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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자세히 보아야 더 빠져든다. 말도 그렇다

by 나영

말과 시간을 보내본 적 없는 사람들은 말의 큰 몸집과 강한 뒷다리 때문에 겁을 먹는다.

하지만 말과 함께 시간을 보내다 보면, 말이 얼마나 순하고 착한 동물인지 알게 된다.

조금 더 가까워지면 말이 생각보다 겁이 많은 동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그들의 두려움이 우리에게도 옮겨오는 순간들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말의 두려움을 이해하고 그것을 함께 넘기려는 과정 속에서 관계가 만들어진다.

나 역시 이런 단계를 거쳐왔고, 아직 마지막 단계를 위해 항상 노력 중이다


마사회에 들어가기 전까지 승마는 나에게 단순히 재미있는 운동이었다.

말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고, 말에 대해 더 알고 싶었지만

소극적인 성격 탓에 승마장에서 내가 직접 장안을 해보고 싶다는 말을 꺼낼 용기를 내지 못했다.

이미 장안이 끝난 말을 타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마사회에 들어온 뒤, 말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나는 그들의 순수하고 따뜻한 면모에 점점 빠져들었다.

처음 보는 말들에게 손 냄새를 맡게 했을 때 보이는 각기 다른 반응,

졸고 있는 말의 머리를 받쳐주며 느껴지는 따뜻한 콧바람,

만질수록 손에서 놓기 싫어지는 부드러운 코.

그리고 나를 바라보는 깊은 눈빛과 마주치는 순간들까지.


따뜻한 햇살이 들어오는 마방에서 서로 기대어 있는 시간이나,

처음 타보는 말을 탔을 때의 설렘,

어렵게 느껴졌던 말을 이해하고 타는 법을 터득했을 때의 성취감은

나를 점점 더 말에게 빠져들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런 아름다운 순간들 사이에도 겁이 나는 순간들은 반드시 찾아왔다.

말과 함께 시간을 보내다 보면 누구나 겪게 되는 일이지만,

짧은 기간 동안 여러 번 겪거나 다치는 경험이 쌓이면 새로운 도전을 앞두고 망설이게 된다.


방목된 포니들이 탈출해 놀란 영웅건마와 로드가 실내마장에서 워킹머신까지 경주하듯 달렸던 날,

흰여울에게 끌려다니다 처음으로 뒷발에 차였던 날,

손평보를 시키다 콜트가 난리를 쳐 넘어졌을 때 내 머리 위로 콜트의 다리가 지나갔던 순간.


이런 일들은 모두 나에게 두려움을 남겼다.


특히 한겨울, 크리비퀸을 실내마장으로 데려가던 날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흥분한 채 공중에 뜨듯 속보로 뛰어가는 크리비를 제어하지 못했던 순간,

크리비가 내 발을 밟았을 때 나는 그 거대한 존재 앞에서 무력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으면서도 나와 눈이 마주쳤음에도 하던 일을 계속하던 한 사람을 보며

이 상황에서도 나는 완전히 혼자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런 일들이 벌어질 때마다 처음에는 그다지 무섭지 않았다.

내가 감당하기 힘든 상황이 오면 누군가 도와줄 거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짜 두려움은

내가 힘든 순간에 아무도 나서지 않거나 멀리서 지켜보기만 할 때 찾아왔다.


흰여울에게 뒷발을 맞았던 날도 마찬가지였다.

아픔보다 더 무서웠던 건,

흥분한 흰여울을 그 넓은 공간에서 감당해야 하는 사람이 나 혼자라는 사실이었다.

처음 흥분한 말을 끌어보는 상황에서

방법조차 알지 못한 채 혼자 서 있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을 때 머릿속은 하얘졌다.


그 이후로 나는, 나 나름의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도움을 기다리기보다 처음부터 문제를 ‘나와 말 사이의 문제’로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외부 환경에 휘둘리지 않고 오직 말에게 집중하는 것,

그것이 내가 배운 방식이었다.


말이 외부 자극에 겁을 먹더라도 나는 그 상황에서 흔들리지 않아야 했다.

나까지 겁을 먹는 순간,

그 공간에는 겁먹은 두 생명체만 남게 된다.

상황을 더 나아지게 만들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헬리콥터 소리나 바람에 흔들리는 파란 천막 같은 외부 요인에 반응하기보다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안심시켰다.

상황이 곧 끝날 것 같다면 서둘러 피하기보다 잠시 멈춰 서서 말이 받아들일 시간을 주었다.

그리고 나 자신이 먼저 “괜찮다”라고 느끼려고 했다.


물론 아직 극복하지 못한 부분들도 많다.

장애물에 대한 두려움은 충분한 시간을 갖지 못해 여전히 남아 있다.


말은 두 가지 얼굴을 가진 동물이다.

순하고 온순해 큰 강아지처럼 느껴질 때도 있지만,

500kg의 몸집으로 갑작스러운 행동을 할 때는

우리에게 두려움을 안긴다.

이 두 얼굴을 모두 받아들이고 함께할 방법을 배울 때,

비로소 우리는 말과 진짜로 함께하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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