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 숨쉬기부터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는.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뭐를 할 때 가슴이 뛰었는지, 뭐를 먹을 때 맛있었는지, 어디를 갔을 때 즐거웠는지, 또 뭐가 있을까. 아무튼 이런 질문 자체를 하지 않고 살아왔던 것 같다.
그러나 이젠 혼자 사는 삶에도 서서히 적응을 해가다 보니 나를 찾아보는 시간도 갖게 되는 것 같다.
대학 산악부에 들어가 활동을 한 것을 보면 여행이나 뭐 이와 비슷한 뭔가를 좋아했을 것 같은데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도 아닌 것 같다. 내가 여행을 진정 좋아했다면 혼자서도 얼마든지 여행을 갈 만도 했건만, 혼자된 이후로 혼자 떠나는 여행은 해본 적도 없거니와 생각도 해보지 않았다. 그동안 난 여행을 좋아한 것이 아니라 여행을 준비하고, 떠나고, 여행지에서 행복해하는 아내와 아이들을 보면서 그것을 좋아한 것이란 생각이 든다.
맛있어하는 건 뭘까. 이건 정말 어렵다. 난 어려서부터 코가 휘어 코로 숨을 제대로 쉬질 못했었다. 그래서 늘 코피를 흘렸고, 냄새를 잘 못 맡았었다. 입술은 늘 메말라 터지길 반복하니, 나중엔 아예 윗입술엔 갈라져 골이 깊게 나있기도 했었다. 그래도 코피를 늘 흘려 친구들 보기에 좀 그런 것 왜엔 딱히 불편함을 모르고 살았었다. 그러다 40대 중반이 되어서야 코 수술을 했고 처음으로 음식을 앞에 두고 뭔가 냄새가 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러니 어찌 맛을 알까. 이젠 어느덧 10여 년이 흘렀건만 맛은 아직도 잘 모르겠고 그냥 배만 부르면 오케이다.
그리고 숨은 코 말고도 입이 있으니 늘 입으로 쉬었다. 원래 그런 줄 알았다. 아마도 입으로 7, 코로 3 정도 하지 않았을까 싶다. 성인이 되고 나선 엘리베이터 같이 좁고 밀폐된 곳에서 낯선 여자 뒤에라도 서게 되면 몹시 곤란해진다. 숨을 쉴 수가 없다. 앞의 여자가 불쾌하단 눈으로 날 돌아본 적이 여러 번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 수술 후 입을 닫고 숨을 쉬게 되니 완전 신세계였다. 너무 편했고, 무엇보다 수면시간이 약 1시간 정도 줄었다.
그러나 코 호흡만 하기엔 입 호흡에 대한 습관이 너무 깊게 베어 나도 모르게 어느 순간엔 입으로 숨을 쉬었고, 조금이라도 걷거나 뛸라치면 여지없이 입 호흡을 했다.
달리기를 시작하고, 처음엔 혼자 무작정 내 맘대로 달리다 보니 입으로 마구마구 호흡하며 달렸다. 그러다 보니 겨울엔 목도 아프고 이도 시리고, 힘도 들었다. 그러다 제임스 네스터의 ‘호흡의 기술’이란 책을 보고 코 호흡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
책에서 강조한 대로 그동안의 습관을 버리고 코로 숨 쉬기 위해 일상에서도 입을 굳게 다물고 코로만 숨 쉬는 연습을 하고 있다. 처음 며칠간은 답답해 죽을 것 같았다. 숨이 모자라 자주자주 한숨을 입으로 쉬어주어야 했다.
이젠 조금 적응이 되는지 일상에서는 거의 입으로 호흡하지 않아도 지낼만하다. 가끔씩 숨이 모자랄 땐 코로 한숨을 쉰다. 걸을 때도 코로만 호흡해도 뭐 적당히 걸을만하다.
어젯밤엔 잠잘 때도 코로 숨 쉬기 위해 입에 반창고를 붙여 보았다. 집에 마땅한 반창고가 없어 일회용 밴드 중간 거즈 부분을 빼고 끝을 잘라 입술에 붙여 보았다. 생각보다 단단하게 잘 붙었다. 내일 뉴스에 ‘50대 홀아비 삶을 비관해 입에 테이프 붙이고 자살하다’란 제목의 기사가 나지 않기를 바라며 잠자리에 들었다.
책에 의하면, 입을 벌리고 자게 되면 체내 수분이 40%가 날아간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아니면 어젯밤 물을 좀 많이 마신 탓인지 화장실 때문에 두어 번은 일어나야 했다. 물론 입을 통해 날아가는 수분과 소변은 다르겠지만 어쨌든 두어 번 깨고 나서 아침까지도 멀쩡하게 입술에 붙어있는 테이프를 보니 신기했다.
늙어 감에 따라 턱 근육이 약해지니 자는 동안 입이 벌어지고 그러면서 기도에 압박이 생겨 코를 골게 된다고 하던데, 오늘 밤은 음성 녹음을 틀어놓고 잠을 자봐야겠다. 입술에 붙인 테이프로 코를 골지 않는 효과가 있는지 알아봐야겠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입으로 숨을 쉬면서도 고입, 대입 체력장 오래 달리기에선 항상 2분 50초대에 들어왔고, 산악회 산행이나, 군대에서 행군을 할 때도 힘들어해 본 적이 없었다. 이를 보면 나의 기초 체력은 좋았을 것 같다. 그러나 나는 한 번도 내가 체력적으로 좋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늘 잔기침을 달고 살았고, 아침마다 세수할 때면 코에서 나온 피로 세수하는 일이 다반사였으며, 중이염으로 인해 항생제 주사와 약을 40년 넘게 먹어왔으니 말해 뭣할까.
사도 바울의 ‘육체의 가시’는 기독교인들에겐 매우 친숙한 말이다. 바울은 자신의 병을 낫게 해 달라며 기도하지만 하느님은 오히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짐이라”하셨다.
감히 이 말을 내게 대입하는 것은 너무 과할지 모르겠으나, 만약 내게 코와 귀의 병이 없었다면 나의 젊은 시절은 어땠을까.
내가 하고 싶었던 직업군인의 길을 잘 갈 수 있었을지도, 아님 유명한 산악인에 이름을 올렸을지도, 아님 어느 조직 폭력배 중 하나로 살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 무엇이 되었든 아마도 안하무인처럼 살았을 것은 분명해 보인다. 나의 약함을 알고 승자의 관점이 아닌 약자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는 눈을 갖게 되고, 딸들이 어릴 때부터 그들의 말에 귀 기울여 주는 그런 사람은 되지 못했을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살아온 날들보다 남은 날이 짧음을 알고, 죽음에 초연해질 나이가 된 지금. 나를 돌아보고 진정 나 다움이 뭔가를 알기 위한 시간을 갖게 된 지금. 나의 가시를 먼저 돌아보니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말의 뜻을 조금은 알 것 같다.
이제 나를 찾는 여정에 한발 들여놓았다. 좀 더 깊이 나를 찾는 여정을 떠나 보련다. 그래서 나 답게 사는 삶을 살아 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