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옷깃을 여미며

배움이 쉼이 되는 순간

by 김인숙

살갗을 파고드는 시린 바람이 옷깃을 단단히 여미게 만드는 계절이다. 찬 바람에 몸을 움츠리다 보면 문득 내 마음의 옷깃은 어디쯤 와 있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올 한 해, 나는 참으로 부지런히 마음을 여미며 달려왔다. 때로는 지치고, 때로는 아팠으며, 숨 가쁜 일상에 휘청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모든 고단함은 결국 지금의 나를 지탱하는 뿌리가 되었고,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을 더욱 깊고 단단하게 빚어주었다.


어느 늦은 저녁, 퇴근길의 피로가 어깨를 짓눌렀다. 날씨가 추워 집에 가서 따뜻한 이불 속에 들어가 책이나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발걸음은 문학관으로 향했다. 이미 수업은 한창일 시간이었다. 갈까 말까를 망설이는 마음 사이로 ‘배우고 싶다’는 열망이 고개를 들었다. 누군가에게 폐가 될지도 모른다는 미안함보다, 내가 간절히 원하던 배움의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컸나 보다.


문학관에 도착했을 때 건물은 의외로 고요했다. 전체가 소등된 채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겨 있었고, 그 막막함에 내 마음도 잠시 길을 잃은 듯했다. 휴대폰으로 왔을 법한 지인의 연락처를 찾고 있던 그때, 어둠을 가르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업받으러 오셨어요?”


안도감에 고개를 돌리니 문학관 실장님이 서 계셨다.


“네!”


하고 대답하는 내 목소리에는 반가움이 묻어났다.

그는 이내 나를 알아보고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 인숙 씨였네! 이 건물 말고 수업은 옆 건물이에요. 그런데 바쁜 사람이 여기까지 또 배우러 오고… 좀 쉬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의 걱정 어린 물음에 나는 주저 없이 웃으며 답했다.


“아니에요, 실장님. 제게는 이게 쉬는 거예요.”


실장님은 잠시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미소를 지으셨다.


“하긴, 제 친구 중에도 운전을 너무 좋아해서 운전하는 게 곧 쉬는 거라는 사람이 있더라고요.”


그 말과 함께 우리는 수업실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계단을 오르며 문득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왜 이토록 바쁜 삶을 자처하는가.’


늘 시간에 쫓기고 몸은 고단하지만, 나의 목적지는 언제나 분명했다.

어제보다 조금 더 나은 나를 만나는 자리, 바로 배움이었다. 내게 배움은 에너지를 소모하는 노동이 아니라, 소란한 세상으로부터 잠시 물러나 나 자신을 회복하는 고요한 방이자 영혼의 안식처였다.


이런 나의 모습은, 문득 시대를 앞서 살아간 이들의 삶을 떠올리게 한다. 다산(茶山) 정약용은 18년이라는 길고도 고통스러운 유배 생활 속에서도 결코 붓을 놓지 않았다. 그에게 유배지는 절망의 끝이 아니라, 배움을 통해 자신을 완성해 가는 거대한 서재였다. 다산에게 배움은 고통을 잊게 하는 유일한 안식이었고, 무너져가는 자아를 지탱하는 마지막 힘이었다.


또 한 사람, 평발이라는 신체적 한계를 딛고 세계 무대에 선 축구선수 박지성이다. 그에게 축구는 단순히 잘하는 일뿐만 아니라, 온 마음을 다해하고 싶은 일이었고, 동시에 평생을 걸고 책임져야 할 일이었다. 남들이 보기엔 혹독한 훈련과 반복의 연속이었겠지만, 그는 그 몰입 속에서 자신의 존재 이유를 발견했다. 다산이 배움으로 유배의 시간을 견뎌냈다면, 박지성은 열정으로 자신의 삶을 증명해 보였다. 두 사람에게 배움과 훈련은 자신을 소모하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가장 자기답게 만드는 휴식의 또 다른 이름이었을 것이다.


위인들의 삶이 그러했듯, 나의 분주한 일상도 배움을 통해 비로소 방향을 갖게 된다. 내가 배우고 익힌 것들은 나 혼자만의 성취로 머물지 않는다. 어느 날은 가족에게 건네는 말 한마디로, 또 어느 날은 내가 아끼는 사람의 등을 살짝 밀어주는 작은 용기가 되어 흘러간다. 그렇게 나의 배움은 조용히 사람 사이를 건너가며, 세상을 아주 조금 덜 차갑게 만든다. 그 사실이 내가 배움을 쉽게 내려놓지 못하는 가장 솔직한 이유다.


지치고 힘들었던 순간들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멈추고 싶었던 마음도 여러 번 들었다. 그럼에도 여기까지 걸어온 나 자신에게, 오늘은 조용히 말을 건네고 싶다. 쉽지 않은 날들 속에서도 끝내 포기하지 않고, 스스로를 다잡아 여기까지 데려와 줘서 고맙다고.


살갗을 파고드는 바람에 옷깃을 여미듯, 나는 다시 한번 마음의 옷깃을 여민다. 변화무쌍한 날씨 속에서도 배움을 놓지 않는 나의 선택을 믿고, 다가오는 시간 앞에서 조용히 그리고 단단하게 서 있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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