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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서 Oct 30. 2024

엄마는 계모

방황하는 갱년기

"엄마 비가 와서 많이 들이칠 것 같아, 창문 닫을게요."


자다가 아들의 인기척에 알았어.라고 대답을 한 것 같다. 아침에 일어나니 들어온 줄 알았던 아이가 없다. 꿈이었나. 새벽에 내린 비의 흔적은 있는데 아들의 흔적은 없다. 벌써 며칠째 외박이다.



오랜 시간을 참아왔다고 생각했다. 아니, 숙고 후에 행동하는 엄마가 아니다. 본인의 감정 임계치가 끝까지 올라가서 혼자 터진 것뿐이다. "언제까지 외박할래. 네 나이에 그렇게 살아도 되니? 오래 사는 인생이라고 해도, 연령대에 해야 할 일은 있어서 그 시절이 지나면 힘들어! 지금 네가 그렇게 살아도 되는 인생 시즌은 아니잖아!" 톡으로 보내는 노란 말풍선이 터질듯한 기세다.     



"힘들어서 그래요."

"꽤 오래되었거든. 요즘만 그런 게 아니잖아. "

"계속 안 좋았어요. 보기 싫으면 내보내던가. 힘들 때마다 가족이라고 의지가 되질 않아. 남보다 못해"

아이의 말이 감정적으로 흐른다. 날카로운 반응에 대화의 주제가 꼬일 것 같아, 그만하고 싶었는데 손가락이 멈추지 않는다.     



"많이 아프구나, 힘들지. 이런 위로 누가 못해. 남들도 다 해. 아니 오히려 남들이 더 잘하지. 그거 뭐 어렵냐. 마음이 알아주는 척 말로 힘내라! 하는 거 뭐가 어렵겠어. 말한마디 하는 게 더 쉽지. 근데 말로만 알아주면 가족이냐? 너 이렇게 지내는 것, 남이 신경이나 쓸 것 같아? 너조차도 너를 내버려 두는데 엄마라서 못 보는 거잖아. 엄마가 간섭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엄마만큼 너를 지키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겠니?"    


  

이해도, 공감도 못해준다는 아들의 말에 "엄마도 이혼하는 과정에서 죽을 것처럼 힘들었어. 그래도 일상을 유지했어. 삶이 그래. 힘들어도 아파도 살아야 하는 게 삶이야."  엄마의  과거가 훈장도 아닌데, 충격적인 표현이 필요할 것 같아 이혼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너보다 아프지 않았겠냐는 동의를 강제로 구하는 제스처다. 지금 네가 겪는 문제 따위는 엄마의 수준에 미치지도 못하는데, 엄마보다 더 힘들어하냐는 비하도 살짝 있다. 이미 지난 아픔과 고통을  비겁하게 옐로 카드로 써버렸다.      



아이가 넘어지면 달려가서 "많이 다쳤구나, 얼마나 아플까." 위로하는 시간은 3초쯤 될까. "일어나야지, 아프니까 얼른 집에 가서 연고 바르자. 울면 더 아파" 라고 말하는 엄마다. 남의 아이에게는 잘 된다. 매일 벌어지는 일이 그런 일이라서 잘 안다.  눈에 안타까운 마음과 애틋함을 담고 친절한 말투로 '얼마나 아플까.'를 반복해서 말해줄 수 있다. 거기에  마음 한 자락 보태서 약간의 걱정도 해줄 수 있다. "아프구나, 힘들겠다. 보건실 다녀오자. 많이 아프니? 엄마한테 연락해 줄까? 잘 쉬고 아프지 말고 와." 콜센터 직원만큼이나 야들한 목소리로 우리 학급 아이들에게 말하듯이 아들에게도 같은 태도로 대했으면 엄마를 따스하다고 여기며 컸을까.       



아이가 싫다고 해도 우는 아이를 일으켜 세워서 상처가 번지지 않게 치료를 하고 흉터가 덧나지 않는지 신경을 쓰는 것이 엄마의 일이라 여겼다. 변명하자면, 처음에는 공감해 주고 도닥여 주기도 했다.  "아들 힘들지. 힘내라!" 멀리서 지켜보며 응원만 하겠다는 엄마의 의지를 전하려고 했다. 아픈 일을 겪고 있음을 알기에 일상으로 회복하기까지 지켜보려 했지만, 예상보다 길어지고 있었다. '저렇다 못 돌아오면 어쩌지.' 걱정이 제곱처럼 늘어나며 속으로 삼켜두었던 소리가 밖으로 터졌다.



