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병모 소설 절창 : 타인을 읽는 일

by 루서

#구병모 #절창 #비트겐슈타인 #말할수없는것은침묵해야한다



영화로 만들기 딱 좋은 서사 구조이다. 구병모의 소설은 그래서 '읽다'가 아닌 '보다'가 더 잘 어울린다. 독자가 아니라 관객으로 작가를 따라가는 기분. 아이러니하게도 작가는 읽어내야 하는 문학을 시각적인 문화 장르로 만들어 버리고선, '타인을 읽는 일'을 사건으로 만들었다. 평범하지 않은 창의적인 서사 구조의 핵심은 '읽다'로 귀결된다.



작품은 친절하지 않다. 알아서 짐작하고 이해해야 한다. '읽다'라는 행위는 여기서 한 번 더 앙큼해진다. 읽어내는데도 명확하질 않다. 문제집을 샀는데 정답지를 잃어버린 기분이랄까. 작가의 의도, 부여된 의미를 분석하기보단 읽는 내내 질문만 떠올린다. 처음부터 시작된 질문은 마지막에 이르러서도 마찬가지다. 책장은 덮었는데,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



'읽다'라는 행위는 '거짓'이기 쉽다. 작가의 의도는 그러하지 않았는데 독자가 느끼는 감성은 다르다. 창작자의 의도를 오해할 수 있다. 언젠가 수능에 본인의 시가 나와서 풀어보았는데 다 틀렸다는 시인의 말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작품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르게 해석된다. 세상 밖으로 나온 갓난아기를 입히고 먹이고 꾸미는 방식이 모두 다르듯, 문학은 만나는 임자에 따라 달라진다. 작가들은 세상 밖으로 나온 작품의 주인은 독자라고 말한다. 어떤 독자를 만나느냐에 따라 작품은 다르게 성장한다.



정확하게 종이에 박힌 글자도 해석이 다르고, 달라진 해석이 전해지면 한 번 더 가공되는데, 사람을 읽어내는 일은 어떨까? 누군가의 마음을 읽어내는 일, 타인을 파악하고 해석하는 과정이 과연 진실일까? 틀릴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그보다는 주인도 제 마음을 몰라 정답이 없으니, '모두가 정답'이 의미적으로 가깝겠다. 마치 시험문제를 잘못 내는 바람에 모두가 정답처리 되는 것처럼.



'내 마음이 이러니 네 마음도 이럴 것이다.', '사람 사는 게 비슷비슷한데 뭐 그리 다르랴.' 통속적인 삶의 경험이 누적될수록 사람을 알아가고 읽어가는 일이 익숙하다고 착각한다. 만나는 타인마다 처음 접해서 쉽지 않을 텐데 사람 한 두 번 겪는 거 아니라며, 여러 번 해봤으니 뻔하다고 여긴다.



비트겐슈타인인 그랬던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해야 한다.'라고. 이런 말도 했다.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 그의 철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가볍게 나불대자면, 쉬운 개념어조차 각자 떠올리는 이미지가 달라서 언어를 명확하게 이해하는 것은 어렵다는 의미 같다. 지극히 친밀하고 가까운 가족조차 '사랑'에 대한 정의는 모두 달라, 어긋나지 않을까.



부모 없이 보육원에서 자란 '아가씨'에겐 특별한 능력이 있다. 타인의 상처를 만지면 그 사람의 생각이 모두 읽힌다. 언어를 거치지 않고 이미지로 바로 투영된다. 그 사람의 뇌가 통째로 그녀에게 들어온다. 그녀가 읽는 행위에 언어는 없다. 그녀의 매개체는 언어가 아닌, '상처'다.



작가는 '누군가를 읽어내는 일의 본질적 핵심은 상처에 있다. 상처를 알아야 존재를 아는 것이다'라는 명제를 던진 것 같다. '존재의 이해는 상처다.'를 여행자의 지도처럼 수시로 꺼내어 생각하며, '상처'와 '읽기'의 연결고리를 반복해서 물어보게 된다. 나와 다른 존재를 이해하고 공감하려면 가장 필요한 것이 상처일까. 그렇다면 우린 한 명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지도 모르겠다. 가장 가까운 사람의 상처는 읽기가 두려우니까. 아가씨처럼.



