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때와 같은 날이었다. 결혼식 이후 그의 월급이 이체되는 첫날이기도 했다. 그는 결혼하기 전에 매달 월급날 카드값과 빚 원금과 이자, 관리비 등을 제외한 금액을 내게 이체하기로 약속했었다.
내 예상으로는 그렇게 제외한 돈이 백만 원은 될 것이니 (사실 생활하기에 말도 안 되는 금액이라고 생각했지만) 나머지 모자라는 돈은 내가 벌면 된다고 생각했었다. 프리랜서지만 가사와 일을 충분히 병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멋진 여자라고 나를 치켜세워주는 그가 고마웠고 나도 나를 믿었다.
하지만 막상 결혼을 하고 나니 신혼이라고 하기도 어색할 만큼 우리는 막상 함께 보낼 시간이 없었다.
그는 9 to 6의 영업사원이었고, 프리랜서인 나는 그와는 정 반대의 루틴으로 살고 있었다
나는 집에서는 잠만 자고 오전에는 운동을 하고 오후에는 일을 하고 자정이 다돼서야 집에 돌아왔고, 그와 가끔 먹는 야식이 유일한 낙이자 둘만의 시간이었다. 그래도 하루는 꼭 그와 함께 집 밥을 먹고 싶어서 간신히 하루를 쉬는 날로 비웠다. 그날이 우리가 마주 보고 밥을 먹는 유일한 하루였다.
그날도 같이 밥을 먹기로 한 날이었다.
퇴근을 하고 돌아온다는 그의 연락을 받고 새댁의 설레는 마음으로 저녁을 준비하던 중에 그의 월급 이체 문자를 받았다. 결혼하고 첫 이체인 것이다. 여러 의미로 두근두근 했다. 이미 신행 전 한 차례 그의 이체 문자를 보고 당혹스러웠던 기억이 있어서 흠칫했지만, 고생한 그의 월급이니 고맙게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번에는 40만 원이 입금되어 있었다. 말이 되나? 잘못 보낸 거지? 싶었는데 이어지는 메시지로 그는 내 궁금증을 해소해 주었다(?). 신혼여행 가서 자기가 밥을 사느라( 나머지는 내가 다 냈는데도.) 카드값을 쓰고 결혼식에 와준 하객들에게 식사 대접을 하느라 이번 달만 양해해 달라는 말에 나는 뒤통수가 얼얼하기만 했다.
밥이 눈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런 기분도 모른 채 아내가 차려준 첫 끼니라며 신난 그를 마주 보고 앉아 함께 식사를 했다. 밥을 겨우 삼키며 분명 나에게 이체된 금액이 적은 것은 그가 이야기한 것들 때문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는 예전부터 결벽증이 있었다. 항상 모든 문자와 통화내역을 정리하고 나와 가족들의 메시지만 남겨두는 습관이 있었고( 이것도 참 이상했는데 나는 왜 그걸 흐린 눈 했을까) 스트레스를 받으면 꼭 대청소를 해야 한다고 일하고 있는 나를 밖으로 내 쫓기도 했다. 한 번도 그를 의심한 적이 없었는데, 그날따라 그냥 촉이 이상했다. 분명 뭐가 있을 것이다. 이번엔 뭘까.
그는 식사가 만족스러웠는지 콧노래를 부르다가 내 옆에 무방비하게 핸드폰을 두고 샤워를 하러 갔다. 이때다. 뭔가 있다.
역시나 그 순간 새로운 메시지가 왔길래 슬쩍 화면을 훑었다. "이번달엔 꼭 갚으려고 했는데.. 어려울 것 같아요 다음 달에 연락드릴게요 죄송합니다 "라는 문자. 발신자는 처음 보는 이름이었고, 왠지 읽지 않으면 또 그가 지울 것 같아서 충동적으로 메시지를 읽어버렸다. 나는 이제 그의 아내이니 그에 대한 건 다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마자 그 문자를 내밀며 뭐냐고 물었다. 예상보다 격하게 그는 나에게 왜 남의 문자를 보냐며 고성을 질렀다. 그런 모습은 처음이라 너무 당황스러웠는데 그 뒷말이 더 황당했다.
" 내 돈인데 네가 무슨 상관이야? 돈 빌려준 건데 뭐 어쩌라고 곧 갚는 데잖아 어차피 결혼 전에 빌려준 거면 내 돈이잖아 넌 관련 없는 돈이야" 누가 보면 그가 혼자 결혼 준비를 다 한 줄 알겠지만 웃기게도 우린 반반 결혼을 했다. 심지어 가난한 그의 집에서는 한 푼도 보태지 못해서 미안하다 해놓고 축의금은 절반을 떼어갔고, 우리 집은 그런 그가 짠하다며 예복이며 냉장고나 혼수도 해준 상태였다. 그가 결혼을 준비하며 돈이 없어서 미안하다고 했을 때 오히려 나는 그가 짠해서 괜찮다고 감쌌지만 사실 이해가 되진 않았다. 그런데 남한테 빌려줘서 돈이 없던 거였다고? 그것도 몇 백만 원이었다. 이미 결혼 준비를 하며 주식으로 나 몰래 한 차례 결혼 자금을 날리고 나에게 들켰을 때에도, 결혼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주식을 했다고 말도 안 되는 궤변을 늘어놨을 때도 나는 그냥 다 병신같이 그를 이해하고 넘어갔었다. 어쩐지 그래서 나를 지금껏 병신으로 안 건가? 그가 빌려준 액수를 듣고, 지인이 무슨 사정인지를 물었다. 그런데 심지어 그와 별로 친하지도 않은 대학교 여자 후배가 싱글맘으로 아이를 키우는 게 힘들다며 생활비를 명목으로 돈을 빌렸다는 것이다. 어쩐지 처음 보는 이름이었다. 도대체 그 여자는 누구고 그는 왜 친하지도 않은 사람에게 또 돈을 빌려준 걸까? 그냥 또 착한 사람 코스프레가 발동한 건가 아니면 이 여자와 무슨 관계가 있는 건가 머리가 어지러웠다.
