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지나온 만큼 나다워진 길

by 수경

삶을 너무 더디게 살아간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남들이 올곧게 앞으로 세 걸음을 나아갈 때, 나는 왼쪽 오른쪽으로 한 걸음씩을 걸어보고 나서야 비로소 앞으로 한 발짝 내디뎌 온 것 같다는 생각.




대학교 2학년쯤, 졸업 요건을 충족하기 위해 복수전공을 선택해야 했다. 관심 있는 전공이 많아 다 펼쳐 놓고 고민해 봐도 결론이 나지 않았기에 결국 컴퓨터공학, 독어독문학 등의 강의를 직접 들어보기 시작했다. 그중 가장 재미있던 심리학에 정착할 수 있었지만, 이 결정을 내리기까지 두 학기나 흘러버려 부족한 학점을 채우러 계절학기를 수 차례 등록해야 했다.


나중에서야 깨닫고 웃음이 나왔던 것은, 내가 고등학생 시절 가장 희망했던 전공이 바로 심리학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꿈꿔왔던 길인데도 나는 그것을 묻어두곤, 직접 모든 탐색을 마친 끝에야 다시금 제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마치 이미 정해진 목적지를 두고도 돌고 돌아 천천히 도달한 기분이었다.




돌이켜보면 이렇게 내 인생은 단번에 빠른 길로 걸어오지 못한 순간이 많았다. 그래서 어린 나이부터 괄목할 만한 성과를 만들어내거나, 뚝심 있게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는 사람을 부러워하곤 했다. 그리고 그 부러움은 빈번히 스스로에 대한 비난과 한탄으로 이어졌다. 왜 나는 이렇게 느릴까, 이룬 것 하나 없이 초라할까, 보잘것없을까.


그런 마음으로 최근까지도 지내오다가 어느 무료했던 밤, 애니메이션 영화 <카>를 다시 감상하게 된 일이 있었다. 영화에는 번개 같이 빠른 속도를 자랑하는 자동차, '라이트닝 맥퀸'이 등장한다. 그는 경주에서 우승하는 것만이 삶의 전부라 여기며 언제나 남들보다 빠르게 결승선을 통과하는 데에 집중해 살아간다. 그러다 우연히 지도에도 표시되지 않는 버려진 길 '66번 국도'에 머물게 되면서, 자신만의 속도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이들을 만난다. 그리고 그들과의 교류를 통해 서서히 깨우치게 된다.


목적지에 빠르게 다다를 수 있는 고속도로와 달리, 느리게 돌아가는 66번 국도만의 넘볼 수 없는 아름다움이 있음을. 삶을 살아가는 데에 있어 중요한 건 목적지가 아니라 여행하는 과정 자체라는 것을.


이 영화를 보면서 내가 여행하며 만난 수많은 66번 국도들을 떠올렸다. 축제가 열리고 있던 도쿄의 빌딩 사이 숨겨진 골목, 지도에 없었지만 예쁜 노란 꽃 가득했던 라고스의 바닷길. 빠르지는 않더라도 고유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던 느린 길들. 나의 여행을 더 나의 것으로 만들어준 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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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요즘에는 느린 길이 더 많은 것을 보여주고, 나다움을 더 단단히 만들어준다는 생각을 한다.


그 시각으로 다시 나의 전공 방랑기 시절을 짚어보면, 그때 독어독문학에 발을 담근 덕분에 독일어를 조금 읽을 수 있게 되었고 'Glück(행복)', 'Tschüss!(안녕!)'라는 단어를 좋아하게 되었다. 컴퓨터공학을 공부했던 덕분에 IT 분야에 관심을 이어올 수 있었고, 1인 게임 개발에 도전할 마음을 먹을 수 있었다. 비록 개발의 벽은 높아 1인 플레이는 실패했지만, 현재 개발자 지인들과 서비스 및 게임 제작 프로젝트에 계속 도전하고 있다. 느린 길이 내게 남긴 것들이다.


여전히 나는 느린 길을 걷고 있다. 빠르게 앞서 나가는 이들을 보며 초조하고 불안해질 때도 있지만, 이제는 안다. 내가 걷는 이 길이 비록 느릴지라도 그 속에서 나만의 속도로 단단해지고 있음을. 목적지에 도착하는 속도보다 내가 그 과정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끼며,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지가 중요함을. 언젠가 돌아보았을 때, 이 길 위의 모든 순간들이 결국 나를 가장 나다운 곳으로 데려다줄 것임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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