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이 거기 있어, 나는 오늘도 걷는다

겨울 산길, 가랑잎 내음 속에서 배운 담담한 순응

by 할미꽃

옛 영화 속 한 장면이 생각난다. 산에 왜 오르냐는 질문에 "산이 있어서"라고 답했다는 그 간결한 문장이 오랫동안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나는 지금 길을 걷고 있다. 누가 내게 왜 그렇게 날마다 길을 걷느냐고 묻는다면, 나 역시 "길이 있어서"라고 답할 것이다.

겨울의 산길은 그 나름대로의 멋이 있다. 무거운 나뭇잎을 다 떨구고 알몸으로 서 있는 나무들을 보면 마음까지 시원해진다.

무성한 잎에 가려서 보이지 않던 저 건너의 풍경이 비로소 보이는 순간, 비워냄으로써 더 멀리 보게 되는 역설을 배운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코끝을 스치는 것은 청량한 솔내음이 아니다. 한 계절을 다 살고 내려앉아 묵묵히 삭아가는 가랑잎의 구수한 내음이다. 화려하진 않아도 숭늉처럼 깊은 그 향기는 걷는 이의 마음을 발밑부터 차분하게 붙들어준다.

산길 쉼터에 앉아 겨울 끝자락의 햇볕을 받으며 무심히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 문득, "다시 피어날 진달래를 볼 수 있을까" 하고 나지막이 읊조려본다. 누군가는 이를 늙은이의 상투적인 넋두리라 할지 모르나, 나에게 이것은 삶을 향한 지독한 짝사랑이다. 저 앙상한 가지 어디에 그토록 고운 분홍빛이 숨어 있는지, 모진 바람을 견디고 다시 꽃을 피워낼 생명력이 대견해 미리 마음을 써보는 것이다.

산이 거기 있고 길이 거기 있어 나는 오늘도 걷는다. 구수한 가랑잎 내음이 발길을 붙드는 이 길 위에서, 나는 비로소 가장 나다운 보폭으로 삶과 나란히 걷는 법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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