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은 불편하게 살아보자
우리의 아파트 생활은 참 편리하다. 그에 더해 가족을 위해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 엄마란 존재까지 있다면 나머지 사람들의 편함이란 이루다 말할 수 없다. 나도 혼자가 되고 나서야 그 편함 뒤에 수고로움을 감수하는 아내의 존재를 느끼게 되었다.
손빨래하는 남자
난 병영으로 이사 오며 세탁기를 정리했다. 그동안 두 딸들이 학교 기숙사에서 퇴사하여 집으로 오는 토요일 오후부터 열심히 제 역할을 한 세탁기. 이젠 더 이상 그 세탁기를 사용할 일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혼자 쓰기엔 너무 큰 탓도 있었으나, 조그만 빌라이지만 구조는 아파트와 같은지라 그 편리 속에 나를 맡겨두기엔 나 스스로가 걱정이 되었다.
아직도 딸들은 아빠가 세탁기도 없이 지낸다는 것이 걱정되는지 틈날 때마다 새로 사라며 나를 볶는다.
어떤 날은 이 무슨 청승인가 싶기도 하지만 그래도 작은 대야에 담겨있는 빨래를 보면 할 수 없이 몸을 움직여 빨래를 해야 하니, 그 덕에 잠시나마 멍하니 쳐다보던 TV를 끌 수 있어 여간 다행이 아니다.
가끔씩은 빨래방의 손을 빌리기도 하지만 그래도 세탁기를 없앤 건 잘 한 결정인 것 같다.
물 뜨는 길 2.5킬로
병영으로 오고서도 1년 반이나 지나서야 병영 산전샘에 급수시설이 있는지 처음으로 알았다.
병영성에서 동문이 있던 자리를 통해 산전마을로 내려가는 조그만 돌계단으로 이루어진 오솔길. 이 길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장소이다. 굽이진 돌계단도 좋거니와 좌우를 감싸고 있는 대나무 숲이 주는 편안함은 지친 나를 위로하는 듯하다.
그의 매일이다 싶을 정도로 오르내렸던 그 길. 그리고 그 길이 끝나는 지점에 산전샘을 복원하여 커다란 누각까지 멋들어지게 지어두었음에도 난 그 누각 뒤편에 급수시설이 있는지 알지 못했으니 이 주의력 없는 인간이란.
그날도 마을 노인 영감이 물병을 들고 가는 것을 멀쩡히 보고서도 한참을 걸어간 후에야 왜? 란 의문을 가졌으니 참으로 한심하다 아니할 수 없다.
그날 이후부터 1리터 생수병 하나를 구해 나도 물을 길어왔다. 홀아비 혼자 사는데 1리터 하나면 2일은 충분하리라 생각했으나 막상 쉽지 않았다. 다시 생수병 하나를 더 구해선 격일로 하는 아침 병영성 산책 때 운동 겸 물도 함께 떠온다.
나라가 잘 사는지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 중에 물을 구하는 데 얼마나 거리가 가까운 가도 하나의 근거가 된다. 아프리카 어느 부족은 여자와 아이들의 하루 일과 중 제일 중요한 것이 물을 떠 오는 것이다. 머리에 물통을 이고 지고 반나절 이상을 걸어가 물을 떠 다시 반나절 이상을 걸어와야 하는 고된 길.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도 집 안에서 수도꼭지만 틀면 시원한 물이 나오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의 어머니 처녀 적 이야기에 물동이를 이고 물 길러 가는 이야기는 빠질 수 없는 이야깃거리지 않는가.
이젠 집집마다 정수기 없는 집이 없고, 마트엔 생수가 넘쳐나는 시절이니 걸어서 물 뜨러 간다는 것이 상상이 안될 것이다. 나 또한 그렇게 살았다. 이제부터 생활하는 물까진 아니더라도 먹는 물만큼은 길어다 먹기로 했다.
가끔씩 차라도 끓이거나 밥이라도 하는 날엔 두 통의 물로는 모자라기도 한다. 그런 날엔 몸을 일으킨다. 가깝게 가는 길도 있건만 굳이 병영성곽을 밟고 돌아 걷는다. 오직 물을 뜨고 이분을 만나기 위해.
"한글은 목숨"으로도 유명한 한글학자 외솔 최현배 선생은 이곳 병영성에서 태어나신 분이다. 북문지 어느 모퉁이 집 담벼락엔 이분의 "내 고향은 병영이다"는 제목의 시가 새겨져 있다.
회포를 가득 안고 동문 성터 올라서니
동문루는 간데없고 가을바람 소슬하다
산전물 이고 가는 이 없어 더욱 답답하구나
외솔 선생이 돌아가신 것은 1970년이고 산전샘이 복원된 것은 2002년이니 동문루도 없어지고 산전샘도 말라버린 고향 병영의 모습이 얼마나 안타까웠을까.
그러나 50년이 지난 지금. 동문루는 아직도 간데없으나, 산전물을 이고 가고 이는 있으니 나의 모습을 선생이 본다면 조금은 위안이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