그녀가 읽어내는 것은 상처다. 언어는 필요하지 않다. 언어를 거세한 사건을 따라가다 보면 질문이 계속된다. 언어를 매개로 타인의 생각을 읽어내는 우리가 타인을 안다고 할 수 있는 걸까? 타인을 알지도 못하면서 그 사람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는 건 아닐까? 의심이 든다. 비트겐슈타인의 명언이 적용된다. 말할 수 없는 것에 침묵하라 했으니 타인에 대한 증명은 우리로선 불가능하다.



조직의 팩트체크를 위해서,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 배신의 보복을 위해서 타인을 정확하게 읽어내기는 가능한데, 막상 가장 가까운 '문오언'의 마음은 들여다보지 않는다. 소설에서 유일하게 이름이 존재하는 주인공 문오언. 그의 이름을 한자로 해석하면 한 번 더 작가의 심오한 의미가 보이는 것도 같다.



아가씨가 절대 문오언의 마음을 읽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이유를 이해했다. 폭력이 오가는 소설 구조가 특이할 뿐, 우리의 일상으로 가져와도 비슷하기 때문이다. 굳이 알아야 할 이유가 없는 타인의 마음과 생각은 읽어내기 위해 애쓰면서 가장 가깝거나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은 잘 들여다보질 못하기 때문이다.



피와 폭력과 감시가 난무해서 19금 영화로 보이는 작품 사이를 처음부터 끝까지 흐르는 묘한 감정이 있다. '문오언이 아가씨를 아가씨가 문오언을 사랑하는가'라는 질문이 반복되는데, 헷갈리는 의문은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러야 드디어 알 수 있다. 킬링타임 영화처럼 '읽기'가 벅찬 사람도 순식간에 '읽어 낼 수 있는' 흥미진진하면서 재미있는, 대중적인 소설의 주인공은 아이러니하게도 본인의 마음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읽어내기엔 '사랑'이 제일 힘든 건가 보다.




반전 영화처럼 소설에도 반전이 있다. 전혀 생각해보지 못한 반전이다. 전작 '파과'는 짐작 가능했다. 주인공은 알 수 없는 복수의 이유를 독자가 알 수 있도록 친절하게 설명했다. 절창은 그에 비하면 불친절하다. 예리한 독자라면, 반복되는 설정에 반전을 미리 짐작했을 수도 있겠다. 나는 미처 생각해내지 못했다.



구병모 작가의 소설이 영화 같은 이유는 '복수' 때문인가 보다. 그래서 '여자 박찬욱' 같단 느낌도 받는다. 박찬욱 감독은 현대 사회의 문제를 영화에 녹여 치밀하게 보여준다면, 그녀는 문학에 대한 원론적인 고민을 치밀하게 담아낸다는 인상이다.



가볍게 읽어내기 좋아서, 소설 한 편으로 시간 잘 보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곱씹으면 달라진다. 웰메이드 영화의 복선처럼 소설 사이사이 생각할 거리들이 많다. 추리소설을 읽으며 예상하듯 작가가 쪼개놓은 퍼즐을 맞춰가며 평소에 생각하기 어려운 주제를 떠올리게 된다. 한 때 소중했던 철학가들의 명언을 다시 찾아보며 작가의 의도를 고민해 본다.




타인을 이해하는 일, 특히 마음을 정확하게 읽는다는 것은 특이한 소설의 소재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니 조심해야 한다는 전래동화 같은 교훈이 가슴에 남는다. 남의 말 함부로 하지 말자고. 말할 수 없는 건 침묵하라는 비트겐슈타인의 명언이 그 의미가 아니더라도, 불필요한 오해는 하고 살지 말자고. 더불어 말을 전하거나 퍼뜨리지 말자고.






소설은 트렌디한데 독자에겐 교훈 가득한 전래동화가 되어 버렸다.





'마음을 상처로 읽어내는 그녀가 책을 읽고 독서 수업을 위해 과외 교사를 들이는 것부터가 재미있는 설정이다. 소설 구석구석 일부러 어긋나게 배치한듯한 작가의 예리함이 수려해서 결론을 내지 못한(나의 착각이겠지만) 작가의 '읽다'를 계속 질문 중이다.



'읽기'가 그토록 어려운 일이라면,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작가한테 행운의 편지를 받은 기분이다. 고민을 끝내지 못한 작가로부터 이어받아 누군가에게 넘기기까지 계속 고민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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