나는 그를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앞으로 얼마큼 더 알아가야 하는 걸까? 정신이 아득하고 속이 울렁거렸다.
"오빠. 나는 결혼을 결심하고 함께 준비하기로 한 순간부터 우린 같은 배를 탄 거라고 생각해. 그러니까 이건 나랑 상의했어야 하는 거지. 이건 오빠가 잘못한 거야. 그 지인한테 돈은 꼭 돌려받도록 해. 앞으로는 나랑 상의 없이 돈을 빌려주거나 주식을 하거나 그런 일은 절대로 없었으면 좋겠어. 정말 한 번만 더 그러면 나는 오빠랑 같이 못 살 것 같아"
나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는 나에게 자기 옆에 있는 티슈케이스, 즉 휴지곽을 던졌다. 그의 말에 따르자면 그는 정확히는 나에게 던진 게 아니라 "내 쪽으로" 던진 것뿐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공교롭고 안타깝게" 나는 그 휴지곽에 맞아버린 것이다.
그는 아파하는 나에게 소리를 질러댔다.
"씨발, 네가 나랑 끝낸다고? 내가 너한테 어떻게 했는데. 내 돈 가지고 왜 지랄이야. 내 집에서 나가"
따지고 보면 임대주택이니 자기 집도 아닌데 나가라는 게 순간 너무 웃겼지만 일단 너무 아팠고 충격을 받아서 정신없이 짐을 챙겨서 친정에 갔다. 엄마는 내가 단순히 스트레스를 받아서 온 거라고 생각하고는 더 묻지 않으셨다. 하필이면 결혼하고 신혼여행을 다녀온 지 딱 두 달이 되는 날이었다. 행복하기만 해도 모자랄 시간인데 왠지 점점 수렁에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나는 살면서 한 번도 누구에게 쌍욕을 들어본 적도 물건에 던져 맞아본 적도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그렇게 잘못 살진 않았다. 세상에서 나를 가족 다음으로 제일 사랑한다고 믿던 남편에게 처음으로 그런 일을 당한 것이 너무 슬프고 내가 너무 불쌍했다. 그리고 많이 무서웠다. 평소에도 그가 화가 나면 공격적이고 눈빛이 돌변하는 때가 있기도 했지만 이렇게까지 무섭고 폭력적인 적은 없었다. 내가 정말 이 결혼을 잘못선택한 거면 어떡하지? 초조한 마음으로 그날 밤을 꼴딱 세고 다음날 정신과를 찾았다. 그전부터 결혼 준비를 하며 잠을 잘 못 자고 걱정이 많아서 계속 우울증과 불면증 약을 먹으며 매달 상담을 다니고 있었다. 선생님은 자초지종을 들으시곤 이번이 처음이니까 다음번엔 안 그럴 수도 있다. 이미 한 배를 탔으니 잘 적응해 보라고 회유하셨다. 맞아.. 다들 그렇게 살지. 한 번은 봐주자.
그렇게 마음 잡고 집으로 돌아가니 그는 기다렸다는 듯 내게 무릎을 빌고 싹싹 빌었다. 나에게 물건을 던지려던 것도 아니고 쌍욕을 하려는 맘도 없었는데 내가 자신의 자존심을 깎는 말만 하는 것 같아서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었다고 했다. 나는 어차피 이미 그를 용서하려는 참이었다. 어차피 휴지곽이니까. 어차피 신혼이고 다들 싸운다고 하니까. 그래 돈은 이미 빌려주었고 앞으로 안 그러면 되지.
무릎을 꿇고 우는 그가 나는 또 짠했다. 매일 영업 거래처와 회식을 하던 터라 스트레스가 많았던 것 같다고, 나도 말이 좀 심한 것 같으니 그도 그럴 만했다고, 그가 괜히 안쓰러워서 휴지곽을 맞고 집에서 쫓겨날 뻔한 불쌍한 나 자신은 그렇게 또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다. 그렇게 그날 밤도 그 짠한 마음으로 그를 위한 반찬을 만들었다. 괜찮아. 내가 노력하면 괜찮을 거야.
나는 그렇게 또 자발적 호구가 되었다. 휴지곽 다음에 무엇이 나를 향해 날아올지도 모른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