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가장 오래된 추억일 것이다. 다섯 살 쯤 되었을 때다. 이발사가 내 머리를 자르며 예쁘게 하고 어디 가느냐고 물었다. 시골 큰아버지 댁 배밭에 배 먹으러 간다고 했다. 이발사가 웃으면서 하나 갖다 주겠냐고 했다. 그러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그다음부터 이발소 앞을 지나지 못하고 뒷길로 돌아다녔다.
처음 엄마가 되어서 있었던 일이다.
퇴근길은 언제나 종종걸음이다. 멀리 길모퉁이에, 할머니 등에 업혀 있는 내 아기가 보였다. 종종걸음은 거의 뜀박질로 변했다.
할머니 어깨에 얹힌 하얀 손이 눈에 번뜩 들어왔다, 나는 소스라칠 듯 놀라 발걸음을 돌렸다.
그날 아침 출근할 때 모습이다.
등에 업혀 할머니 어깨를 움켜쥐고 있는 아들의 조그만 손을 잡고
“엄마 갔다 올게” 인사를 하다가 아가 손의 차가움을 느꼈다.
"엄마가 올 때 예쁜 장갑 사올게."
한살 짜리 아들과 한 약속이다.
어서 보고 싶은 마음에 약속을 잊었었나 보다.
조그만 빨간 장갑 사 들고 뛰었다.
약속이 무엇인지, 장갑이 무엇인지, 손이 시린 건지도 모르는 아기이지만
나는 그와 한 약속을 꼭 지키고 싶었다.
그 아기가 지금은 할애비가 됐다.
멀리 떨어져 살며, 홀로 사는 어미를 걱정하는 아들에게 약속을 했다.
아침에는, 아무 일 없이 밤잠 잘 자고 일어났다고...
저녁에는, 아무 탈 없이 하루를 잘 보냈노라고...
내 안부를 전하는 짤막한 문자 하나를 보낸다.
혹시 약속을 잊을까 염려되어 폰에 알람 설정을 해놓고 있다.
얼마 전에 내가 내게 약속을 하나 했다.
매일 글 한 편을 쓰겠다고.
긴 세월을 살아내다 보니, 윤기가 빠지고 푸석하게 메마른 영혼으로서는 힘겨운 약속이다.
가난한 집 아낙네가 쌀 뒤주의 쌀을 퍼내다가, 쌀 바가지가 뒤주 바닥에 긁히는 소리가 내 안에 들린다.
백발의 노파가 불이 켜지지 않은 까만 모니터와 마주 앉아 있다.
" 무얼 꺼낼까?" 내가 물으면
" 꺼내서 어떻게 할건데?" 까만 모니터 넘어 비웃는듯한 소리가 들려온다.
노파와 컴퓨터는 침묵의 대결을 하고 있다.
노파는 스스로 자기에게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할까 봐 겁먹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