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아침부터 왠지 기분이 들뜬다. 그동안의 우울감도 없고, 면도를 위해 거울을 보는 나의 모습도 전과는 조금 다르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오늘은 서울 간 큰딸이 오는 날이다.
그동안 비대면 수업으로 1학년 과정은 집에서 엄마랑 보내고, 1월 말에 서울로 집을 구해 동생이랑 함께 이사를 간 이후로 처음이다. 울산 친구들 만나러 온다고 하지만 내심은 2월 초에 집을 정리하고 조그만 빌라로 이사 간 아빠 혼자 사는 모습이 몹시 궁금했으리라.
며칠 전 병원에서 처방받은 우울증 약 봉투를 서랍 깊숙이 숨겼다. 혹여라도 딸이 보고 걱정할까 염려도 되고.
공항에서 딸이 나오길 기다리는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내 가슴이 붕붕 하늘로 날으는 것 같다. 이런 기분은 지금까지 살면서 처음 느껴보는 것 같다. 어쩌면 이런 걸 설렌다고 하는가 보다.
그동안은 엄마가 있었고, 아내가 있었고, 아이들이 있어 북적이며 살 땐 몰랐던 내면의 소리를, 변화를 이젠 오롯이 혼자 살아가니 이렇게 마음의 변화를 세세하게 들여다볼 수 있게도 된다.
소위 말하는 찐 부녀답게 정작 만나서는 무덤덤하게 그저 그런 말 몇 마디 던지곤 딸 캐리어를 집어들고 차로 먼저 성큼성큼 가고 말았다.
병영성 비탈의 급한 오르막을 처음 본 딸은 기절을 한다.
“아빠 여기로 차가 올라갈 수 있어?”
처음 보는 아빠 집. 말이 없다. 여기저기 둘러보더니
“난 어디서 자?” “
“안방 침대에서 자. 아빤 거실에서 잘께.”
“친구들 만나고 올 때 주소 검색해서 찾아와.”
“저녁에 보자 아빠 간다.”
그래도 여전히 기분은 좋다. 나 말고 다른 사람의 온기가 집안에 느껴진다는 것 자체가 참 좋다는 걸 이제라도 알게 되어서.
이틀 정도 울산에서 시간을 보내고 우리는 애들 외할머니랑 고모가 준비해 준 반찬을 잔뜩 싣고 서울로 갔다. 작은딸도 보고 고양이 녀석도 볼 겸 해서.
서울에 머무르는 이틀 동안 자도 자도 계속 잠만 잦다. 마치 군대에서 휴가 온 아들이 잠만 자듯이. 딸들이랑 맛있는 것 한번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시간만 흘러버렸다.
고래란 놈은 참 얄궂은 운명을 갖고 난 놈이다. 어찌 물속에 살면서 다른 놈들처럼 물속에서 숨을 쉬지 못하고 물 밖으로 나와서 숨을 쉰 단 말인가. 숨도 쉴 수 없는 물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고래의 심정은 어떨까. 먹이를 구하기 위해 숨도 쉴 수 없는 깜깜한 바다 깊은 곳으로 내려가야 하는 그 심정은.
딸들과 함께한 울산에서 며칠, 서울에서 며칠은 마치 고래가 물 밖에서 숨을 쉬듯 내겐 그동안 참았던 숨을 마음껏 쉴 수 있는 날이었다.
이제 나는 심연의 바닷속으로 다시 들어가야 한다. 먹이를 잡기 위해 그리고 살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