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비가 준 선물

by 하얀

가을비치고는 제법 비가 오고 있었다. 몽 선생님은 침대에서 일어나 커튼을 젖혔다. 저녁인지 헷갈리게 하는 하늘에서 빗줄기가 쉴 새 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어제저녁까지만 해도 흐림 정도였는데, 선생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오늘은 한 달에 한 번, 아이들이 가장 손꼽아 기다리는 자전거 라이딩 날이었다.

특히 마루는 어제부터 들떠 있었다. "선생님, 드디어 가을라이딩이에요! 우리 진짜 멀리까지 가요!" 하며 눈을 반짝이던 모습이 떠올랐다. 선생님은 단체 톡방에 조심스럽게 메시지를 남겼다.

[안녕하세요! 오늘 하필 자전거 라이딩 날에 비가 오네요. 날씨 관계로 자전거를 타기에 힘들 듯하여 가볍게 차로 둘러보고 일찍 들어오고자 합니다. 등교 시 우산만 잘 챙겨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알겠습니다라는 다른 메시지와 다르게 마루엄마는 마루의 아쉬움을 알렸다.

[마루가 많이 기다렸는데 라이딩 못 간다고 하니까 눈물이 글썽글썽하네요. 아쉽지만 오늘도 잘 부탁드려요]


학교에 도착한 아이들의 표정은 제각각이었다. 새온은 언제나처럼 담담한 얼굴이었지만, 어딘가 풀이 죽어 있었다. 도담이는 우산을 털며 "괜찮아요, 다음에 또 타면 되죠" 하고 조용히 웃었다. 누리는 "비 오는 것도 나름 낭만적이지 않아요?" 하며 분위기를 띄우려 했다. 마루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고 했으나, 눈가가 촉촉해 보이기도 했다. 선생님은 아이들을 교실 한가운데로 모았다.

"자, 그럼 우리 오늘 뭐 할까? 학교에서 수업하면 오늘은 정말 수업이 안될 것 같은데. 오늘은 야외활동이었으니까. 비 오는 날 야외활동으로 어떤 것이 좋은지 의견을 내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창밖으로 비 내리는 소리만 들렸다.

"아무도 하고 싶은 게 없으면 오늘은 학교에서 수업한다!." 몽 선생님은 특유의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누리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영화 보면 안 돼요?"

"영화?"

"네! 우리 읍내 작은 영화관 있잖아요. 거기 가면 되잖아요."

새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데요. 그리고... 점심도 밖에서 먹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오, 나도 그거 좋아!" 도담이가 평소답지 않게 목소리를 높였다.

아이들이 하나둘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마루도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그리고요, " 새온이 마루를 슬쩍 쳐다봤다. "볼링은 어때요? 저번에 지나가다 봤는데 볼링장 새로 생긴 거 있던데요."

"볼링?" 마루의 눈이 반짝였다. "나 볼링 해본 적 있어."

"그래? 그럼 우리 시합 한번 해볼까?" 선생님이 웃으며 말했다. "대신 진 사람이 아이스크림 사는 거다."

"오케이!"


영화관까지 가는 차 안은 시끌벅적했다. 빗소리를 뚫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창밖으로는 단풍이 시작된 설악산이 보였다. 영화관 앞에 도착하자, 아이들은 포스터를 보며 신이 났다.

"트랜스포머다! 이거 진짜 보고 싶었는데!"

"마루야, 너 옵티머스 프라임. 나는 범블비 할게." 새온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뭐야, 나는 메가트론 할래. 우리 원수야!" 마루가 새온에게 으르렁거렸다.

아이들은 선생님을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복도에서 로봇 흉내를 내며 킥킥거렸다. 영화가 시작되고, 어두운 상영관 안에서 아이들의 눈이 반짝였다. 선생님은 팝콘을 씹으며 옆자리의 아이들을 바라봤다.. 모두가 같은 장면을 보며 같은 순간에 웃고, 긴장하고, 함께 소리도 질렀다.

영화가 끝나고 밖으로 나오자,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아까보다는 조금 잦아든 것 같았다.

"배고파 죽겠다!" 마루가 배를 움켜쥐었다.

