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석 주머니 두 번째 이야기
성당 마당 한편, 성모 동산 앞에는 촛불 봉헌대가 있다. 그 안에는 소주잔만 한 유리컵에 담긴 빨강, 분홍, 노랑의 초들이 저마다의 염원을 품고 불을 밝힌다. 나는 그중 활기차 보이는 빨간 초를 골랐다. 촛불을 붙이는 내 손길이 가늘게 떨렸다. 한 번에 불을 붙이지 못하면 불길한 징조가 될까 봐 조바심이 났다. 다행히 불꽃은 곧게 타올랐고, 나는 그 앞에서 손자의 대학 합격을 빌고 또 빌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30여 년 전 내 장남이 입시를 치를 때 기도하시던 친정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지금 내 나이가 그때 어머니의 나이다.
장남의 시험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어머니는 나를 영천의 어느 언덕길로 데려가셨다. 집들이 다닥다닥 붙은 좁고 가파른 골목길. 마흔의 나도 숨이 가쁜데, 여든의 어머니는 그 길을 굽이굽이 오르셨다. 길이 끝나는 곳에 다다르자 어머니는 겉치마 속곳 바지에 달린 비밀스러운 주머니에서 조심스레 한지 조각 하나를 꺼내 내게 맡기셨다.
“화장실 다녀올게. 이거 잘 가지고 있어라. 절대 떨어뜨리면 안 된다.”
그것은 외손자의 합격을 위해 절에서 사 오신 부적이었다. 신성한 기원을 담은 것이니 더러운 화장실에 들고 가면 부정을 탄다는 것이 어머니의 순박하고 절실한 믿음이었다. 평소 지성인이라 자부하며 미신을 일축하던 나였지만, 그 순간만큼은 어머니의 그 순결한 염원 앞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어미인 나는 아들을 채찍질만 했는데, 외할머니인 어머니는 이렇게 절절한 기도를 올리고 계셨구나.’
어머니를 따라 옹달샘에서 정안수 한 사발을 떠 부처님 앞에 올렸다. 물 한 방울 흘리지 않으려 온몸을 긴장시킨 채 10미터 남짓한 길을 걸었다. 종교도 없던 내가 어머니의 명에 따라 부처님 앞에 엎드렸다. 어깨가 들먹이고 뜨거운 눈물이 쏟아졌다. “잘못이 있다면 모두 제 탓이니 저를 벌하시고, 내 아들에게는 길을 열어주소서.” 마음속으로 부처님과 하느님을 번갈아 부르며 울부짖었다.
어머니의 속주머니에 고이 들어있던 그 종이 한 조각은 미신이 아니라, 외할머니의 절절한 사랑이자 간절한 소망이었다. 그 지극한 덕분이었을까. 내 장남은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학에 합격했고, 먼 미국 땅에서 박사학위까지 받아 훌륭하게 자라주었다.
오늘 성당에서 켠 내 촛불도 30년 전 어머니의 부적처럼 손자의 앞길을 환히 비춰주길 간절히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