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자기가 궁지에 몰릴 때마다 나를 무자비하게 공격했고, 나는 이유도 모른 채 오랫동안 아파했다. 내가 아는 그는 누군가가 자기를 찌르면 자신은 상대를 두 번은 더 찔러서 복수를 해야 시원하다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와 다른 사람이라 누군가가 나를 찌르면 더 이상 아프지 않게 방어하는 정도가 최선이라는 걸 알았다. 마지막으로 내가 그에게 할 수 있었던 최선의 방어는 그가 어떤 방법으로 나를 찔렀고, 내가 얼마큼 아픈지 주변에 알리는 것까지였다. 더 이상 사람들 사이에서 거짓말로 나를 망가트리고 그 반동을 이용해서 자신의 평판을 높이고 타인의 관심과 호의를 착취하는 것을 참아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성을 되찾은 나는 몇 가지 증거와 함께, 내가 10년 넘게 다녔고, 그와도 함께 다녔었고, 별거 기간 동안 그가 또 다른 여자를 만난 그 교회사람들에게 그의 비밀스러운 새 연애에 대해 알렸다. 물론 그의 가족들에게도 그의 멍청하고도 엉망진창인 비밀 연애에 대해 알려줬다. 그런 와중에도 그는 어떻게든 빠져나가려고 나를 괴롭혔지만 상관없었다. 생각해 보면 그놈은 항상 멍청한 짓을 해놓고도 자기가 멍청한 지 몰랐다. 자기가 직접 sns에 티를 내고 기록을 남겨서 나와 사람들이 알게 된 사실을 얘기해도 나에게 그럴 리 없다며 거짓말 말라고 애써 부정했다.그랑 말을 섞어 봤자 억울한 건 나 같아서 여러모로 사실혼 관계에서 적용할 수 있는 법적인 자문도 구해보고 상간 소송도 해보려 했지만, 그때의 나는 이미 망가진 그와의 관계에 시간과 돈을 들이기가 싫었다. 차라리 깔끔하게 끝내는 것이 소송 거는 것보다 내 멘탈을 지키는 방법 같았다. 그리고 나의 유책을 설명하라며 닦달하던 그의 어린 여자 친구에게는 그냥 그 새끼 네가 가지고 나에게는 연락하지 말라고 했다.
언제 또 그가 나에게 어떤 나쁜 짓을 할지 모르니, 손에 호신용 칼자루 정도는 쥐어두려고 그동안 그의 부정에 대해 모아뒀던 증거는 지우지 않고 가지고 있었다. 이건 실제로 훗날 그가 나를 또 한 번 힘들 게 할 때 요긴하게 쓰이기도 했다. 사실 나는 그에게 미안하다는 말 정도는 꼭 듣고 싶었다. 그가 적어도 오락가락하지 않고 확실히 정리를 했더라면 나도 미련 없이 떠났을 텐데. 그럼에도 슬펐겠지만.
결혼 소식을 알리는 것만큼이나 결혼의 실패를 알리는 건 고민이 많았다. 혼인 신고를 하지 않은 사실혼 파기도, 어쨌든 내가 생각했을 때는 이혼과 같았다. 이미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별거 기간 동안 소식을 궁금해했지만, 나는 그동안 머리로는 그와 끝내야 한다는 생각을 했음에도 정리할 수가 없어서 뭐라 설명할지 몰랐다. 결국 그가 내 뒤통수를 치고 관계가 엉망으로 끝난 이후에야 이 망해버린 결혼을 정리할 수 있었다. 워낙 성격이 급해서 결혼 준비도 급하게 후다닥 해버렸었는데, 또 그렇게라도 끝을 보니 정리도 후다닥 해버리게 됐다. 그놈이 여자가 생긴 걸 알게된날, 나는 주저 없이 결혼반지도 중고로 팔아버리고, 결혼 앨범도 정리하고, 그동안의 많은 사진들이나 기록들을 하루 만에 정리했다. 그리고 가까운 몇몇 사람들에게 나의 짧은 결혼생활을 쉽지 않게 끝냈다고 알렸다.
그후로 나는한 동안 많은 위로와 격려를 받았다. 그중 대부분은 "그저 네가 운이 없었을 뿐이야"라는 말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맞아. 나는 운이 없었지. 그 말이 때로는 안도감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조금씩 주변에서 하나둘씩 결혼 소식을 전해오거나 청첩장이 늘어나는 시즌이 찾아오면 또 마음이 사악해지고 억울해지고 퍽퍽해졌다. 왜나만 운이 나쁜 건데? 자기들은 괜찮으니 그런 위로도 할 수 있는 건가? 물론 내게 어떻게든 힘을 주고 싶어서 뭐라도 쥐어주는 그사람들의 마음도 알고 있지만, 사실은그들은 나보다 운이 좋아서 나에게 그런 말을 해줄 수 있는 것 같아서 왠지 꼴 보기가 싫었다. 괜찮은 척도 해봤지만 척이란 걸 하면 할수록 마음이 곪아간다는 걸 몰랐다.
아, 위로 뺨치게 별의별 오지랖들도 많이 들었다. "혼인 신고 안 한 게 천운이지" 이 정도는 세상 고마운 말이었다. "혼인 신고를 했더라면 남자가 마음을 잡지 않았을까?"부터 " 나는 이혼하고 싶어도 애가 있어서 못 하는데 네가 부럽다"까지 나와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지인들은 여러 가지 신박한 내용으로 내게 말을 걸어왔다. 어쩌면 그들의 마음은 나를 걱정해서, 위로해주고자 싶었을지 몰라도, 나는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았다. 상처 입은 건 나인데 왜 당신들이 나의 상처의 원인을 파헤치고 규정짓냐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운이 나빴다는 사실을 직시해도 당장 아픈 게 괜찮아지는 것은 아닌데, 내 마음도 모른 채 사람들은 각각의 방법으로 자꾸 성급한 위로와 격려를 던졌다. 나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으로 매일마다 도망가고 싶었다. 그런 거대하고 따뜻하다 못해 뜨거운 위로들은 나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엉엉 울면서 산책을 하다가 마주친 동네 어르신들이 울지 말라며 다정하게 건네주시던 몇 마디의 말, 아파트 산책로에서 이유 없이 나에게 귀엽게 꼬리를 흔들며 다가오던 강아지들과의 짧은 스킨십, 매일 아침마다 날 위해 만들어주는 엄마의 따뜻한 요리, 일터에서 "좋은 하루 보내세요"라며 내미는초콜릿이나 사탕, 카페라테 같은, 소소하고 덤덤하게 주어지는 위로들이 나를 살려줬다.
나는 그렇게 작정하고 날 위로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등지고 살았다. 나는 운이 나쁘니 위로도 아픈 사람이 되었다고 여기게 됐다. 그렇게 살다 보니 어느 날은 세상이 살 만하다고 느끼는 날도 있는가 하면, 울다가 눈물에 빠져 죽고 싶은 날도 있었다. 나는 그냥 그렇게 날씨처럼 변덕스럽게, 사소한 위로에 살아났다가, 더 사소한 오지랖에 죽어났다가 그렇게 반년을 살아냈다. 그리고 마침내 그에게 억지 섞인 미안하다는 말을 듣게 됐을 때에는, 악한 사람은 미안하다는 말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걸 배웠다. 그것도 내가 운이 나빠서였을까. 아직도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