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대 명산 두 번째
산림청 선정 100대 명산 그 두 번째 산행은 부산 금정산성 환종주구간으로 정했다.
금정산은 일전에 친구들과 범어사에서 시작하여 북문을 거쳐 고당봉까지 다녀온 적이 있는 산이다. 그땐 별다른 준비도 계획도 없이 다녀온 터라 한 번은 제대로 돌아보고픈 마음이 가슴 한편에 늘 자리하고 있었다.
금정산성 전체 길이가 17~18km 정도 된다 하니 혼자 부지런히 걸으면 6시간 정도면 충분하리라 생각했다. 처음 계획은 화명수목원에 주차를 하고 서문을 시작으로 고당봉을 거쳐 한 바퀴 돌아올까 했으나 울산에서 차로 가기엔 범어사가 가까워 범어사에서 시작하기로 했다.
범어사에 도착하니 새벽 6시 반경이다. 어둠에 싸인 절은 조용하니 참 좋았다. 범어사에서 북문으로 향하는 돌계단을 한참 오르자니 '무엇을 찾고자 이 새벽에 이 길을 오르는가'는 한 생각이 들었다. 내가 찾는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무엇을 찾는 나부터 먼저 찾아야겠다.
돌계단이 끝나는 곳에 자리 잡은 자그마한 성문, 금정산성 북문이다. 그리고 북문을 조용히 내려다보고 있는 고당봉. 금정산 주 봉인 고당봉은 일전에 한번 다녀온 곳이라 이번엔 동문으로 해서 한 바퀴 돌아 마지막에 고당봉을 찍고 내려오기로 했다.
북문에서 동문으로 향하는 길에도 돌계단이 참 많다. 이 돌계단을 만드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을까, 그리고 이 돌계단을 올라가는 나그네 또한 고생이다. 그냥 자연스러운 산길이면 서로에게 좋았을 것을.
멀리 해운대 쪽 하늘이 붉게 물들고 있다. 해는 바다를 떠나 하늘에 붙었으나 산그늘에 갇힌 아랫마을 사람들은 아직 해가 뜬 줄 모르리라.
북문에서 원효봉, 제4망루, 제3망루를 지나면 동문이 나온다. 새벽햇살과 어우러진 각양의 기암괴석은 나그네의 발길을 계속 붙잡는다. 6시간에 빠르게 돌아오려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보단 많이 구경하고 즐기며 가기로 했다.
제3망루는 앉은자리부터가 예술이다. 망루라기보다는 오히려 바위틈에 터 잡은 암자가 더 제격일듯하다. 나 같은 범부도 저곳에 몇 년 앉아 있으면 저절로 도통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어릴 적 소풍에서 보물 찾기라도 하듯 이것저것 재미지고 아름다운 풍광을 찾아 걷다 보니, 어느덧 동문이다. 동문은 공격해 오는 적을 좌우에서 공격할 수 있게 옹성 같은 구조로 되어있다. 동문으로 올라오는 적장은 성문을 보는 것만으로도 간담이 써늘해질 것만 같다.
동문 안쪽엔 화장실이 있다. 겨울이라 남자화장실은 얼어 사용이 안되고 여자화장실만 사용이 된다. 이른 시간이라 다행히 사람이 없어 얼른 여자화장실에서 급한 용무를 마치고 다시 남문으로 향했다.
동문을 지나 대륙봉, 제2망루를 지나면 남문이 나온다.
동문에 비해 고갯마루가 넓은 탓인지 남문 앞은 시원스레 열려있다. 문설주와 인방도 위용을 자랑하듯 큼지막한 돌로 직각으로 세워져 웅장함을 자랑하는 것이 아치형으로 만든 동문과는 사뭇 분위기가 다르다. 고갯길을 지나야 한다면 이곳 남문을 많이 이용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따뜻한 남문 안쪽에 마련된 벤치에서 준비해 간 양갱이와 따뜻한 차를 마셨다. 그동안 혼자 산행을 할 때면 잘 쉬지도 않고 끊임없이 걷기만 하기 일쑤였는데 이젠 이렇게 혼자서도 앉아 숨 돌리기도 하니 점점 혼자 여행의 맛을 알아가는 것 같다. 여기까지 두 시간이 조금 더 걸린 것 같다.
잠깐의 여유를 마치고 서문으로 향했다. 서문까지는 망미봉, 상계봉, 제1망루, 파리봉을 거쳐가면 된다.