"넌 왜 자꾸 넘어지니. 이번엔 언제 일어날 거니. 정신 차려야 하지 않아?"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말을 이번에도 넘치게 뱉었다. 터진 김에 "그렇게 하다가는  또 넘어진다." 잔소리도 반복해서 덧붙였다.      



"네 사주에 엄마는 계모야. 겨울의 화초에게는 햇볕이 간절한데, 추운 날에 얼음물이 떡하니 버티고 있잖아. 동짓달 샘물이 얼마나 차겠어. 너에게 샘물이 엄마거든. 그러니 엄마 말이 시리게 들리지. 근데 엄마 말이 맞기는 해서 도움은 돼. 엄마가 너에게 천을귀인이거든. 네 사주대로라면 나 아니더라도 네 엄마는 계모스타일이야. 그러니 받아들이셔!"  아들과 사이좋게 대화를 할 때는 운명 탓으로 돌리며 수용을 강요한다. 위로가 아니라, 포기하라는 표현이다.      



아이가 이십 대 중반이니 더 이상의 간섭은 횡포라고 여긴다. 위장에서 올라오는 쓴 물을 다시 넘기듯이 일단은 삼키며 참아본다. 아이로 인해 속이 복닥거리면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을 들으며 마음을 다스린다. 엄마가 성인인 아들의 삶에 대해 떠드는 것은 선을 넘는 일이 분명하다. 알지만 실천이 어려워서 안될 때마다 책을 읽고 방송을 들으며 내려놓으려 노력한다. 오십이 넘도록 내 인생도 모르겠는데 아들의 인생에 참견하는 건 지나친 일이다. 평상시 진로나 공부 문제로 엄마의 의견을 구하면, 조언을 삼가는 편이다. "이제 엄마도 나이가 많아서 시대를 못 읽어. 네가 나보다 세상을 더 잘 알 거야. 엄마가 해줄 조언은 없다고 생각해."      



이번에도 그랬어야 했다. 엄마는 잘 모르니까, 네가 알아서 잘할 거라고. 넘어진 김에 쉬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으니 행여  주저앉은 시간이 길어도 언젠가는 일어날 거라는 믿을을 가지는 게 나았다. 궤도에서 이탈했다가도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돌아온다는 것을 살다 보니 알겠기에. 마음을 다스렸지만 실패했다.  과도하게 아는 척을 했다. 결국 남는 것은 후회뿐이다.

 


머리는 실패를 인정하는데, 마음은 다른 소리를 한다. '성인 자녀는 넘어졌을 때 일어나라고 채근하고 씩씩하게 부축해 주면 안 되는 거냐고. 엄마라도 해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변명이 하고 싶은 모양이다.

' 주저앉을 때마다 일으켜 세워줄 거냐고. 주저앉건, 눕건 지 알아서 하게 내버려두어야 한다'는 법륜스님의 음성이 내 목소리를 낚아채지만 말이다.      



찬바람이 부는 외모와 다르게 마음은 개복치. 여린 구석이 있다. 아들이 엄마를 닮았다. 엄마의 독이 서린 말에 결국 "알겠어"로 답한다. 힘들어도 일상을 살아야 한다니 "강아지 산책 시키고 밥 주고 나갈게요." 톡을 보낸다. 엄마 마음이 더 꼬인다. 개입이 아니라 스님의 죽비라고 여기고 싶었는데, 이번에도 계모였다. 팥쥐 엄마처럼 엄동설한의 찬 샘물을 여물지 못한 속살에 부어 버렸다.



같은 실수는 아이가 하는 게 아니라 엄마가 한다. "이번에도 또 실수야. 매번 같은 실수를 하면서 사니! 넘어진데 또 넘어지고 다친데 또 다치고. " 아들이 아니라 내가 들어야 하는 말이다. 오십이 넘었으니 그렇게 살아도 되는 인생시즌이 아닌데 매번 똑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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