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2025 독후기록 8] 나의 인생만사 답사기

유홍준 교수님 잡문집

by 서민호

[나의 인생만사 답사기]

유홍준, 창비, 2024년 11월, 볼륨 362쪽.



30년 넘게 꾸준히 [나. 문. 답]을 써오신 유홍준 교수님 신간입니다. 보통 수필(에세이)集이라 이름 붙이는데 굳이 교수님께선 잡문집이라 스스로를 낮추시는데, 잡문에는 세상만사가 다 들어있고, 그 안에 인생이 녹아있기에 이런 명칭을 붙이셨네요.


교수님은 1949년 생이니, 올해로 75세 십니다. 답사기, 미순평론, 미술사 등 여러 책을 쓰셨는데, 1996년 잡문을 엮어 펴낸 [정직한 관객] 이후 28년 만에, 그동안 써온 글들 중 시의성이 담긴 글은 제외하고 가려 뽑아한 권의 책으로 묶으신 게 바로 이 책입니다.


인생만사, 문화의 창, 답사여적, 예술가와 함께, 스승과 벗 다섯 개 장과 부록으로 나의 글쓰기를 포함한 구성입니다. 읽고 나니 교수님의 생과 지나온 길, 주변 사람들, 생각의 많은 부분을 알 수 있게 되네요.


서문에 교수님의 글쓰기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두 분이 등장합니다. 고3 국어선생님이셨던 故유공희 선생님과 서른의 나이로 요절한 시인이자 문학평론가 채광석 님을 거론하는데, 이와 더불어 루쉰(노신)의 영향도 언급하는 걸 보면, 두 분이 아닌 세 분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해 보입니다.


1장 '인생만사'에선 자신의 흡연이야기가 나옵니다. 문화재청장 시절 故 노무현 대통령님과의 에피소드(평소 즐겨 피우던 에쎄수에서 클라우드 나인으로 바꾸게 된 이야기)랑, 담배를 끊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인들을 먼저 보내는 장례식을 치르며 다시 담배를 태우게 되었다는 사연을 들려주십니다. 그 모습이 인간적으로 다가옵니다. 저는 어럽다던 군 훈련병 시절, "초전박살 십 분간 휴식. 담배 일 발 장전.""이란 구호와 함께 꿀맛 같은 휴식시간에도 담배를 안태웠었는데, 제대를 삼 개월 앞둔 시점에, 시간이 너무 안 가 손을 댄 담배를 지금껏 끊지 못하고 있습니다. 음... 얼른 이 글 마무리하고 한 대 태우러 가야겠습니다 ㅎㅎ


1995년 제1회 광주비엔날레에 커미셔너로 참석해, 대상 수상 설치작인 카초의 <잊어버리기 위하여>(쿠바 난민들의 처지를 은유한 작품)을 보고, 한 노인께서 "인생이란 맥주병 위에 떠 있는 빈 배란 말이시"란 이야기에, 실로 '정직한 관객'이란 느낌을 받았다는 대목에선 작은 미소를 짓게 만듭니다.


2장 '문화의 창'에선 임진왜란 당시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4大 사고 중 세 곳이 왜군에게 유린되고, 하나 남은 전주사고의 실록을 지키고자 경기전 참봉 오희길과 선비 안의와 손홍록이 식솔과 노비들을 동원, 직접 등짐을 지고 내장산 산속 암자(실제로는 얕은 바위굴입니다)로 피난시켜 지켜낸 사연은 감동을 자아냅니다. 내장사 대웅전을 지나 산길로 가다 보면, 이곳은 현재 가파른 계단이 설치되어 있고, 계단을 통해 오르는 대도 숨이 차오르는 곳인데, 제대로 된 길도 없던 당시엔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으리라 생각되네요. 하지만 이런 곳이었기에 왜군 손아귀로부터 안전할 수 있었을 거고요.


영남대 구내에는 안동댐 건설로 수몰위기에 처한 구계서원을 비롯한 50여 채의 한옥들이 옮겨져 있는데요.(저도 가봤습니다) 본인 수업을 듣는 미술대학 학생들에게 과제로 허수아비를 만들어 오라고 해, 설치한 장면도 인상적입니다. 미술학도들 답게 허수아비 모습들이나 재료들이 기발하더군요.


3장 '답사여적'에서는 [나문답]에서 하지 못한, 답사 배경과 전후 이야기들입니다. 네 번째 북한 방문에서 찾은 백두산 천지, 중국과 일본 답사 이야긴데요. 餘滴을 찾아보니 "글, 그림 따위를 다 쓰거나 그린 후에 벼루에 남은 먹물"이란 의미입니다. 의미와 느낌이 좋아, 제 호로 삼아볼까 생각 중입니다.


4장 '예술가와 함께'엔 비디어 아트의 창시자 백남준, 40세 나이로 작고한 판화작가 오윤, <타는 목마름으로>의 시인 김지하, 구한말 사람으로 三代가 독립운동에 투신한 동농 김가진 선생님 이야기가 담겨있습니다.

특히 관심을 끈 건 1943년생으로 농촌의 모습을 그려온 신학철 화백(생존해 계십니다)의 그림 <모내기> 였는데요. 북한체제와 김일성을 찬양하는 내용이라며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1,2심에선 무죄를, 대법원에서는 뒤집혀 유죄를 받은 이야기를 접하면서, 어이없어 탄식을 쏟게 만듭니다. 3월 30일까지 제가 사는 광주시립미술관 본관에서 <민중미술대가 회고전>이 열리고 있고, 여기에 신학철 화백의 작품 여러 점이 함께 전시 중이라 조만간 열일 제쳐두고 가보렵니다. 문제가 되었던 모내기 작품은 검찰에서 압수한 관계로, 후일 작가분께서 똑같이 다시 그렸는데, 이 작품을 전시장에서 만나볼 수 있을 듯합니다.


5장 '스승과 벗'은, 먼저 간 知人들께 바치는 교수님의 조사입니다. 교수님 주례를 맡아주셨던 리영희 선생, 백수시절 금성출판사에 취직시켜 준 백기완 선생, 20년간 복역하신 '처음처럼'의 신영복, 이한열 열사 장례식 때 맨말로 춤을 춘 우리 시대 영원한 춤꾼 이애주, 남민전 사건으로 파리에 머물며 <나는 파리의 택시운전사>를 쓴 홍세화, 설명이 필요 없는 김민기. 그리고 광주 민주화 운동의 대들보이자, 윤상원과 영혼결혼식을 올린 들불야학 박기순의 친오빠 박형선 님에게 바치는 조사입니다. "한 생을 같이 살아 행복했습니다"는 말에 더 이상 어떤 수사가 필요할까요?


부록 '나의 글쓰기'에선 '좋은 글쓰기를 위한 15가지 조언' 등이 실려있습니다. 해당 부분은 말 그대로 부록이라, 글쓰기에 관심 있는 분들이라면 참고하시면 도움 될 겁니다.


6일간의 연휴 셋째 날 오전입니다. 대설주의보가 내렸는데, 기온이 차갑지 않아 쌓이지는 않네요. 민족명절 맞아 가족 친지분들과 행복하고 좋은 시간 만끽하세요.


올해 8번째 책읽기.


#독후기록 #유홍준 #나의인생만사답사기 #잡문

#답사 #오윤 #신학철



keyword
작가의 이전글[2025 독후기록 7] 세계사에 균열을 낸 결정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