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친구와 퇴사를 했다. 같은 직장을 다녔던 것은 아니지만, 시기가 같아 얼떨결에 퇴사 동기가 되어버린 우리였다. 한번 직장 생활을 해 보니, 친구와 시간을 맞춰 여행을 하는 게 참 어려운 일이라는 걸 깨우친 우린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10박 12일 포르투갈 여행을 떠났다.
첫 도시는 포르투갈 남쪽에 위치한 바다 마을 라고스. 자유를 찾아 떠나온 만큼 어떠한 의무에도 얽매이고 싶지 않았기에, 2박 3일간 계획해 둔 일정은 오직 세 가지였다.
1. 끝내주는 바다 보기
2. 끝내주는 노을 보기
3. 끝내주는 문어 샐러드 먹기
위대한 첫 번째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우린 '도나 아나(Dona Ana)' 해변으로 향했다. 구글맵의 파란 점선을 따라 걸은지 20분쯤, 알 수 없는 이유로 핸드폰이 먹통이 되어버리고 마는데. 놀랍게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그저 우두커니 서 있게 되었다. 아직 한참을 더 가야 하던데 어쩌나 걱정하던 중, 저 멀리 누군가 말을 걸며 다가왔다. 마라토너와 같은 복장을 입고 조깅 중이던 백발의 할아버지였다. 그는 알아들을 수 없는, 아마도 포르투갈어로, 무어라 계속 외치고 있었다. 당최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어 귀를 기울여보니, 기다란 외계어 사이로 딱 한 개의 반가운 단어가 귀에 꽂혀 들어왔다.
“ 도나 아나!”
그 즉시 우리도 '도나 아나, 도나 아나!'를 따라 외치며 화답했다. 우리가 그곳에 가려는 건 어떻게 알았을까, 신기한 마음에 어쩌면 우리를 위해 나타난 요정이 아닐까 하는 재밌는 상상에 젖어들게 되었다. 그렇게 할아버지와 마주 보고 '도나 아나'를 주고받다 보니 영화 속에서 비밀 암호로 거래하는 스파이가 된 것 같기도 했다.
드디어 대화가 통한다는 기쁨에 이내 할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후련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곤 힘차게 다음 문장을 말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못 알아듣진 않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도 우리가 어린 시절부터 배운 그 익숙한 문장이 등장했다.
“ Turn left, go straight, turn right!”
사실 할아버지가 알려준 길은 지도에 나와있던 방향과 전혀 달랐지만, 그 당당한 표정을 보니 왠지 믿음이 갔다. 잠시 후 다시 산책을 이어가겠다며 서서히 멀어지는 뒷모습에 연거푸 감사 인사를 전하며, 우리는 왼쪽으로 몸을 돌렸다.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는 흙길이었다. 그 길의 끝에는 정돈되지 않아 자연스레 어질러진 풀밭 속에 거대한 주택 한 채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사람이 오랫동안 머물지 않은 듯 어둡고 고요한 집이었다. 할아버지가 잘못된 길을 알려준 것은 아닐까,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안에 잠겨있다 보니 금세 주택 앞에 도달했다. 그리고 마지막 미션이었던 'turn right'을 수행하려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린 순간, 예상 밖의 엄청난 풍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거대한 라고스의 바다를 관망하며 걸을 수 있는 데크길이었다. 라고스의 모든 해변을 연결하는 일종의 성지순례길인 듯했다. 데크길 너머 저 멀리 보이는 파란 하늘과 바다, 지층이 겹겹이 쌓여 융기한 주황색 토양, 그 위로 푸릇푸릇 자라난 풀잎들까지. 이 광경을 마주하는 순간 정말 입 밖으로 터져 나오는 감탄사를 막을 수가 없었다.
왼쪽으로 펼쳐지는 바다에 감탄하다 고개를 내려보면, 발아래에는 푸른 초원 곳곳 노란 들꽃이 가득했다. 팀 버튼 감독의 영화 <빅피쉬> 속 노란 수선화 밭이 생각나는 풍경이었다. 그만큼 비현실적으로 황홀해서, 나의 라고스 여행기도 언젠가 <빅피쉬> 주인공의 아버지가 늘어놓은 허구인 듯 허구 아닌 삶의 이야기처럼 들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과 같이 말한다면.
친구와 함께 보물섬을 찾아 모험을 떠났을 때야. 항해를 하던 중 방향키가 부러져 바다 한복판에서 표류를 하게 되었지. 도무지 헤쳐나갈 방법을 모르겠어 포기할 때쯤 저 멀리 파도를 타고 작은 통통배가 밀려왔어. 그 배에는 나이 든 선원이 한 명 타고 있었는데, 자기가 보물섬으로 가는 길을 알려주겠다더군. 지도를 받아 들고 맹그로브 숲을 지나, 버려진 섬을 지났어. 그 여정 끝에 우린 보물섬을 찾았지만 그곳은 여느 섬과 같은 곳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지.
하지만 실망하지 않았어, 중요한 건 그곳을 향해 가는 여정에 있었거든.
실제로 몇 걸음을 이어가 우리가 찾아 헤매던 도나 아나를 마주하게 되었지만, 데크길을 걸을 때만큼의 감동은 없었다. 목적지가 아닌 여정이 주는 기쁨에 압도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도나 아나에 도착해서 이런 생각을 했다. 구글맵이 추천하는 길은 언제나 아스팔트 도로일 수밖에 없다. 빠르고 편리한 이동을 위해 가장 잘 정비된 길을 안내하는 게 당연할 테니 말이다. 하지만 아침마다 그 동네에서 조깅을 즐기는 할아버지만이 아는, 가장 아름답고 낭만적인 길은 알려주지 않는다. 그래서 훗날 내가 다시 포르투갈 라고스를 찾게 된다면, 그곳에서 우연히 도나 아나를 찾는 누군가를 마주한다면, 나 역시 주저 없이 이 길을 알려주고 싶다. 빠름보다 여유를, 목적지 보다 여정을 즐기게 하는 이 아름다운 느린 길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