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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얀 Dec 13. 2023

콩국수 집 웨이터


"한 그릇만 팔아주세요. 아이들만 먹으면 돼요."


양양 여름이 시작할 무렵이었다. 날은 더운데 유난히도 파도가 높았던 날이었다. 성수기의 시작이라 어떤 날이든 바다에 가면 언제든 놀 수 있는 줄 알았다. 바다에 들어갈 수 없게 되자 찰리체리는 바로 배고프다고 징얼거리기 시작했다. 근처 새로 오픈한 식당으로 출발했다.


성수기 시작과 함께 오픈한 식당이 있었다. 식당 이름은 보릿고개. 언제부터 시작이 되었는지 모른다. 그냥 언제부터인가 동네 어르신들이 해수욕장 개장과 함께 시작했다가 폐장과 함께 종료되는 곳이었다. 딱 50여 일만 운영되는 곳이고 메뉴는 콩국수와 그날그날 상황에 달라지는 도토리묵과 메밀전이 있었다. 가끔 할머니들께서 새벽에 일찍 준비를 하시면 장떡도 같이 파는 날도 있었다. 


아이들의 찡얼거림을 달래줄 메뉴로 콩국수를 선택했다.  5시가 넘어갈 무렵 도착해서 시동도 끄지 못한 채, 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웨이터 할아버지는 말씀 대신에 양손으로 엑스 표시를 하고 계셨다. 

"한 그릇만 팔아주세요. 아이들만 먹으면 돼요."

아이들만 먹어도 된다는 소리에 안에 계시는 할머니 셰프님들과 말씀을 나누고 들어오라고 해주셨다. 

한 여든쯤 돼 보이시는 할아버지가 보릿고개의 웨이터로 근무하고 계셨다. 비슷하거나 조금 더 젊어 보이시는 할머니 3분이 주방을 책임지고 계셨다.  아무 곳이나 앉으라며 찰리체리를 보고 웃어주셨다. 


< 할: 웨이터 할아버지 / 나: 하얀 >

할: 아이들이라서 안 줄 수가 없네. 어서 들어와요. 

나: 감사합니다. 아이들 학교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배가 고파서 들렸어요. 

할: 어디 초등학교? 

나: 요 안쪽 H초등학교예요. 

할: H 초등학교? 아휴. 그럼 더 안 줄 수가 없지. 꼼짝없이 줘야지. 나도 거기 졸업했어. 

나: 찰리체리~ 완전 대선배님이시다. 인사드려야겠다. 

간단한 인사와 함께 웨이터 할아버지의 몸은 분주했다. 70년쯤 차이나는 후배들이라 생각이 드셨는지 할머니들께 H초등학교 아이들이라고 애들이 배고파한다고 안에 이야기를 드리는 듯싶었다.  국수가 나올 때까지 웨이터 할아버지는 우리 옆에 앉으셔서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할: H 초등학교 그 앞이 38선이었어. 거기 삼거리로 넘어가면 아마 38선 자리였다는 표지 같은 게 있을 거야. 

나: 아... 여기가 북한이었군요.(보릿고개 콩국수집)

할: 그럼. 북한이지. 그날 6.25 전쟁이 터지던 날 새벽에 우리는 진짜 몰랐어. 바로 앞에서 전쟁이 시작되는데도 그 전날도 몰랐지. 그냥 우리는 사는 거였어. 38선 바로 앞에서는 모르고 있었는데 저~ 위(아마도 지금의 양양읍을 의미하시지 않을까 생각했다)에서 준비해서 새벽 4시에 바로 밀고 가더라고. 


H초등학교 앞이 38선이라고 하셨는데 북한이었는지 남한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었다. 70년쯤 선배님이신 웨이터 할아버지의 말씀으로 추측해 보건대 북한이었지만, 선만 있었지 왕래는 했던 것으로 느껴졌다.

할아버지의 말씀은 계속 이어졌다. 