망미봉은 안내지도에도 없었고 이정표도 없다. 단지 다른 이정표 밑에 누군가 볼펜으로 화살표와 망미봉 몇 미터라고 적어둔 게 다였다. 도착하니 금속으로 만든 표지판에 한자로 망미봉이라 적혀있다. 아름다움을 보는 곳. 얼마나 풍광이 아름다웠으면 아름다움을 본다고 했을까. 지금의 내 눈엔 해운대 방면의 높게 솟은 빌딩들이 그리 아름답게만 보이지 않아 조금은 아쉽다.
상계봉은 산성에서 조금 비켜난 봉이라 그런지 별도의 이정표가 없었다. 느낌상 상계봉으로 가는 길인 것 같아 갈림길에서 머뭇거릴 때 어떤 분이 상계봉 쪽에서 올라온다. 물어보니 상계봉이 맞다 하여 내려갔다. 지금까지 오는 과정에서 만난 금정산의 바위들은 세월에 깎여 둥글둥글한 모습이었으나 상계봉에서 만난 바위는 시퍼렇게 날이 선 것이 순하디 순한 사람도 한 번은 성질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하다. 이번 산행에서 상계봉을 보지 않고 내려갔다면 후회할 뻔하였다.
상계봉을 갔다 좀 전의 그 갈림길로 다시 돌아와 50여 미터를 더 가면 제1망루가 있다. 제1망루는 성벽만 남아있다. 지금까지 만난 망루와는 달리 망루에도 문이 있다. 좁은 문을 통과하면 기초석과 망루로 올라가기 위한 돌계단이 있는 것이 지금까지 봐온 망루와는 다른 형태가 흥미롭다.
파리봉을 지나면서부터 서문까지는 계속 내리막이다. 파리봉이 해발 615M, 이곳에서 학생수련원이 보이는데 그 아래가 서문이니 족히 300M 이상 고도차가 날 것 같다. 그 서문에서 다시 금정산의 주봉인 고당봉까지 올라갈 것을 생각하니 슬슬 걱정이 된다.
파리봉 표석에는 파리는 수정을 일컫는 말이고 수정은 불교에서 칠보 중 하나라는 설명이 쓰여있다. 화려한 상계봉을 본 후라 별 개성 없이 그저 그런 산으로만 보이는 이 봉오리에 다소 과한 이름이다 싶었다. 그러나 표석을 지나 아래로 몇 발을 옮기곤 이내 섣부른 나의 판단이 미안했다.
아슬아슬 걸쳐있는 바위들 하며 어찌 보면 저팔계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혀 내밀고 있는 바둑이 같기도 한 바위가 웃고 있다. 독수리가 날개를 접고 밑에 있는 나를 노려보는 것 같은 바위, 코 큰 아저씨가 웃고 있는 듯한 바위까지 너무 재미있어 연신 사진을 찍어댔다. 또한 절벽에서 발아래 산성마을을 내려다보는 시원함은 파리란 이름이 결코 과함이 아님을 항변하는 듯하다.
재미있는 파리봉을 뒤로하고 서문을 향해 내리막을 내려가고 또 내려갔다. 이렇게 계속 내려가도 되나 싶을 때쯤 차도가 나오고 찻길을 따라 조금 더 올라가다 옆으로 빠지니 서문 뒤편이 나온다.
처음 내가 계획했던 곳이 이곳 서문 아래 화명수목원에서 출발하는 코스였다. 지나고 나서 보니 서문에서 출발하는 것이 그나마 제일 수월했겠다 싶다.
서문은 계곡 옆에 세워진 문으로 매우 아름답다. 성문 옆을 ㄷ자 모양으로 축조하여 성문을 통과하려는 적을 공격하기도 용이할 뿐만 아니라 보기에도 웅장하고 견고해 보였다. 계곡 위론 성벽이라기보다는 아치교 같은 모양의 수문의 아름다움은 이 서문을 만든 기술자는 기술자보단 예술가라고 말해야 할 듯하다.
안내판에는 서문과 동문을 만든 석공은 스승은 동문을 만들고 제자가 서문을 만들었으며, 스승은 야욕과 욕심이 많아 웅대하게 짓고 제자는 기술이 앞서 정교한 아름다움을 살려 스승보다 먼저 짓게 되었다고 설명되어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서문과 동문은 같은 패턴에 주변 지형이 다를 뿐이라고 생각한다. 둘 다 성문 좌우에 옹성 같은 구조가 있으며 동문은 좁은 협곡에 자리하고 있어 부드럽게 원형을 이루고 있으나 서문은 넓은 광장 위에 있어 원형보다는 웅장한 느낌의 직각이 더 어울린다. 성문은 둘 다 아치형으로 되어 있어 안정감을 나타내는 것이 둘은 같은 모습이다. 그래서 후대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한 것이 아니가 싶다.
