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여름, 고등학교 동창 친구들과 인생 첫 유럽 배낭여행을 떠났다. 영국에서 시작해 프랑스, 스위스, 폴란드, 체코, 오스트리아, 헝가리까지 총 7개국을 거치는 한 달간의 여정이었다.
유럽에 대한 환상으로 가득 찬 풋풋했던 시절이라 런던 히드로 공항에 도착해 지하철을 타고 도심으로 향하는 순간, 공기마저 낯설고도 설레던 기억이 난다.
런던 3일차에 우리는 노팅힐(Notting Hill)로 향했다. 휴 그랜트와 줄리아 로버트의 로맨스를 그린 영화 제목으로도 익숙한 이곳은 사랑스러운 곰돌이 <패딩턴> 영화 속 가족들이 사는 동네이기도 하다. 그 덕분에, 내 머릿속에서 노팅힐은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동네로 자리 잡고 있어 영화 같은 풍경이 우릴 맞이할 것이란 기대가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마주한 노팅힐은 생각과 조금 달랐다. 흐린 하늘 아래, 회색빛 거리에는 잔뜩 눅눅한 공기가 내려앉아 있었다. 따스한 햇살 속 알록달록한 주택을 상상했건만, 건물들의 외벽은 바랜 듯 희미했다. 사람들의 대화와 웃음소리로 가득한 활기찬 거리를 기대했지만, 이날의 노팅힐은 음울하고 차분했다.
“ 뭔가… 생각했던 분위기는 아니네.”
불쑥 입 밖으로 튀어나와 버린 실망감을 달래려 우린 자그마한 상점들을 하나씩 들어가 봤다. 꽃집, 베이커리, 작은 빈티지 숍까지. 그렇게 거리를 걷던 중, 유난히 붐비는 어느 초록빛 상점 앞에서 발길을 멈췄다.
ATLAM이라 쓰인 초록 가게 앞에는 카메라 장비들이 늘어서 있었다. 근처에 모인 스태프들은 한껏 집중한 듯 진지한 표정으로 서 있었고, 그 모습만으로도 무언가를 촬영 중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호기심에 이끌려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자, 헤드셋을 쓴 남자가 조심스럽게 손가락 하나를 입술 앞으로 들어 올리며 “쉿” 하는 신호를 보냈다. 순식간에 거리는 고요해졌고, 가게 안쪽에서는 남녀 배우 한 쌍이 움직이는 듯했지만, 창문 너머로는 희미한 실루엣만이 어른거렸다. 시각과 청각이 모두 차단되자, 머릿속엔 이런저런 상상이 피어올랐다.
‘지금 저 안에 유명한 배우가 있는 건 아닐까? 지금 촬영 중인 작품이 나중에 엄청난 명작이 되어있을 수도 있겠다. 어쩌면 카메라 렌즈 어딘가에 유리에 비친 내 모습이 찍혔을지도 몰라!’
그러다 문득, 이 거리가 하나의 거대한 영화 세트장처럼 느껴졌다. 현실을 벗어나 허구의 세계에 들어선 듯한 기분. 그 세계에 가까워질수록 주변의 소음은 점점 멀어지고, 마음은 한없이 붕 떠올랐다.
몽롱해진 나를 현실로 되돌려놓은 건, “다음 장소로 가자”는 친구의 말이었다. 아차 싶어 정신을 붙잡고 발걸음을 옮겼지만, 이미 내 걸음은 스크린과 현실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고 있었다. 나조차 인식하지 못한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