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직장에서 일을 시작한 지 딱 1년이 되던 2023년 겨울. 무려 3년 만에 해외 여행을 떠났다. 스웨덴 교환학생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2020년에 코로나가 터지면서 해외로 가는 발길이 끊기고, 졸업 후엔 취업 준비를 하느라 시간이 빠르게 흘러가 버린 탓이었다.
오랜만의 여행이라 설렘이 컸지만, 자유롭게 유럽을 누비던 교환학생 시절과는 상황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직장인에게 자유는 딱 남은 연차 개수만큼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립지만 머나먼 유럽 대신 가까운 일본을 택한 친구와 나는 도쿄 다이칸야마의 거리를 걷게 되었다. 지하철 선로 위로 붉게 물들어가는 노을을 바라보며 골목골목 거닐다 보니 순식간에 밤이 찾아왔다. 하루가 또 저물었다는 아쉬움도 잠깐, 건물마다 노란 불빛이 스미자 거리는 낮과는 또 다른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 아름다움 속에서 우리의 시선은 어느 건물에 꽂히게 되었다. 하얀 타일로 마감된 네 층짜리 건물, 그리고 왼편 외벽을 따라 부드럽게 이어진 나선형 계단. 한국에서는 흔히 볼 수 없던 독특한 구조였다.
당시 가구 산업 마케터로 일하던 나와 리빙 매거진 에디터로 일했던 친구는 건축적 매력에 압도되어 이야기를 나누며 한참 동안 그곳을 바라보았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영화 <너의 이름은> 속 여주인공이 입에 빵을 문 채 저 계단을 휘감아 내려오는 듯한 장면이 저절로 그려졌다.
나의 상상 속 인물이 계단을 다 내려오기도 전에, 놀라운 장면이 펼쳐졌다. 정말로 건물 3층에서 한 소녀가 문을 열고 나왔다. 어딘가 급한 약속이라도 있는 듯, 그녀는 주저 없이 나선형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소녀의 모습은 계단을 따라 반복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거듭했다. 3층에서 내려오며 난간에 가려졌다가 다시 2층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2층을 지나며 또다시 가려졌다가 1층에 가까워지며 완전히 나타나는 흐름이었다.
마치 예술성에 집착하는 감독이 정교하게 설계한 컷처럼, 조명과 건물, 인물과 움직임이 우아하게 어우러졌다. 모든 것이 하나의 프레임 안에 담긴 완벽한 미장센처럼 보였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영화 같은 순간을 목격하니 어쩐지 소녀의 삶이 부러워졌다.
하지만 머릿속에서는 이내 다른 시나리오를 써내려갔다. 사실 소녀는 지금 아르바이트를 가며 속으로 투덜거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 건물은 왜 엘리베이터가 없는 거야!’라고 불평하면서 매일 이 계단을 오르내릴 수도 있다. 아니면 오늘따라 날이 춥다며 아무런 감흥 없이 길을 재촉하는 중일 수도 있겠다.
그렇게 상상하니, 방금 전까지 낭만적으로 보였던 장면이 갑자기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내게는 아름답고 완벽해 보이는 순간이, 정작 그녀에게는 그저 평범한 일상의 일부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반대로, 나의 일상도 누군가에게는 영화처럼 보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출근길에 바삐 걸음을 옮기는 모습, 점심시간에 커피 한 잔을 들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쉬는 순간, 다이칸야마에서 친구와 함께 건물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지금 이 장면, 그리고 숙소로 돌아가며 지하철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는 찰나까지도. 어쩌면 우리의 평범한 하루하루도 한 편의 영화가 되겠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