범어사에서 아침 6시 반에 출발한 산행이 이곳 서문에 도착하니 어느덧 낮 12시가 넘었다. 한낮임에도 바람은 여전히 차다. 성문 앞에서 웅크리고 준비해 간 김밥을 먹기엔 왠지 처량도 하고 서문 옆 계곡을 지나 고당봉으로 향하는 길은 보기에도 기를 죽이는 오르막이라 일단 어느 정도 올라가다 점심을 먹기로 했다.
한 발이라도 더 걸어둬야 편할듯하여 땅만 보고 걸었다. 오르막이 조금 멈추는 적당한 바위를 찾아 김밥을 꺼내 먹었다. 보온병에 준비해 간 따뜻한 물이 없었더라면 꽁꽁 언 김밥을 먹기가 여간 고역이 아닐 뻔했다. 대충 김밥을 입에 구겨 넣고 처음 출발할 때 입었던 패딩을 벗어 배낭에 넣고 가벼운 점퍼로 바꿔 입었다. 겨울모자와 귀마개도 배낭에 넣고 가벼운 모자로 바꿔 쓰고 약 6km의 꾸준한 오르막을 오를 준비를 했다.
힘들 땐 너무 멀리 보면 더 힘들다. 머리를 땅에 박고 오직 내 발 앞만 보고 걷고 또 걷다 보면 된다. 우리네 삶도 그와 같다. 생각을 너무 멀리, 많이 하면 오히려 지친다. 현재에 집중하며 하루하루 살다 보면 어려운 일도 지나간다.
입에선 연신 허연 김이 뿜어져 나오고, 몸에선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른다. 혼자 하는 산행, 혼자 가는 삶, 외롭다는 생각도, 힘들다는 생각도 모두 사라지고 들리는 것은 오직 나의 숨소리뿐 그 맛에 산행을 한다.
더 이상 버릴 생각도, 정리할 생각도 사라지는 바로 그 순간을 위해 나는 산에 오른다. 어둠 속 돌계단을 오를 때 '무엇을 찾아 나는 이 길을 왔나'는 한 생각. '무엇도' 없어지고 '나'도 없어지는 그 순간을 위해 나는 산에 오른다.
오직 걷는 자가 되었을 때 눈앞에 나타난 파란색 표지판 '제2금샘'. 내가 금정산에 온 또 다른 이유 중 하나가 일전에 봤던 금샘에 이번 겨울가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물이 고여 있는지가 궁금해서이기도 했다. 그런데 제2금샘이라니. 호기심에 가봤다. 헐 물이 꽁꽁 언 채로 가득 있다. 신기하다. 도대체 이 물은 어디서 온 것인고...
다시 오르막, 걷고 또 걷고 어느덧 총 소요시간은 6시간이 넘었다. 그동안 춥다는 핑계로 운동을 안 한 표시가 난다. 허벅지에 쌓인 피로가 쉬 풀리질 않는다. 조금만 힘을 세게 주면 허벅지에 경련이 날 것 같다. 지친다. 환종주는 중도에 포기할 수가 없다. 오직 앞으로 가는 것뿐 돌아가는 길도 막막하기는 매 한 가지다. 저만치 고당봉 정상이 보인다. 사람들이 사진을 찍는지 분주히 움직인다. 부럽다.
고당봉 정상이다. 사람들이 너무 많다. 표석 앞엔 줄이 엄청나다. 그들과 함께 줄을 서기엔 나는 너무 지쳤고, 옷도 얇아 춥다. 대충 표석이 나오는 거리쯤에서 얼른 사진 한 장 남겼다. 꼴이 좀 그렇네.
이젠 쭉 내리막길이다. 다행히 아직은 무릎에 신호는 없다. 추워서 옷을 다시 바꿔 입기도 귀찮아 얼른 내려갔다 금샘으로. 그런데 금샘은 북문으로 향하는 길에서 제법 떨어져 있다. 하! 다리는 가지 말자 하고 머리는 언제 또 오겠냐 어차피 고생은 다리가 하니까 그냥 무시하고 가란다.
갔다. 금샘에 물이 있다. 그것도 가득, 꽁꽁 언 채로. 신기하다. 할 수만 있다면 바가지로 다 퍼내고 어찌 되는지 한번 보고 싶다. 이제 볼 것은 다 본 것 같다. 안전하게 북문을 지나 범어사로 내려가기만 하면 된다.
생각보다 북문이 멀다. 무사히 원점회귀를 자축하며 한 컷.
이렇게 나의 100대 명산 산행 두 번째, 부산 금정산 산행은 범어사에서 출발하여 범어사로 돌아오는데 소요시간 총 7시간 54분, GPS상 거리 25.02km로 무사히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