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쯤 그가 나오려나, 안절부절 기다린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어쩌면 지하철 한 구간 지날 만큼 짧은 시간이었을 텐데 버스를 코 앞에서 놓치고 새 버스를 기다리는 것만큼이나 오랜 시간이 흐른 듯했다. 그의 이름이 핸드폰에서 떴다. 함께 술을 마셨던 가게의 입구를 쳐다보니 나에게 전화를 걸며 두리번거리는 그가 보였다.
영문을 모르는 얼굴엔 이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나를 그에게 소개해 주고 싶었다는 지인의 남자친구가 빨리 나가보라면서 다그치길래 나왔다는 그는 자다가 깬 얼굴 같기도 했다. 평소 술을 잘 마시지 못해서 한두 잔 마시면 잠이 드는 버릇을 가지고 있다더니, 나와 지인이 밖에서 이야기하는 사이에 졸다가 깜짝 놀라 깼는가 보다.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 알면서도 말을 건네기 어려운 순간, 할 수 있는 것은 걷는 일뿐이었다. 늦은 시간 신촌을 걸었다. 걷다 보니 진지한 대화를 해야 할 것 같아, 카페에 들어가서 차 한 잔을 시켰다. 마음 같아서는 술 한 잔을 마셔야 이야기가 나올 것 같았지만, 조용하게 이야기하기에는 카페가 나아 보였다.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매뉴얼이 있다면 준비라도 했을까. 전화 통화를 마무리하며 '내일 이야기 하자'고는 했지만, 상황이 어떨지 몰라 시나리오를 짜두지는 못했다.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더라도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인생이고, 여러 번 해봤어도 실수가 있기 마련인데 이번 사건은 인생 처음 해보는 경험이라 더 어렵다. 어려울 때는 그저 직관적으로 눈치껏 풀어야 한다. 정답을 맞힐 확률은 반반. 그가 오케이를 하거나, 거절을 하거나 두 가지 중 한 가지뿐이다. 어떤 신호를 보낼지 마음으로 받아들이면 된다. 어떤 의도건 수용하겠다는 마음가짐만으로도 벅차서 여러 가지를 생각할 겨를도 없었기에.
매너가 좋고 배려가 뛰어난 사람이라고 해도 이성 관계에서는 좋고 싫음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매너가 좋다면 나에게 다가오는 이성에게 호감이 가지 않을 때, 정확하게 의사를 표현하는 것이 맞다. 어디서 들은 이야기인지는 몰라도 아닐 때는 단호한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그날의 기억은 명확하지 않다. 선명한 것은 그의 몸짓에서 느껴지는 신호들 뿐이다. 차를 시키고 카페에 나란히 앉아서 시작한 대화의 느낌은 허락이었다. 무릎을 맞대고 나눈 대화는 온도는 '시작'이었다.
"우리 알아 가기로 해요."
그는 섣불리 정답을 말하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건넨 말은 서로를 알아가자는 것이었고. 과정의 첫 단추를 끼우듯, 자신에 대한 정보를 들려주었다. ' 나를 소개해준 지인이 좋은 이야기만 했겠지만, 그들도 모르는 부분이 있다. 내가 이런 경력을 가진 사람인데 그래도 내가 좋겠느냐.' 며 단점부터 풀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나면 깜짝 놀랄 거야. " 그는 입버릇처럼 말하곤 한다. 어떤 사람인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호감을 가질 수 있다는 게 신기한지, 겁도 없이 호감을 표현한 나에게 고마움을 자주 표현한다. 남녀 사이 오가는 호감의 교류란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이다. 왜 상대에게 호감을 느꼈는지 알 수 없다. 이미 호감을 느끼고서 이유를 붙이는 것이라고 뇌과학에서도 설명한다. 그가 마음에 든 이유를 알지 못한다. 자석이 끌리는 이유가 따로 없는 것처럼.
호감이 있다고 해도 상황이 어려우면 함께 할 수 없다. 우리는 거침없는 20대 청춘이 아니다. 가정이 있었고, 배우자와 헤어졌으며 다 컸다고 해도 아이를 양육하는 양육자다. 호감이 발전해서 좋아하는 마음이 있더라도 현실의 이유로 인해 서로의 마음을 받아줄 여유나 여력이 없을 수도 있다.
돌싱의 연애는 그래서 어렵다. 아이가 어려서, 아이를 양육하다 보니 시간에 쫓겨서, 아이가 이해해주지 못해서, 이혼하고 아이를 키우며 경제적으로 어렵고 힘들어서, 등등. 서로의 마음을 받아들이고 허락한다 해도 맺어지기 어려운 이유들이 괜찮은 이유보다 훨씬 많다. 현실 조건이 괜찮아서 마음을 열고 인정한다 해도, 각자의 여건이 달라 오래 이어지기 어려운 경우도 많이 보았다. 가벼운 마음으로 몇 번 만나고 말 사이라면 굳이 장애물을 넘지 않아도 되지만, 한 번 마음을 주면 오래 주어야 하는 깊은 관계는 유지되기가 쉽지 않다. 이혼이 결혼의 실패는 아니지만, 상처의 기억은 두려움으로 작용하기에.
호감을 표현하기까지도 어려웠는데, 어떻게 작용할지 모를 변수까지 고려하고 싶지 않았다. 용기 낸 만큼 일단 부딪혀 보기로 했으니, 그의 말대로 해보기로 했다. 서로를 알아가기로 했다. 그가 설명하는 '알아감'과 내가 이해하는 '알아감'은 전혀 다른 영역일지도 모른다. 그는 국어 영역을 풀어가려고 하는데, 나는 수학 문제를 풀 준비를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열심히 풀었는데 다른 시험지를 풀고 있었다며 허탈해 할 수도 있겠지만, 다시 방법을 찾을 수도 있다.
카페 마감 시간이 되어서 일어섰다. 집으로 가는 버스 정류장까지 함께 걸었다. 그가 손을 내밀길래 내 손을 맡겼다. 체온을 전하는 손의 느낌이 좋았다. 알아가자는 표현이 허락인지 거절인지 잠시 헷갈리기도 했는데, 손을 잡는다면 완벽한 허락이다. 마음이 개운했다. 그가 나를 알아가고, 내가 그를 알아가는 과정에 두려움도 있겠지만 온마음을 다하는 일이니 그만큼 기쁘지 않을까? 호감을 느낀 그가 아무래도 좋은 사람 같단 예감에 기대와 설렘이 차올랐다. 버스 창밖으로 그를 바라보며 창문에 비친 내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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