할: 우리가 주문진으로 피난을 갔어. 그런데 삼척으로 돌아서 준비해서 위로 올라오는 거야. 주문진으로 갔는데 꼼짝없이 갇혔지. 전쟁은 정말 무서운 거야. 전쟁이 나면 가장 피해가 많고 고생하는 게 여자야. 우리는 그런 시절이 있었어. 

할: H초등학교 그 앞에 엄청 부자였던 김**이 있었는데 6.25 이후에 그 아들을 끌고 가서 학교 근처에서 총으로 쏴 죽였어. 학교를 다니면서 그런 거를 보고 자랐어. 너무 힘든 경험이 많았네..... 6.25 나기 전에는 학교가 불이 난 적이 있었어. 다시 학교를 지어야 하니까 학교에 가면 공부는 안 하고 매일 자루에 OO을 옮겼어.

무엇을 옮기셨는지는 잘 못 알아 들었다. 하루종일 무엇인가를 나르셨다는 말씀이셨다. 

나: 학교가 불이 난 적이 있었군요. 

할: 힘든 시절이었지. 


그때 멀리서 셰프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세: 할아버지. 얼렁 이거나 옮겨요!! 애들 배고프겠어. 

할: 어어 어여갑니다. (가지고 오시면서) 많지가 않아 그냥 애들만 나눠먹여요. 

나: 할아버지! 양이 엄청 많은데요!! 찰리체리 선배님께 인사드려야지! 

찰리체리 : 잘 먹겠습니다!


아까 분명 마감하시려고 했던 것 같은데 어디서 국수가 나왔는지 5분도 안돼서 뚝딱 가져다주셨다. 

한 그릇만 우선 나눠먹이고  늦은 저녁에 간식을 좀 더 먹이면 될 것이라 생각했다. 가져다주신 콩국수는 세 그릇 같은 한 그릇을 주셨다.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70년쯤  후배 꼬마들을 배고프게 보낼 수 없는 마음이셨던 것 같았다. 세 그릇 같은 한 그릇은 체리가 보기에도 많아 보였던 것 같았다. 

체리 : 엄마 우리 얼마 내? 

나: 왜? 

체리 : 한 그릇이 아닌 것 같은데?

아이들이 먹고 있는 동안 웨이터 할아버지는 언제 일했냐는 듯 쓱 나가시더니 별다른 인사 없이 그렇게 집으로 향하셨다.  할아버지의 뒷모습에서 6.25를 겪은 어린 학생의 모습이 보이는 듯싶었다.  항상 배고픔에 살던 시절.  배고픔보다 더 두려움이 컸던 시절,  옆집 앞집 같이 놀던 친구들이 학교 앞에서 총으로 죽는 것을 목격하던 그 시절 할아버지의 인생이 순간 보이는 듯했다.  


큰 아이에게 1년이 지날 때쯤 물어보았다. 

"혹시 38선이 무엇인 줄 알아?"

"어 그때 콩국수 집 할아버지가 말해주셨잖아. "

"그게 생각나?"

"그럼. 할아버지가 이야기해 주셨잖아. 학교에서 있던 일도 알려주시고."

아이들이 이곳에서 지내면서 70년을 뛰어넘는 누군가의 삶을 느낄 수 있었고, 슬픈 역사를 통해 자기와 비슷한 나이였을 70년 전 할아버지의 모습을 평생 기억하겠구나 싶었다. 

그날의 콩국수는 얼마짜리 콩국수였을까?  

다시 만나서 인사드려 보고 싶은 마음에 1년 뒤 여름을 기다려보았다. 언제부터 시작된 보릿고개 콩국수집인지 모르지만 2022년을 끝으로 문을 닫게 되었다. 2023년 아무리 기다려도 콩국수 집은 시작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날의 콩국수 맛을 다시 먹을 수 없다는 사실을 직감하게 되었다. 2023년 여름은 그렇게 아쉬움과 함께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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