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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하얀 Mar 06. 2024

에피쿠로스의 사치

당신의 사치는 무엇입니까?

작년 가을 내가 읽기에는 멀게만 느껴졌던 니체의 책을 접하면서 사치에 대한 생각이 들었다. 


에피쿠로스의 사치  - 사치를 누리는데 필요한 것은 아담한 정원에  그루의 무화과, 약간의 치즈와 서너 명의 친구만 있으면 충분했다.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라는 말이 누군가에게는 흥청망청한 쾌락이나 유혹 또는 무절제한 생활이라고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에피쿠로스는 하루하루 의미 있게 사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라고 했고, 마음의 쾌락을 중요시했던 사람이었다. 

어려운 책을 읽으면서 이래서 철학책을 읽는구나! 느꼈던 부분이기도 했다. 에피쿠로소가 책에서 나에게 물어보는 것 같았다. 


"요즘 너에게 사치는 무엇이니?"

그 당시 나는 가을의 마지막 채소들을 텃밭에서 정리하고 있을 쯤이었다. 그리고 겨울간식을 준비해 보겠다고 대봉시 100개를 사서 베란다에 잔뜩 걸어두었다. 에피쿠로스의 사치 정도라면 나에게 사치는 무엇일까?

"나에게 사치는 텃밭 야채를 말리는 거야. 그리고 대봉시도 있어."


양양에 와서 나만이 누릴 수 있는 사치였다. 겨울을 누구보다 넉넉하게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겨울이 되면 야채값이 더 오를 텐데 그만큼 식비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추운 겨울 냉동실에서 꺼낸 곶감을 들고 친정과 시댁을 간다고 생각하니 뿌듯했다. 양가 어머니들이 깜짝 놀라며 말할 것이었다. 

"어머! 하얀아. 네가 이런 것도 할 줄 알았니? 대봉시로 말린 곶감을 이렇게 먹게 되다니!!"

의외의 모습이라는 어머니의 표정과 우리 딸이 이런 것도 할 줄 아냐며 엄마의 놀란 표정을 생각하니 그것 또한 나의 사치가 되는 듯했다. 


내 사치의 시작은 가지였다. 텃밭을 처음 해보는 것이라 야채들마다 얼마큼의 수확량이 나오는지 전혀 알지를 못했다. 가지 2그루에서 나오는 가지의 양이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직접 경험하면서 알았다. 매주 10개 가까이 나오는 가지를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다. 고민 끝에 가지를 말려보기로 했다. 야채를 건조하면서 또 알았다. 원래 가을에 건조한 야채들을 겨울 동안 먹는다는 것을 40대 중반이 가까워서야 알게 되었다. 

가지 말리기를 시작으로 대봉시를 말려 곶감을 만들고, 6년 산 인삼도 말려 인삼청도 담가보았다. 아이들 겨울 간식과 신랑 건강 간식까지 난 정말 부자가 된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텃밭에서 나온 무를 남김없이 정리했다.  

배추와 무는 김장용으로 심었는데 도저히 김치 담그기까지는 무리였다. 대신 배추와 무는 보관하기에 따라 오래 먹을 수도 있다고 해서 최대한 오래 먹을 수 있도록 보관해 보았다. 무까지는 먹겠는데 무청을 어떻게 해야 하나? 아이들과 내가 직접 1년간 가꿨던 텃밭이라 그런지 무청하나도 아까웠다. 결국 버릴 수 없음에 무청까지 말리기 시작했다. 


설악산 끝자락에서 내려오는 바람과 강원도 양양 바다의 바람을 동시에 맞으며 나의 야채들은 나에게 뿌듯함을 안겨주었다. 2-3일이 지나면서 무말랭이와 시래기로 변신하는 야채들을 보았다. 하루하루 수분이 빠져나가는 모양이 신기했다. 가을볕이 이렇게 따뜻할 수 있구나!

좁은 베란다에 앉아서 시래기가 된 무청, 무말랭이가 된 무, 곶감이 된 대봉시들이 그 해 가을 나의 사치였다. 

에피쿠로스의 사치는 나의 사치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눈을 감고 바람까지 불 때에는 내 사치가 최고조로 올라가는 것 같았다. 누구에게나 그런 사치가 있을 것이다. 


과연 당신의 사치는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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