"뭐 먹을까?"

"비 오는 날엔..." 누리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뜨끈한 국물이 최고죠!"

"오, 인정!" 새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육개장 어때요?" 도담이가 물었다.

"완전 좋아! 여기 바로 앞에 육개장 맛있어요!" 누리가 가게를 가리켰다. 아이들은 한 목소리로 동의했다. 식당 안으로 들어서자 따뜻한 김과 칼칼한 육개장 냄새가 아이들을 사로잡았다.

"진짜 비 오는 날엔 이게 최고다." 새온도 고개를 끄덕였다.

도담이는 조용히 먹으면서도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누리는 김치를 집어 먹으며 "우리 오늘 진짜 완벽한 하루 보내는 것 같아요" 하고 말했다.

선생님은 아이들이 행복하게 밥 먹는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가끔은 계획이 어긋나는 게 나쁘지 않구나.



점심을 먹고 볼링장으로 향했다. 새로 생긴 볼링장은 깔끔하고 밝았다. 형광등 불빛이 윤기 나는 레인을 비추고 있었다. 모두들 학교에서 공부할 시간에 아이들만 볼링장에 있다는 게 신났다.

"선생님 우리 팀 나눠서 대결해요!" 마루가 말했다.

"그래, 선생님은 혼자 하고, 누리랑 새온이 한 팀, 마루랑 도담이 한 팀. 3팀이다!"

아이들은 볼링화를 신으며 서로를 견제했다.

"너희 볼링 쳐봤어?" 새온이 물었다.

"한 번... 배운 적은 없지만 공은 굴릴 줄 알아." 마루가 허세를 부렸다.

"그래? 나도 마찬가지야." 새온이 웃었다.

선생님이 먼저 시범을 보이듯 공을 던졌다. 공이 쿵쿵거리며 굴러가더니 핀 7개를 쓰러뜨렸다.

"오! 선생님 잘하시는데요?"

"이번에는 안 져줄 거야. 저번 탁구 때 너희한테 진 게 아직도 아쉽거든."

"에이, 그때 새온이가 정정당당하게 이긴 거예요!" 누리가 항변했다.

게임이 시작됐다. 처음엔 공이 옆 레인으로 굴러가기도 하고, 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몇 판을 치다 보니 점점 요령이 생겼다.

게임은 치열했다. 점수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다. 선생님도 지지 않으려고 집중했다. 하지만 결국 마지막에서 누리와 새온 팀이 역전했다.

"우리가 이겼다!" 누리가 새온과 하이파이브를 했다. 누리는 방방 뛰며 새온이를 번쩍 들어 올렸다.

선생님은 약속대로 아이스크림을 샀다. 볼링장 옆 편의점에서 각자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골랐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오늘 진짜 재밌었어요."

아이들은 아이스크림을 핥으며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차를 타고 학교로 돌아가는 길, 비는 거의 그쳤다. 구름 사이로 희미하게 햇살이 비쳤다. 젖은 나뭇잎들이 반짝거렸다.

"오늘 같이 나와서 노는 것도 너무 좋네요." 누리가 말했다.

선생님이 백미러로 아이들을 보며 웃었다. "그래. 가끔은 이렇게 계획 바뀌는 것도 괜찮지?"

"근데 내일부터는 다시 공부죠?" 도담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연하지. 내일부터 아침마다 운동장 10바퀴씩 뛰고, 수학 문제도 풀고, 영어 단어 시험도 본다."

"에이..." 아이들이 일제히 신음했다.

"그래도 오늘은 완전 꿀잼이었어요. 다음에 시간 되면 볼링 또 하러 가요!" 마루가 신나게 말했다.

"그래, 그러자!"

창밖으로 가을 산이 펼쳐졌다. 빨강, 주황, 노랑으로 물든 단풍들이 비에 젖어 더욱 선명했다. 선생님은 운전하며 생각했다. 아침에 눈물을 글썽이던 마루가, 지금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얼굴로 웃고 있다. 때로는 계획대로 되지 않는 하루가, 더 특별한 하루가 되기도 하는구나. 그렇게 아이들의 비 오는 날 가을은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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