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 호수, 친구들, 와인, 여름, 찻집, 사랑>

by 김 예나




나는 나의 목적지를 향해서 계속 달린다.

나의 목적지? 물론 뉴욕이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무라카미 하루키. 133p


최근 동생과 러닝을 시작했다.

약간의 반강제적으로 시작된 러닝은 최근 삶에 터닝포이트가 되었다. 순간을 포착하는 법. 여름은 삶의 질문하는 계절이라는 사실. 나는 우연히 발견한 글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 그러니까 여름은 당신이 이 세상에 보낸 모든 질문들에 대한 답장. 잠긴 문이 잠긴 채로 저물어가더라도 그건 모두 당신이 쓴 편지들에 대한 답장.

어느 골목에서 멈칫했던 시간들이 얼마 뒤 먼 고장에서 비로 내리게 되는 일 혹은 그만 실까? 우리 참 많이 살았다고 유리창에 대고 고백하는 일도 당신이 오래전에 쓴 편지들에 대한 답장들.

<여름, 이승희>

난 모든 여름에게 편지한다.

덕분에 삶을 치열하게 건넜다고.

모든 실패를 꽉 안아버렸다고.

후덥지근한 저녁 열기 속에서 나는 글 하나를 적는다.

삶이 널뛰기를 한다.

온도가 뜨겁게 끓어올랐다가

이내 차갑게 확 식어버린다.

냉탕과 온탕을 번갈아가며

삶이 데워졌다 식었다 한다.

참. 삶의 변덕은 어쩔 수가 없다.

도대체 어느 장단에 발맞춰야 하는지.

알다가도 모르겠어.

뭐. 아무렴 어때?

재밌으면 됐지.

그래서 난. 나 아닌 다른 이들의 이야기로 채워지는 삶.

나. 아닌 다른 이들의 삶을 살아보고 싶어졌다.

완전히 180도 다른 삶.

누가 먼저 겪고 적어놓은 삶이 아닌 내가 겪은 삶.

그런 삶의 재미를 느끼고 싶어졌다.

그래서 내가 늘 이야기하듯

실패하지 마세요. 가 아니라 멋지게 실패하세요!라고 외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불행을 멋지게 포장하는 게 아니라

덤덤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될래.

청순함은 결코 섹시함을 이길 수 없다.

자랑이 아니라 진실이 될래.

모든 걸 겪고 아름다운 사람.

여름은 섹시해지는 계절.

난 청순함을 벗어던지고 섹시한 사람이 될 준비를 한다. 섹시해지지 않아도 돼. 아무렴 어때.

그저. 내가 되면 되지. 다른 이들의 삶이 아닌 내 삶의 이야기를 적어나가면 되지. 어쩌면 진짜 내가 원하는 삶은 바로 이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되기 위해 다른 이들의 삶을 잠시 빌리는 것.

여름이 내게 준 기회였다.

여름은 그런 기회 같은 계절이니까.

정답을 미리 알고 문제를 푸는 어리석음이 통하는 계절. 정답을 미리 알고 떠나는 아름다움.

답을 찾기보다 질문하기 위해.

혹은 틀리기 위해 수많은 과정들을 반복한다.

얼마 전 아침 달리기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까치 한 마리가 눈앞에서 하늘로 날아가는 모습을 포착했다. 나는 그 까치를 보고 생각한다.

내가 만약 동물로 태어 날 수 있다면 새가 되고 싶다고. 그래서 자유롭게 훨훨 날아가고 싶다고.

어느 한 곳에 얽매여 있지 않고 때가 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는 새가 부러웠다.

그래서 나는 내가 제일 잘하는 방식을 택한다.

비행기 티켓을 끊고 어디든 상관없이 발길 닿는 곳으로 떠나버리는 일. 내가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 속하는 그런 여자가 되는 일. 나는 책 속 세상이 아닌 진짜 세상 밖으로 날아가버린다. 이제는 책이 지겹게 느껴진다. 책상을 뒤덮고 있던 책들을 정리하고 노트와 연필 그리고 카메라를 꺼낸다. 새로운 여행을 위해.

당분간 읽지 않을 예정이다.

그리고 메모장에 크게 적어놓는다.

나는 책이 짜증 나기 시작했어. 당분간 쓰는 것은 그만두고 떠날 거야. 읽기만 하는 삶은 너무 시시해.

그런데 어디로 가지?

어디로 가야 나 다울 수 있을까?

가만 나 다운 여행은 뭘까?

난 또 고민에 빠져버린다.

모르니 일단 무작정 떠나야지.

여행 중 찾아보는 것도 재미 중 하나라고.

어차피 답을 찾는 것보다 질문하기 위해 매번 여행을 하는 것 인지도 모른다.

지킬 건 지키고, 버릴 건 버리고, 얻을 건 얻고

그냥 흘러가는 데로 나를 내버려 두는 여행.

몰라서 더 근사한 삶처럼.

어차피 모르기 위해 떠나는 여행.

될 대로 돼라. 는 마음으로.


새들은 여행을 하려고 하늘에 있는 게 아니라는 거죠.

새들은 거기 사는 거예요!

-존 버거 <결혼식 가는 길>

이런 말들을 보면 삶의 확신이 생긴다.

꼭 떠나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고, 속이 울렁거린다.

그래서 밑도 끝도 없이 떠나라는 말을 들으면 속이 시원하다. 그런데 여행이 아니라 삶이라니.

난 오히려 위로를 얻는다.

나도 여행을 떠나는 게 아니야.

살려고 가는 거야.

거기서 살기 위해 떠나는 거야.

가짜 삶이 아닌 진짜 삶을. 살기 위해.

다른 사람들이 이미 정해 놓은 삶이 아닌

여러분 이렇게 사세요. 실패를 극복하세요.라고 말하는 자기 계발서 같은 삶이 아닌. 다시 실패해도 좋다.라고 말하는 문학 같은 삶.

너무 새것은 오히려 가짜 같다.

꾀죄죄함이 진짜 됨을 증명하지.

그러니 먼저 실패하는 사람.

먼저 실패하는 여행을 해야지.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처럼.

”타인 말고 자신에게 자신을 송두리째 던져라 “

-몽테뉴. 의 말처럼.

난 나에게 송두리째 던져지기 위해.

여름을 몽땅 소비해야지.

쓰는 사람이기 이전에 소녀가 되기 위해.

원래 내 삶으로 돌아가기 위해.

비밀스러운 웅성거림을 가진 사람이 되기 위해.

삶을 살아내는 것보다 위대한 것 없다는 말을 붙잡고 떠나야 뭐라도 쓰지 않겠어?

잠들어 있던 캐리어를 깨운다.

책 때문에 가려워진 곳은 여행으로 박박 긁어 상처 난 곳에 반창고 붙이다 보면 또 괜찮아지겠지.

또다시 돌아오겠지.

절절한 책 같은 삶을 살다 보면 그런 글을 쓰는 사람이 되어 있겠지. 위대한 작가들처럼.

고독 속으로 들어가세요. 외치는 사람이 되겠지.

절절하게 읽은 책에서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해방감. 가서 책은 한 권도 읽지 않을 거야. 읽는 건 집어치우고 언제나 그렇듯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 일들. 점심, 호수, 친구들, 와인, 여름, 찻집, 사랑 뭐 그런 것들로

나를 채워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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