정도 알지 못한다. 의미는 미래에 맡겨두고 현재에 충실할 뿐이다. 귀하게 찾아왔으니 마음을 다 해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