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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ergeia Sep 17. 2024

햇살속으로

아픔이 사라지는 공간

아팠다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머릿속의 회로가 밖으로 튀어나가 자리를 찾지 못하고 여기저기 방황하는 걸까? 정신은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한 스트레스를 오롯이 받아온 몸이 드디어 봉기를 일으켰나 보다. 강도 높은 아픔은 언제나 그렇든 일상을 단순하게 만들었다.. 집-회사-집-회사… 어느새 나는 또 시계 추처럼 양쪽 끝을 끝없이 반복하고 있었다.


가고 싶다

이렇게 몸이 엉망인 상황이라 쉬고 싶었다. 가장 편안함을 느끼는 공간에 그저 나를 두고 싶었다. 아픈 몸으로 인해 불참하게 된 회식이 자유시간을 주었다. 신영 복 선생님이 말씀하신 자유(자기의 이유)를 찾으러 가야겠다. 요즘 나는 ‘책방에서 책을 넘기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수립했다. 직장인의 일반적인 퇴근시간 이후에도 어느 정도 머물 수 있게 늦은 시간까지 문이 열려 있는 곳, 책방에 조금이라도 더 머물 수 있게 내 현재 위치에서 이동시간이 짧은 곳을 찾았다.


새로운 길

책방으로 향하는 길은 일상 속에 꽁꽁 숨어있던 사잇길을 찾는 경험이다. 내 작은 몸뚱이가 주로 머물러 있는 곳은 내가 사는 마을, 회사가 있는 동네 그리고 그 반경 1km 정도이다. 나머지 공간은 부러 찾아가지 않는 한 나와는 관계가 없이 그저 존재하는 곳일 뿐이다. 최종 목적지인 책방 자체가 설렘을 불러일으키지만, 그 시작은 그곳을 향하는 첫걸음부터다. 매일 타던 퇴근길 지하철 노선이 달라지고, 한 번도 하차하지 않았던 곳에 걸음을 내딛고, 지도 앱에서 목적지와의 거리가 좁혀지는 것을 보면서 점점 기대감이 쌓여간다. 이런 모습은 우리나라에 여행 온 외국인이 길을 찾는 모습과 매한가지다. 아… 지금 내가 여행 중이구나. 나는 왜 ‘여행’이라고 명징하게 이름 붙여진 것에만 그 옷을 걸쳤을까. 다시 한번 마르쉘 프루스트의 말이 떠오른다.


진정한 여행은 새로운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야를 갖는 것이다
마르쉘 프루스트


드디어 조우

예상하지 못한 곳에 책방이 빛나고 있었다. 이미 주위에 깔린 어스름함으로 인해 책방이 더 반짝였던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드디어 보고 싶은 것을 눈앞에 마주한 내가 개안이 된 것일지도. 주거공간 속에 위치하였기에 우연의 이름으로 만나기는 어려워 보인다. 책을 향한 마음이 있어야지만 부러 알아보고 올 수 있는 곳. 두근두근하는 마음이 먼저 책방 문을 넘어섰다. 들어서자마자 오른쪽 대각선 공간에 진행 중인 모임이 보였다. 독서모임인지 묻자 작가와의 만남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공간의 반대편에는 술을 마실 수 있는 Bar가 있었는데 책방지기님이 두 명의 손님을 앞에 두고 담소를 나누고 계셨다. 평일 저녁이라 고요가 깔려있을 거라 예상했는데 흥성흥성함을 마주하니 나도 덩달아 신났다. 생면부지의 사람들이지만 책방을 찾아온 그 마음에 동지애를 느꼈나 보다. 두 공간 모두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기에 홀로 온 나는 자유를 만끽할 수 있었다.

크지 않은 공간이 책들로 그득하다. 구매 후 읽어달라는 메시지를 본 이후 책을 고르기 위해 심사숙고에 들어갔다. 도서관의 책을 통째로 읽은 에디슨에게는 털끝 한올도 미치지 못하지만 진열된 책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책방에 오면 모르던 책을 알게 되는 발견의 기쁨이 있다. 그럴 때면 설렘 속에 보물 찾기를 하던 어린 시절의 내가 보인다. 마음에 훅 들어오는 책을 만날 때면 “심봤다”를 세 번 외치고 싶다. 그렇다고 책방에서 새로움만 찾는 건 아니다. 유심히 살피는 것 중 하나는 구면인 책이다. 내가 읽은 책이 서가에 꽂혀있으면  보이지 않는 독서 주파수로 책방지기님과 연결된 느낌이다. 연결성… 책을 읽는 여러 이유 중 하나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기 위해서인데, 같은 책에 공명하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든든해진다.  

박연준 시인의 <듣는 사람> 중 “기쁨은 우리를 행동하게 하지만 슬픔은 우리를 사유하게 한다."라는 표현은 작가와 책을 더 알고 싶게 만든다. 박연옥 작가의 <문학처방전>은 책의 효용을 생각하는 것이 내 생각과 비슷했고, 웨일 미닥/오렐 아리마의 <인생은 둘이서 맘보>는 시간이 흐름에 따른 삶의 수순이 보여서 눈길이 머물렀다. <이수지의 그림책>, 욘 포세의 <아침 그리고 저녁> 은 최근 알게 된 책이라 그냥 지나치기 아쉬웠다. 책과 책 사이의 징검다리가 끝도 없이 이어진다. 오후 11시까지 오픈이라는 것에 너무 여유를 부렸나 보다. 이런 식으로 보다가는 오늘 내로 구매할 책을 선택할 수 없겠다.


결국 내 손에 들어온 책은 최근 읽은 책의 작가와 연결되었다. 최진영 작가의 <쓰게 될 것>과 김혼비 작가의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김혼비 작가의 작가 소개를 보자마자 또 빵 터졌다. 대체 웃지 않을 도리가 없다.


오랜 시간 축구를 보며 천국과 지옥을 오가다가 한번 직접 해볼까? 싶어 덜컥 축구를 시작하는 바람에 지금은 축구를 하며 천국과 지옥을 오가고 있다.(후략)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김혼비 작가 소개 중


퇴근 즈음 무거웠던 발걸음은 이미 새털처럼 가뿐해져 있었다. 내가 정말 아팠었을까? 책으로 둘러싸인 책방이라는 공간 자체가 내게는 치료제인가 보다. 마음과 몸이 상호작용 한다는 것도 실감 난다. 앞으로는 아프더라도, 아니 아프니까 더더욱 책방을 기웃거려야겠다. 병마를 떨치고 일상을 살아낼 수 있는 에너지가 완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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